걷고 걷어 그리며 그리다

이지연展 / LEEJIYEN / 李知娟 / installation   2015_1107 ▶ 2016_0327 / 월요일 휴관

이지연_거로마을지도_한지에 수채_66×70cm_2015

초대일시 / 2015_1107_토요일_03: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공간 양 CULTURE SPACE YANG 제주 제주시 거로남6길 13 Tel. +82.64.755.2018 culturespaceyang.com

걷기와 사유, 기억을 통한 공간의 재구축 - 이지연의 거로마을 그림지도 1 ●지도란 무엇인가? 지도(地圖)는 문자 그대로 땅을 그린 것이다. 땅은 제각각의 무늬를 지닌다. 그 무늬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과 인간의 흔적이 한데 섞인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땅의 무늬를 담은 지도에는 땅의 생김새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거기에 뿌리내린 인간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긴다. 더불어 지도 작업에는 제한된 지면(紙面) 안에 다양한 정보를 옮겨야한다는 제약도 존재한다. "거로의 사연과 기억들을 한 장의 평면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숱하게 마을을 걸으며 생각을 걷어내야 했다"는 이지연 작가의 글은 이러한 고충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켜켜이 쌓인 기억들을 읽고 또 읽어내어 번번한 백지에 풀어 놓으면 번번이 지도로 보이곤 했다"라는 문장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지도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지연_능동산_종이에 수채_25×35cm_2015

이지연은 동화책 삽화와 지도를 그리는 작가다.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2회 연속 선정되기도 했던 그녀는 『안녕, 겨울아』(2013)의 그림을 그렸고, 『우리 집에 갈래?』(2015)라는 책을 냈으며 마장동, 서울광장 등의 그림지도를 제작했다. 그리고 제주에 삶의 터전을 잡은 후, 수개월에 걸친 작업을 거쳐 거로마을의 그림지도를 완성했다. 이 지도 작업을 위해 이지연은 마을의 어르신들께 옛 이야기를 듣고, 마을 곳곳을 여러 차례 답사했으며 이에 대한 자신의 상상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 거로마을 그림지도는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전달하는 자료라기보다 마을에 대한 기억과 흔적, 작가 자신이 직접 걸으면서 몸으로 느꼈던 감각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지연_거로마을운동장_한지에 혼합재료_31×34cm_2015

작가는 거로마을 그림지도 작업을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걷기의 역사(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2000)의 저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걷기'를 이루는 세 개의 별이 육체, 상상력, 세계라고 쓰고 있다. 이 별들을 이어서 별자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걷는 행위다. 다시 말해 '걷기'를 통해서 제각각 떨어져 있는 별들 사이에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솔닛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이번 그림지도 작업은 작가 이지연의 육체와 그녀의 상상력, 거로마을이라는 세 별로 이어진 하나의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지연_문화공간 양_종이에 수채_35×25cm_2015

이지연의 그림지도는 어떤 면에서 '심리지도'에 가깝다. 심리지도 혹은 심리지리는 특히 1950-60년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이라는 아방가르드 그룹과 연관되는 개념이다. 예술과 삶의 일치, 일상적 삶의 창조적 실천을 강조했던 이 그룹의 이론적 대표자 기 드보르(Guy Debord, 1931-1994)에 따르면 심리지도란 "지리적 환경이 개인의 감정과 행동에 끼치는 특수한 효과에 관한 연구"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그룹의 예술가들은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소비 자본주의와 획일화된 도시문화에 반대하기 위해 이 심리지도를 활용한 것이다. 이 때 지도는 개인의 감정과 무의식 등으로 공간을 재구축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이와 유사하게 거로마을 그림지도는 작가 이지연 개인의 체험과 기억, 상상으로 재창조된 공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일정한 기호와 정확한 축적에 기반을 둔 표준적인 지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지연_공회당_한지에 혼합재료_31×34cm_2015
이지연_몰푸리_한지에 혼합재료_31×34cm_2015

2 ● 이지연이 지금까지 작업한 그림책이나 지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동양화를 전공한 그녀의 이력이 암암리에 드러난다. 크게 세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첫째로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선염(渲染) 기법이 작업 전반에 사용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다시 말해 그림에서 먹 혹은 물감이 넓게 번져 나가면서 어느 새 면이 구획되고 형태가 생겨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색이 종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표현은 화면 전체에 따스한 감수성을 부여한다. 이지연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화면을 지배하는 하나의 소실점이 없다는 것이다. 즉, 어느 새 우리에게 익숙해진 서구의 원근법적 공간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그림은 하나의 소실점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배치를 보여주며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나무와 집들은 대체로 누워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는 어린 아이의 그림 속에서 흔히 확인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그림은 자연과 인간, 동물과 사람이 평화롭게 어우러진 세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스며듦과 자유로운 공간 표현, 조화로움을 펼쳐낸 화면은 보는 이들에게 포근한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이지연_여자들이 목욕하는 곳_한지에 혼합재료_31×34cm_2015
이지연_원남소_한지에 혼합재료_31×34cm_2015

이지연의 작품세계 전반에서 전해지는 맑고 순수한 분위기는 거로마을 그림지도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이번 전시 『걷고 걷어 그리며 그리다』에서 작가는 거로마을 지도와 연관된 스케치와 11점의 그림을 선보인다. 화선지나 얇은 도화지에 오일 파스텔, 수채화 물감 등 다양한 재료와 배채법(背彩法), 찍기 등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도입한 작업이다. 전시에 출품된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배경에 세필(細筆)로 그려낸 인물이나 동물을 결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지연_등돌 들기_한지에 혼합재료_25×35cm_2015
이지연_만평-동문_한지에 혼합재료_31×34cm_2015

3 ● 무엇보다도 이지연의 거로마을 그림지도 작업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그 안에 거로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는 데 있다. 먼저 작가는 마을을 관통하는 '연삼로'를 중심으로 '윗거로'와 '아랫거로'로 나누어진 상태를 고려하여 지도의 위아래 방향을 돌려서 볼 수 있게 제작했다. 그리고 능동산, 마을운동장, 문화공간 양 같은 지금의 거로마을 모습뿐만 아니라 말들을 풀어 물을 먹이던 장소, 남자 목욕하는 곳, 여자 목욕하는 곳 등 이미 사라진 마을 곳곳의 흔적을 함께 그렸다. 이와 관련하여 '몰푸리', '원남소', '새통' 등 정감어린 옛 지명이 등장한다. 또한 거로마을의 공동 모임장소이자 유서 깊은 교학문화(敎學文化)의 전통을 지닌 마을답게 야간강습소가 열렸던 '공회당'과 4.3사건 당시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지는 비극을 겪은 이후 마을 사람들이 자체적 방위를 위해 쌓았던 성축이 되살아난다. 그런가하면 이지연의 그림은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를테면 '등돌거리'에서 커다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것이 동네 청년들이 치르는 일종의 성년식이었다는 얘기, '대비폭낭'이라 불린 천년 고목에 덕이 깃들어 있어 그 나무에 올라가 놀던 아이들이 떨어져도 다치지 않았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 이와 같이 이지연의 거로마을 그림지도는 약 900여 년 전에 샘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래 이어져온 마을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아 사라진 시공간과 빛바랜 기억을 우리 앞에 불러낸다. 이 지도 작업에서 거로마을의 현재는 과거와 만나며, '마을을 숱하게 걸었던' 작가의 기억은 공동체의 아련한 기억과 포개어진다. 이지연 작가의 걷기와 사유, 개인의 기억과 거로마을의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이 응축된 그림지도를 통해 우리는 이 마을과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 김보라

Vol.20151108l | 이지연展 / LEEJIYEN / 李知娟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