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617g | 최기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5_1105_목요일_06:00pm
전시중 아프리카 티비 생중계 afree.ca/kichang2015 1회 / 2015_1111_수요일_12:00pm~04:00pm 2회 / 2015_1118_수요일_12:00pm~04:00pm 3회 / 2015_1125_수요일_12:00pm~04: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용산구 서계동 236-22 Yongsangu Seogyedong 236-22 서울 용산구 서계동 236-22번지 Tel. +82.10.9107.0311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시대에 '행복'이란 단어는 언어로의 환원을 거부하고 싶을 만큼 초현실적이다. 요즘은 누군가에게 "행복하니?"라고 묻는다는건 서로의 웃픈 현실을 공유하기 위한 행위정도로 해석된다. 작가가 전시 제목으로 선택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버린 예술가의 자아도취적 설교일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시를 준비하며 읽었다던 버트런트의 러셀의 책 『행복의 정복』에서 밝힌 궁극적인 행복에 다다르는 비법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미술가 최기창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직시하는데 있다. 이것은 미술에 대한 자조(自照)적 서사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미술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작업 『행복으로 가는 길』(2015)은 장시간에 걸쳐 제작되어 가는 '바닥'이다. 전시 공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몇 날 며칠을 쓰고 또 쓰는 필사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눈에 포착된 오늘의 문제적 뉴스는 한 글자 한 글자 수를 놓듯이 시멘트 위에 새겨진다. 양생이 끝난 바닥 위에 그는 다시 시멘트를 개어 부운 뒤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새겨나가는데, 이 행위는 전시 동안에도 계속된다. 모든 것이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무엇이 문제라고 말하기 힘든 지금을 살아가는 미술가의 '사회수련법' 처럼 보인다. 한시적 퍼포먼스가 아닌 지속적으로 촬영된 작업 과정은 아프리카 TV에 라이브로 방송된다. 이 방송을 알리기 위한 특별한 홍보도 마케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전시장 벽 한 켠에 링크 주소가 적혀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정치인과 예술가는 사랑을 먹고 살아간다'라고 했었는데, 최기창은 사랑을 얻는데 관심 있다기 보다는 이를 시청할 '당신'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작가-관객 사이의 시차와 묘한 긴장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들 간의 관계성을 다시 사유하려는 데에 숨의 의도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돈을 내고 별 풍선을 쏴줘야만 동영상 기록물들이 유지 가능한 아프리카 TV의 운영방식은, 그의 순수한 태도를 냉소하듯 우리의 리얼한 삶의 조건들이 존재 했음을 과시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디디고 서면 다듬어 지지 않은 시멘트 조각들은 발아래 바슬바슬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가 관객인 우리에 의해 사라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마치 미술 작업은 갈등과 망각의 연속이며, 이에 반복되고, 기록되고, 닳아버리고, 누적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듯, 수 없는 반복의 과정을 통한 작업의 결과물은 시크하게 공간으로 환원되어 방치된다.
『행복으로 가는 길』과 연결된 벽에는 신체 기관들이 드러나 있다. 자신의 미술 작동법을 연구한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이다. 정면의 「Brainstorming」(2015)은 무서울 정도로 나<너<우리<나<너<우리 나<너<우리가 반복되며, 옆 벽의 「세 개의 심장」(2015)에는 각기 나, 너, 우리가 분리되어 다시 한번 반복된다. 작가의 진술에 따르면, 「Brainstorming」은 작업 중 작가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는 자아와 타자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논리적 사고 체계와 흐름을 설명하고 있으며, 「세 개의 심장」은 각각의 요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신체리듬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업들과 연장선상에 놓이는 2층의 작업 「Muse」(2015)는 앵무새의 동선에 따라 반응하는 방울을 달아놓고 새의 움직임의 불연속적인 소리를 따라다닌다. 새장 속에 앵무새가 움직이면 얼마나 움직이겠는가 마는 불규칙적으로 (어쩌면 규칙적으로) 들려올 방울 소리는 작가적 사고 과정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은유하고, 논리와 직관의 반응 속도 사이에 우연치 않게 발견되는 알고리즘적 일치가 '무엇' 즉 작업 탄생의 포인트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세 개의 심장」과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벽에는 흐릿한 실루엣을 남긴 얼굴 - 작가는 이것을 살아갈 때 아주 긴요한 표정이라고 묘사함- 은 감탄사 '하-', '하-', '하-' 로 감싸여 있다. 그리고 「밝은 얼굴」(2015) 맞은편에는 「하」(2015)라는 제목의 곡 악보가 걸려있다. 상형문자처럼 보였던 '하-', '하-', '하-'들이 가사로 치환된다. '지칠 때까지' 부르도록 요구하는 이 곡의 악보는 일정한 박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두 마디마다 하나씩 음을 쌓다가 다시 그 음들을 덜어간다. 메이져화음과 마이너 화음을 번갈아 음이 쌓이거나 덜어내도록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11개 음이 거의 하나의 커다란 소리로 뒤엉키는 중반부의 최고조 지점은 이내 해소되어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곡은 최기창 작가가 만든 미술 노동을 위한 음계들로 보이는 일종의 '노동요'이다. 상상력으로 들어야 할 이 노동요는 드니 디드로가 말도 하고 귀도 들리는데 아름다움과 심오한 사상에 대하여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동시대 인들에게 썼던 편지처럼, 무엇을 말을 하고 싶어도 그 무엇을 말하지 못하는 동시대 미술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제례악 악보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러보고 싶다면 각오를 해야 한다. 혼자 부르기에 한계가 있거니와, 같이 불러 줄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지칠 때까지 일치와 불일치의 과정을 반복해야 하니 시작과 끝을 감당할 각오가 필요하다.
이렇듯 최기창의 작업에서 감지되는 예민함은 인식과 감각의 다층적 연구이자 실험으로 지속되어 왔던 연속 작업 「Interviewee」(2014) 에서도 발견된다. 관객의 등장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이 작업은 관객이 피실험자로서 의자를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무작위 선택에 따라 골라진 분절된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은 인, 적성검사에 나오는 질문과 흡사하다. 관객은 앉아있는 시간만큼 무의미한 질문을 받게 되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이런 검사에 반작용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는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기 위해 소리에 집중한다. 사실 피실험자의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작업을 외면하거나 무뎌지면 된다. 불가항력적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인식과 감각에 무뎌짐을 강요 받는 순간과 교차된다. 작가가 제안하는 연극적 무대는 더 효율적으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예화시키는 피실험자들에게 이 순간을 집중하게 하고 마주한 어두움 속에 반사되는 무기력한 자신과 직면하게 한다. 그나마 가장 행복에 가까운 희망적인 이미지는 나머지 공간에 놓여있는 아이들이 만든 불의 형상「잔 불」(2015)에서 발견된다. 일견 순수한 욕망으로 보이는 이 불들은 우리의 노예적 욕망의 불사름을 저지 하는 듯 보인다.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가 진짜 세상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것이라 본다면, 작가는 아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잔불을 가져다 놓는 것을 선택하여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던 예술가의 역할은 진짜 세상이 어떤가를 알려주는 역할이어야 한다. 하지만, 최기창은 여전히 묵묵하다. 차라리 사그라드는 잔 불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무작위'와 '반복'을 통해 일치와 불일치의 위태로운 경계를 오가며 작업해왔던 최기창의 작업은 여전히 이번 전시에서도 내밀하게 배어있다. 다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 과정이 작가의 몸으로 '발화' 된다는 점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노동은 '반복'의 작업정신이 도치된 상태, 즉 (일반적인)'작업정신'의 반복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최기창 작가가 주변의 반복적 현상들에 대해 집중하고 그에서 발견되는 우연성에 의지했었다면, 이번에는 미술가인 자신과 미술 행위에 집중한 채 주변을 덤덤히 응시한다. 자신의 신체 기관과 사회의 관계 사이에서 몸으로 체화되어 나오는, 과거로부터 순서가 뒤바뀌고 그로 인해 반복에는 운율이 생겨난다. 그 운율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미술'을 적나라하게 벗겨냈으며, 이는 지금 (한국)미술계가 임의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 경위를 추적해 보려는 듯 시종일관 차분하고 매끄럽다. 어쩌면 미끄러지듯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미술가 최기창은 몸으로 발화하고, 일치와 불일치가 교차하는 지점들을 운율 삼아 차라리 말을 하지 않기를 선택한 지도 모르겠다. 블랑쇼가 어느 글에선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글쓰기로 말을 걸어야 하며, 예술은 결국 침묵한다'고 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최다영
Vol.20151105j | 최기창展 / CHOIKICHANG / 崔基昌 / installation.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