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묘합무은妙合無垠

박미진_박병일 2인展   2015_1022 ▶ 2015_1025

아름다운 묘합무은妙合無垠展_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갤러리777_2015

초대일시 / 2015_1024_토요일_04:00pm

후원 / 양주시청

관람시간 / 11:00am~06:00pm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03-1 3층 갤러리777 Tel. +82.31.829.3777 changucchin.yangju.go.kr

묘합무은妙合無垠: 별개의 둘이었는데 완전한 하나가 된 상태를 일컫는다. "결합이 참으로 절묘해서 가장자리(垠)가 잘 보이지 않는다." 1. 초목은 바람에 흔들리고, 물은 소리를 얻고 ● 초목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소리를 갖는다. 물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불면 소리를 갖는다. 바람은 보이지 않게 소리를 심어주고 떠난다. 좋은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 언제부터인가 '세계世界'와 '나我' 사이에 바람이 심겨준 소리를 듣게 되었다. 2002년부터 울려퍼지는 소리였지만 듣기 시작한 것은 근래였다. '세계'를 극진極盡하게 관찰하는 남자와 '나(내면)'에 올곧게 천착穿鑿하는 여인 사이를 지나간 바람은 그들만이 이해하는 새로운 소리를 심겨주고 떠났다. 그들은 그 소리로 대화하며 중요한 삶의 기초를 형성하는 발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자연적 나'와 '세계'의 관계를 사유한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세계' 안에서 '나'로 살고 있는 상태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삶의 기초라고 이야기 했듯이, 늘 자신의 주변(세계)에 관심을 갖는 그(외부 관찰자)와 언제나 자신의 내면(나)을 살피는 그녀(내부 탐구자)는 세계 안의 나로 살며 지금까지 걸어왔다. 일체의 작위 없이 세계와 내가 완벽하게 하나로 만나 세계와 나 사이에 조금의 틈도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이것을 인연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그렇다고 운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다. 그저 그들만의 소리를 얻었다고 하면 어떨까. 그들은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리는 박병일 작가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禪을 그리는 박미진 작가이다.

박병일_LANDSCAPE_화선지에 수묵_195×135cm_2014
박미진_beyond gaze_장지에 중채_150×120cm_2010

2. 담박한 화평과 아름다운 근심 ● 무릇 화평한 소리는 담박하고, 근심스런 생각의 소리는 아름답다. 박병일과 박미진은 그간 함께 한국화의 길을 걸어오면서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화평을 주기도 하고, 근심을 주기도 하였다. 두 작가가 동일하게 한국화를 그렸기에 화평했고, 수묵풍경화(박병일)와 채색인물화(박미진)라는 서로 다른 대상을 그렸기에 근심을 주었다. 하지만 이 모두 담박하고 아름다운 소리였음은 분명하다. ● 담박한 소리는 대학과 대학원시절 수묵과 중채법重彩法(여러 번 덧칠해서 색을 얻는 기법)을 함께 사용함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두 작가가 인연을 맺었던 초기에는 기법의 동일성으로 서로를 밀어주고 당기며 함께 험난한 한국화의 길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관심은 초기부터 달랐다. 박병일은 올곧게 풍경 이었고, 박미진은 줄곧 인물 이었다. 박병일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있었고, 박미진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복잡하게 펼쳐져 있는 삶의 풍경을 비워가는데, 그녀는 인물 속에 숨어있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찾아 채워가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기에 박병일은 정제된 먹색으로 색을 한번에 표현하는 방식으로 비움을 추구한 반면, 박미진은 색채를 사용하여 색을 쌓는 중채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채움을 추구하였다. 서로를 향한 근심의 소리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어 다른 관점을 인정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은은하게 펴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서로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각을 열어주곤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두 작가가 대학교 실기실에서(2002~2005), 낙산 보문동작업실에서(2006~2008), 베이징에서(2009~2010), 일산에서(2012~2013), 인왕산 산자락에서(2015~현재) 여전히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것이다.

박병일_LANDSCAPE_화선지에 수묵_53×41cm×4_2014

3. 정수경생情隨景生의 '장소애場所愛' ; 박병일 작가론 ●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이 있다. 특정 장소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갖는 장소애場所愛를 의미한다. 지금껏 박병일을 수식하는 말은 줄곧 '현대 도시를 그리는 한국화 작가'였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고, 어느 면에서는 틀린 말이기도 하다. 작가는 현대 도시를 그린다. 그렇다면 현대 도시의 개념은 무엇인가? 높은 빌딩과 자동차로 빽빽한 도로, 복잡한 신호등, 많은 사람들? 이런 것은 도시에 대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 도시도 자연 위에 세워진 곳으로, 도시 안에는 산도 있고, 숲도 있고, 강도 존재한다. 박병일이 그려왔던 것은 현대의 도시였지만, 실제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도시의 표상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였을 뿐이다. 작가 자신이 그곳에 살고 있기에 그는 그곳을 그렸다. 그런 면에서 박병일은 자신의 생활 지역에 대한 장소애를 깊게 가지고 있는 작가로 볼 수 있다. ● 그는 '경景'을 보고 '정情'을 일으키는, 즉 경관(景)을 표현하여 의미(情)를 발생시키는 '정수경생情隨景生'의 작업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이것은 삶의 터전을 화폭에 불러옴으로써 자신의 삶이 가진 의미까지 일깨우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현대 사회의 공적 장소인 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사적 장소를 그린 마음의 풍경이다. 우리는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의 외피만 단편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지나치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성은 고스란히 수묵화의 정서로 이어진다. 흑백으로 정제된 이미지는 삶의 기억을 영원으로 끌어가는 느낌을 준다. 마치 총천연색사진보다 흑백사진이 기억의 한 순간을 영원에 닿게 하는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박병일의 도시 수묵 산수는 그가 발을 딛고 있었던 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바라보았던 한 장소 한 장소를 영원으로 각인시킨다. 그가 수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깊고 모호하며 도달하기 힘든 정신적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박병일_breath_2010
박병일_breath_2012

박병일은 대학원 때부터 빌딩숲이 도드라진 도시를 수묵으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는 그는 수묵의 어두움을 활용하여 무거운 밤도시를 수직으로 내려긋는 미점준米點?과 윤곽선 없이 그리는 몰골법沒骨法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던 것이 2005년 『도시, 나, 스며들다』 전시에서 한낮의 도시 표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수묵으로 빽빽했던 화면이 비어지기 시작하고 여백의 형상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전환은 달을 그리기 위해 달만 남겨둔 채 나머지 부분을 채색하는, 다시 말해 여백을 그리는 홍운탁월법烘雲託月法이 만개할 예비단계였다. 이후 2007년 서울과 부산에서 있었던 『Breath』 전시들을 거치면서 점점 블록형태의 세련된 미점준과 높은 완성도의 몰골법 및 홍운탁월법을 선보였고, 2010년 베이징에서 진행하였던 『Breath』에서 마침내 확실히 만개된 기법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 하지만 만개의 기쁨은 짧았다. 2014년 『Landscape』 전에서 그는 삶으로서의 장소보다는, '도시'라는 상징에 초점을 맞춘 작업을 선보이며 잠시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이제 작가는 인왕산 산자락에 안착하여 다시 삶으로서의 장소를 그리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 겸재 정선이 살았던 곳에서 그가 보고 걸었던 인왕산과 북악산 일대의 산길을 걸으며, 겸재의 시선과 현재의 자신의 시선을 교차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박병일이지만 그가 그리는 도시가 표상적 도시가 아닌 까닭은 그가 그리는 것이 삶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박병일_LANDSCAPE_종이에 수묵_19×19cm×4_2015

4. 이정입경移情入景의 '가인佳人' ; 박미진 작가론 ● '수적천석水滴石穿'이라는 말이 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다. 박미진은 실로 수적천석에 어울리는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백옥 같이 아름다운 여인상은 오랜 시간 동안 수백 번 색을 쌓아올려 완성시킨 작품이다. 이것은 작은 변화가 모여서 큰 변화를 만든다는 작가의 신념에 기인한다. 그녀의 중채법은 맑고 옅은 색채를 사용하기에 언뜻보면, 그 인고의 시간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하지만 박미진은 타인이 작업과정을 인식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색이 발색 될 때 까지 끊임없이 색을 쌓는 반복적 행위를 하며 그 색을 기다린다. 그녀는 효과적인 기법이나 안료를 선택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이 진실한 화가에 닿아 있다. 작가는 맑은 색을 한 겹 한 겹 쌓으면서 동시에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작품에 쌓아간다.

박미진_illusion_2008

가끔씩 자신의 작업이 단순히 '예쁜 작품'으로 폄하될 때는 슬픔이 밀려온다. 자신의 인간에 대한 탐구와 사유가 일순간 증발해버리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리라. 박미진은 대학 때부터 인물화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2002년에 큰 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인간 탐색을 지속하며 '주변인', '익명인' 등의 외형外形을 묘사하여 인격과 내면까지 보려주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표현법에 깊이 천착하였다. 그래서 2006년까지 전통적 기법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젊은 작가라 명명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전통적 기법으로 형상에 핍진하여 묘사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쏟아졌다. 그때까지의 작업 방향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정서를 담는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작품화된 한 개인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들 사이에 감정적 거리의 천차만별은 박미진이 드러내고자 했던 인간의 동일한 감정, 즉 칼 융C. G. Jung의 '원형(집단무의식)'과 같은 정서를 수렴하지 못하고 파편화시켜버렸다. ● 그래서 작가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인'이나 '익명인' 작업을 잠시 뒤로 미루고, 2008년 『Free as wind』 전시에서 모든 사람이 아는,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감정적 거리가 유사한 '슈퍼맨'이나 'ET', '마릴린 먼로' 등의 유명인물을 작품에 끌어와 집단무의식적 정서의 동일성을 경험하도록 유도하였다. 불가에서 '언덕을 오르려면 뗏목을 버려라(사벌등안舍筏登岸)'라는 말이 있듯이, 박미진은 유명인물 작업으로 전환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한국화 기법과 규율에서 과감히 탈피해 자신에게 맞는 변용된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작가의 불안정한 정서는 박제된 아름다움(나비)을 작품 안에 고정시키는 표현을 통해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의 나비는 현재의 나비와 의미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나비는 아름다움의 대언자代言者로 기능이 훨씬 확대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순一瞬 작가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박미진_secret_장지에 중채_160×120cm×2_2012
박미진_lucid dreaming_장지에 중채_130×130cm×2_2012

『Free as wind』 전시 이후 박미진은 유명인물 작업을 폐기하고 '이정입경移情入景'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즉 '정情'을 머금어 '경景'에 투사하는, 의미(情)을 내재하여 경관(景)을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작가는 굳이 유명인물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원형적 인물이 있다고 믿고 그 인물을 현실 세상에 드러내길 간절히 원했다. 현실(景)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의 내면(情)에 존재하는 미의식을 현실화하여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에 대한 원형의 정서를 공유하길 희망한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보는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길 기원하며 한 겹 한 겹 색채와 시간을 작품에 중채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박미진의 작품은 '선화禪畵'와 닮아 있다. 선화는 그림 속에서 나를 비우고 하심을 통해 무념과 무아를 드러내는 그림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질 때 생명력을 얻게 된다. 박미진이 작품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림을 통한 평정심. 따라서 그녀의 작품을 '현대적 선화'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바람과 달리 감상자는 늘 작품에서 서사를 읽기 원한다. 감정을 느끼기 보다 정보를 찾으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것은 박미진이 작품에서 느끼길 원했던 정서가 아니였다. 2014년 『Magic Moment』 전시에서 인상이 옅은 얼굴 측면 작업을 선보인 것은 이런 연유와 관계 깊다. 감상자가 감정의 흐름을 읽으려하기보다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대상의 정보를 읽기 위해 급급한 상황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박미진은 지금도 '정'이 '경'에 와닿게 하기 위해 작품을 다듬듯 사유를 다듬는다. 이제 그녀도 내공이 쌓인 것일까? 작가는 2008년 잠시 미뤄 두었던 '주변인'을 초현실적 가인佳人에 흡수시키는 작업을 근래 진행 중이다. 초월적 존재가 아닌, '주변인'이나 '익명인'으로도 정서적 공유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기 때문일까? 박미진의 내공을 믿기에 그 발걸음을 응원한다.

박미진_magic moment_2014

5. 그림은 의미해서는 안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 현대미술을 점령한 뒤샹의 후예들은 개념과 상징이라는 미명 하에 작품이 의미를 발산하게끔 유도한다. 그래서 의미는 존재하지만 작품은 부재한 현대미술을 경험할 때가 종종있다. 박병일과 박미진의 작품은 어떤가? 이 두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의미를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작품이 작품으로 존재하도록 자연스럽게 펼쳐 놓는다. 박병일의 작업이 '기법적 전통성과 도시의 현대성'의 결합에서 오는 생경함 때문에 미술계에서 주목했지만, 작가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도시 산수에 접근한 것이 아니였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삶에 담아 자신의 시각으로 그러왔던 것이다. 근래에 박병일은 일주일에 서너번 인왕산을 걸으며 겸재 정선이 느꼈을 풍취를 느끼고 풍경을 사생한다. 삶의 자리를 그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2008년 레고 장난감을 통해 조립된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던 것처럼, 2010년 뉴욕과 베이징 건물을 섞었던 것처럼, 서울의 건물들을 재조립하여 자기만의 도시 산수를 그렸던 것처럼, 지금 인왕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실경과는 다른, 자신만의 인왕산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정선의 향기를 오늘날 되찾기 위해 무던히 인왕산을 걷고 또 걷고 있다. ● 박미진은 2008년에 덮어 놓았던 '주변인'을 다시 펼쳐들었지만, 그때와는 마음의 자세가 많이 다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대상을 완전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은 듯하다. 그녀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주변인의 작은 부분이라도 알기를 희망하여 온전한 얼굴 형상이 아닌, 부분을 그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림에서 어떤 의미를 보여주려는 의도라기 보다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자각하고 내면을 들어다 보려는 일종의 자기 성찰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인생의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맞닥드린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이 작품에 이른 것으로 읽혀진다. ● 이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그동안의 작업들을 선보인다. 그리고 이후의 삶을 함께 하기로 선언한다. 그들의 앞에는 험난한 작가의 길이 여전히 펼쳐져 있다. 하지만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함께 가는 길은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의미를 내세우지 않고, 다만 옆에서 묵묵히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안진국

* 박미진 블로그 / blog.naver.com/hahavvv

Vol.20151022j | 아름다운 묘합무은妙合無垠-박미진_박병일 2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