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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104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월요일_12:00pm~06:00pm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 7길 37(팔판동 115-52번지) B1 Tel. +82.2.737.4678 www.gallerydos.com
차이의 흔적들로 해체된 보편성 ● 민재영의 '장면들(場面, the scenes)' 전에는 현대사회의 장면들이라 할 만 한 풍경, 가령 현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고 있는 대중들이 있다. 수년째 지속해 왔던 주제에 더하여 이번 전시에 첨가된 부분은 대중이자 작가가 속한 특수 집단이다. 작가는 '이제까지 그려온 이미지들은 도심에 사는 비슷한 시민들의 매일의 생활, 그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누적되었을 체험이미지들의 보편적 교집합 같은 것을 상정하고, 그런 접점이자 전형이 되는 심리적 잔상을 실제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였다고 밝힌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나름대로 생각하던 보편의 개념이나 범주에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단적으로, 수 십 년 째 작업이라는 한길을 걸어왔던 작가의 삶이 그러한 보편의 범주에 속할까에 대한 자문을 하게 된 것이다. 실상은 그러한 '보편적' 질서가 예술이나 예술가를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들지는 않았는가. ● 작업을 계속 한다 해도 '보편적' 질서에 부응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또는 그럴 수 없다면, 또는 그러기 싫다면, 그 '보편'과 작가와의 거리는 갈수록 더 커질 것이다. 민재영의 작품에서 그러한 괴리감은 작가와 장면들 사이에 놓인 스크린의 틈과 간극 속에 이미 있던 것이다. 작품 속에는 존재하는 무의식을 새삼스럽게 의식했다고나 할까. 도시풍경, 또는 자신의 주변풍경을 다루는 작품들은 흔하다. '현대성의 이면인 일상성'(앙리 르페브르)은 현대미술의 주변이 아니라, 몸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재영의 작품이 독특한 지점은 그러한 소재와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작가에게는 한 내용을 전달하는 여러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형식은 언제나 어떤 내용에 대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순간이 매번 의식되지는 않을지라도 형식이 바뀌는 순간은 내용이 바뀌는 순간과 일치한다. 한 편, 변화에 대한 지나친 자의식은 작품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 것이다. ● 어디로 어떻게 갈지 아는 길을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어떤 내용이 아직 그 작가에게 필연성이 있다면 그 내용과 밀착된 형식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민재영에게 그 형식은 우리의 보편적 삶을 담는 형식이었다. 해상도 나쁜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오는 듯한 흐릿한 가로줄을 수묵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그녀만의 특징이다. 1998년 첫 개인전 이래, 최근 몇 년 간은 거의 1년에 한 번 씩의 개인전을 소화해왔으며, 또한 그만큼의 누적 관람자수를 생각할 때 변신에 대한 내외부의 압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를 위한 변화가 아닌, 필연적인 변화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평소의 주제였던 익명적 대중에 작가의 동료들이 끼어들면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야기될지 궁금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도 이전의 스타일이 지배적이다. 작가만의 특성을 내외부에 각인시켜준 특정 형식에 대한 고수는 단지 관성적으로 해왔던 것을 반복할 뿐인가.
작가 스스로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일정한 간격을 가진 가로줄 형상의 구도는 현대적 일상을 표현하는 절묘한 방식이라고 생각된다. 재현을 위한 투명한 창을 교란하는 색 점/선/면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반투명한 스크린을 개입시킨다. 그것은 대상과 실제로 만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대면하는 현대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 대상이 인간이든 상황이든 저 멀리에 있다. '장면들'이라는 표현 자체가 그렇다. 장면들은 잠시 주체의 시선에 머물러 있을 뿐인 무심한 풍경들이다. 침묵 속의 응시는 현대의 도시적 삶이 고무하는 것이다. 대중이면서 개인인 사람들이 과도하게 몰려 살고 있는 도시에서 침묵 속의 응시는 질서의 또 다른 표현이다. 가령 전통적 장터와 현대의 대형마트의 풍경을 비교해 보자. 전 세계에서 온 각양각색의 상품들이 죽 나열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를 면밀히 비교해보는 대형마트의 개별 소비자와 구체적 사용가치를 앞에 두고서 상호간의 거래로 왁자지껄한 전통적 공동체의 모습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 진열대 앞에서 상품을 고르는 소비자는 생산자로서 상품화되어 비교와 선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상품이든 노동자든, 사용연한이나 폐기의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흔히 말해지는 익명적 개인이란 상품처럼 매번 가치가 재평가되고 다른 것과 교체 가능한 인간을 말한다. 민재영의 작품 속 가로줄 선들은 수평적 평준화를 연상시킨다. 그러한 수평적 평준화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뜨거운 정치적 이슈와 연결되기에는 수많은 도약이 필요할 것이다. 반대로 작가가 바라보는 일상은 간접적인 만큼이나 차갑다. 수묵으로 그려진 작품 「미세먼지 로드」는 출퇴근 시간에 밀리는 도로의 풍경을 도로 사정을 중계하는 CCTV처럼 보여준다. '미세먼지'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면 모노톤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 그 풍경에서 사람은 등장하지 않지만, 다수를 규정짓는 피로한 삶이 느껴진다. 저 멀리의 차들은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뒤통수처럼 보이고, 무채색 화면은 피곤했던 하루를 회상하는 시점도 있다.
도시의 밤풍경은 인간을 그림자처럼 만든다. 한지에 수묵 채색으로 그린 작품 「어젯밤」은 물건을 파는 공간과 소비자가 대조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밝은 불빛 아래 어두운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미세 먼지 로드」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가로줄 구조라는 형식 외에 보여 지는 대상을 크게 왜곡하거나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주사선의 단위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한 작품의 일부를 보면 반투명한 색 점/선/면이 어우러지는 추상화지만, 장면들이 그러한 조형적 요소로 흩어지지는 않는다. 작가에게 그림의 유희를 가능케 해 주었을 추상적 층위는 재현대상에 내재된 의미를 감성적으로 증폭시킨다. 동병상련, 또는 경쟁의 입장에서 좀 더 관심 있게 지켜봤을 동료 작가들과 그들이 속한 공간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그린 작품 「103호」에는 형광등 등불 아래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벽 또는 창으로 간주된 후경은 반투명한 작은 색 면들의 배열이 리드미컬하다. ●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작품 「303호」도 그렇고, 가로 줄 구조의 선은 대상과 공간을 하나의 분위기로 통일하는 효과를 준다. 수묵은 유화 같은 서양화 재료와도 다르게, 이러한 대상/배경 사이의 조율을 담백한 방식으로 가능케 했다. 대상은 공간보다 밀도가 있을 뿐, 똑 같은 규칙이 관철된다. 인간은 각자 처한 상황 속에 녹아든다. 주체도 객체도 아닌, 그 모두가 함께 녹아있는 상황은 그림의 독특한 표면을 이룬다. 작품 「20150808」은 미술관 안에서 영상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상부분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지만 거기에서 뭐가 나오는지는 생략했다. 관객에게 쏟아지는 영상의 빛은 전경의 인물들을 그림자처럼 어둡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환하다. 이 스크린은 동시에 빛이 들어오는 창처럼도 보인다. 정보혁명을 거친 시대의 인간들은 누구나 구별되는 두 개의 창을 가지고 있다. 외계로 열린 창과 정보입자의 망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창으로.
스크린의 빛을 되 반사하는 대상들의 실루엣은 명확하지 않고 들쭉날쭉 번져있다. 가령 스크린 앞의 인물들은 명확한 실재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그물망을 이루는 입자로 사라질 듯, 또는 생성된 듯하다. 인간은 매체를 발명해왔지만, 매체계 또한 인간을 만든다/ 또는 사라지게 한다. 작품 「신중하게」 역시 작품들 앞의 군상을 보여주지만, 모두 양복을 입은 장년의 남자들이라는 설정(또는 실제상황)은 약간의 풍자를 내포한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하던 신사복 차림의 남자들은 권위의 상징이다. 그들은 뒷짐을 진채 제목그대로 '신중하게' 작품을 평가한다. 평가받는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의 구별, 또한 그러한 구별에 내재된 권력 관계가 열심히 작업만 해온 작가가 쳐 놓은 그물망에 살짝 걸려있다. 권력관계에 민감한 이들은 평가하는 입장이 됨으로서 평가를 면제받고자 한다. 여성 작가에게 명백한 '유리 천정'을 비롯해서, 현실을 지배하는 보편적 질서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 현실은 늘 불투명한 막에 걸러져 우리에게 도달한다. 작품 속 장면은 흐릿한 현실이면서 흐릿해진 현실이다. '보편'에 대한 변화된 관점은 형식에 대한 새로운 변신도 예고한다. 우선 민재영의 작품 속 도시가 보편적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보편적 역사는 도시들에서 탄생한다고 본다. 도시가 역사적 장소인 이유는 그것이 과거를 인식하고 또한 역사적 과업을 실현시키는 사회 권력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세계 전체에 걸쳐 동일한 날로 나타나는 것은 균등한 추상적 파편들로 잘게 잘려진 경제적 생산의 시간이다. 생산의 시간, 다시 말해 상품 시간은 등가적 간격의 무한한 축적이다. 전형적인 동양화에서 여백으로 간주될 부분까지 빽빽한 선적 구조로 채워진 민재영의 작품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묘사된 '잘게 잘려진', '등가적 간격'을 떠올린다. 그러나 작품에는 등가적 간격 뿐 아니라, 간격에 얼룩진 또 다른 흔적들이 있다. 그 흔적들은 경계를 부식시킨다.
민재영의 그림을 실제로 보는 재미, 또는 그리기라는 행위 속에서의 주된 재미는 이 흔적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작품을 가로지르는 선은 반복되는 듯 하지만 흔적은 그렇지 않다. 흔적들은 작가가 고안한 게임 규칙에 따라 등장하지만, 등장의 양상은 일회적이다. 작가는 우연히 발원되는 새로움을 가시화하는 맥락을 창조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의 규칙과는 다른 예술의 특징이다. 회화가 아니고선 제대로 표현되지 못할 이 미묘한 흔적들을 그리기 위해 여러 소재나 선적 구조가 등장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탈코드화는 코드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보편적 생태계, 즉 근대 도시에 등장하는 주체는 어떤 보편성을 가지는가. 뤽 페리는 「미학적 인간」에서, 근대사회의 논리는 토크빌이 묘사했던 것, 즉 인간들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 공리에 의해 기초가 이루어진 통합의 논리라고 말한다. ● 그러나 근대의 보편적 주체는 예속되어 가는 사이비 개인화에 불과했다. 대중은 집단이면서도 자아로 존재해야 하는 괴리가 있다. 이때 달라야 하고 저때 달라야 하는 주체의 분열은 현대의 조건이 되었다.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이상과 달리, 현대적 주체에는 타율성이 선명한 것이다. 물론 주체를 이루는 것이 타자라는 사실을 소외라고만 봐서도 안 될 것이다. 소외라는 사고는 주체/객체를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전형적이다. 그러나 주체가 구조로 녹아든 현대에 누가 누구를 소외시킨다는 것인가. 주체의 타자화는 불행도 다행도 아닌 중립적 현상이다. 자아동일성의 모습이 절대 필요한 순간에도 차이의 흔적이 있다. 민재영의 작품 속 개인들에 선명한 것은 그러한 차이의 흔적들이다. 데리다는 '사유해야 할 것은 동일성의 밖에 놓여있는 은밀한 차원이 아니라, 동일성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차이의 작용 또는 유희'라고 말한 바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흔적은 토대도 근본적인 원리도 기원도 아니다. 흔적으로서 나타나는 '장면들'은 원리나 기원이 사라져 있다. ● 굳이 거기에 원리나 기원이 있다면 차이의 움직임일 것이다. 차이의 움직임은 서로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내며 서로를 구별시킨다. 형태와 배경을 불문하고 차이로 얼룩진 민재영의 화면은 '무한한 또는 무한대로의 시간화 작용'(데리다)으로 사유되고 그려진 것이다. 이 전시에서 새삼스레 주목한 대중 속의 개인 중 작가라는 존재들은 차이 속의 개인을 자부하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민재영의 작품 속 또 다른 보편성은 우리시대의 보편적 매체가 된 영상에서 찾아진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매체의 역사를 다루면서, 영상이 이전 시대의 성상과 예술을 대체한다고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먼저 우상의 시대와 일치하는 로고스페르(logosphere)가 있다. 이 시기는 문자의 발명에서부터 인쇄의 발명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있다. 그라포스페르(graphosphere)는 예술의 시대이다. 이 시기는 인쇄술에서 컬러텔레비전이 등장하는 때까지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비데오스페르(videosphere)는 영상 기기의 시각에 따른 시기이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 의하면, 시간적 이상의 단축, 즉 우상은 부동의 시간의 이미지이며, 영원의 가사상태이자 신성이 응결된 무한 속의 종단면이다. 예술은 완만하지만 이미 움직이는 형상들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시각적 장치와 관련된 영상적 시각은 속도에 사로잡힌 순수한 리듬으로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레지스 드브레에 의하면 음극관은 우리를 투영에서 방사로, 혹은 외부로부터 반사된 광선에서 화면을 통해 방영되는 광선으로 옮겨 놓는다. 모든 투영이 화면 바깥에 있는 투영자를 전제하고 있다면 음극관 이미지는 일종의 사물 자체의 방사속에서 재현의 두 극을 합병시킨다. 픽셀이 스스로 세계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운반자와 운반된 것이 동일하다. 영상은 자기지시성과 자기 참조성을 강화한다. 자기지시적인 비디오스페르의 시대는 타자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일자가 타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자가 사라지는 순간 동일자도 사라진다. 민재영의 작품에서 보편적 질서가 지배하는 대중사회에서 타자중의 타자인 예술가가 호출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타자가 가시화되는 방식은 편재하는 정보의 망 자체에서 비롯된다. 작품에서 주체와 대상, 또는 환경과 상황은 분할된 필 촉 속에 있다. 완전히 자유분방하다 할 수는 없지만 유동적인 입자들은 원형이나 전형이 지배했던 이전 시대, 즉 (인간의, 역사의, 예술의)본질의 시대를 희미하게 한다. 필촉을 통하여가 아니라, 필촉 그 자체에 내재하는 현실은 그림이라는 현실과 중첩된다. 미술사에서 필촉 분할이 이루어진 것은 인상파에서였다. 근대적 삶을 더 정확하게 모사하겠다는 근대 화가들의 의지는 관습에 뿌리내리고 있던 가시성을 변혁시켰다. 불확실성은 더욱 증대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변화하는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 또는 구성하는 것이며,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의식을 더욱 고양시켰다.
버나드 덴버는 「가까이서 본 인상주의 미술가」에서, '인상주의화가들에게 미술이란 아름다운 자연이라 부르는 바를 정밀하고 꼼꼼하게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대신 이들은 처음 대면할 때 눈을 공격해오는 선과 다양한 색채의 뒤섞인 혼합물을 번역하고 해석하고 풀어내는데 몰두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당대 비평가 에밀 블레몽의 말을 인용한다. 현대 화가에게 빛은 더 이상 외광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 인간이 더 많이 접하는 인공 광이다. 카메라가 거울의 역할을 하면서 자연광 역시도 인공광의 매개를 거치곤 한다. 주사선을 떠올리는 작품의 구조적 요소로부터 비롯된 빛과 색채의 진동은 역사화 된 보편성을 보여준다. 빛과 색채의 진동은 선에 비해 불확실성을 높인다. 그러나 불확실하다고 해서 비실재적인 것은 아니다. 태양을 멀리서 보면 둥근 원으로 보이지만, 더 세밀하게 보면 들끓는 유동성이 지배한다. 정지는 그러한 유동성의 순간 장면에 불과한 것이다. 실재는 추상적 기하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민재영의 작품에서 유동적 터치로 만들어가는 선, 그 선들에 여과된 현실은 표면에 떠있는 더 '근본적' 실재를 일깨운다. ■ 이선영
삶은 연속되는 수많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장면場面에는 사전적으로 '영화/연극/문학 등의 한 정경, 어떤 장소에서 겉으로 드러난 면이나 벌어진 광경'이라는 뜻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에 영향을 미치는 각 순간의 환경'이라는 정의도 있다. 후자의 의미에 방점을 두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동선動線, 이에 조응하는 내재적인 체험 풍경으로서의 이미지를 채집하고 있다. ● 이제까지 그려온 이미지들은 도심에 사는 비슷한 시민들의 매일의 생활, 그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누적되었을 체험이미지들의 보편적 교집합 같은 것을 상정하고 그런 접점이자 전형이 되는 심리적 잔상을 실제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 그렇게 나름대로 생각하던 '보편普遍'의 개념이나 범주에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확인하게 된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한 도시의 일원이라 해도 중장년기로 접어든 체험들은 순간에 잡히는 단면으로서의 유사성 너머로 점차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고, 만에 하나 통계상 보편에 가까운 삶이 그야말로 있을 수 있다 해도 확실한 것은 나 자신(이 속한 직업군, 혹은 사회 집단의 양상)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자각하면서 오히려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간 뭉뚱그려 생각해오던 어떤 세대의 삶들이 내포한 각각의 개별성,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 내內 생활양상의 관성이나 반복되는 특성들이다. (2015) ■ 민재영
Vol.20151103h | 민재영展 / MINJAEYOUNG / 閔才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