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다

김정은展 / KIMJEOUNGEUN / 金廷恩 / painting   2015_1022 ▶ 2015_1031

김정은_성장의_칠(漆)판에 옻칠_120×180×4.6cm_2014~1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 전시중 휴무 없으며, 마지막 날은 1시까지 관람 가능합니다.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72(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배우고 아는 지식들은 극히 작은 점들을 이어 놓은 허상으로 보인다. 인간은 각자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것을 진리라 주장한다. 모든 현상에 대한 해석 또한 인간 중심적 기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각각 자기의 우주를 가지고 있으며 그 범위를 넘지 못한다. ● 우리가 인지하는 우주 밖 다른 상위의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주는 부동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일까? 움직임을 표현하는 차원의 기준은 무엇인가? 자연스럽다는 말은 가능한 일인가? 지구 위에 소위 '언어적 정의'의 자연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인위적 인식에 의해 구획되고 선택되고 존속되는 자연, 이런 인간의 너무나 인간적 행위들이 신의 영역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이 쌓는 바벨탑이지 않을까? 소위 앞선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미래의 지향점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시각적 예술은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날선 감각으로 인지하고 시각이라는 이해도가 빠른 감각으로 풀어냈을 뿐이다. 답을 구한다면 점층된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있는 인간의 생태학적 습성을 바로 알고 그에 상응한 예측 하에(돌발변수에 의한 모든 경우의 수를 읽어야 한다.) 대중적 프로파간다를 퍼트려 기반을 마련한 후 '00이다'라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최대 소비, 최대 생산이라는 극한 흐름 속에 우리는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는가? 철학을 포함한 인문사회계열에서 이후의 세대를 받쳐줄 사상적 기준이나 흐름을 고민하고 있는가? 아니 있다 한들 거대자본에 의해 거세당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외부적 파괴가 오기 전(공룡 멸망설과 같은) 자생적 내부 파괴의 시간을 거쳐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현재의 인류는 '생존'에 그 가치를 두고 있다. '생명'을 논해보자. ● 나 또한 내 우주 안에 머물고 있기에 내가 온전히 느꼈던 순간의 감정이나 감각을 시각적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만이 내가 다른 이에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이니까. 현재의 내 작업은 그런 나의 기록들이다. ● 예술은 책시장과 닮아 있다. 예술의 범주는 여러 기준으로 복잡하게 나뉘는데 그 분류에서 각각의 신간이 있고, 시대마다 선호하는 분야와 베스트셀러가 있으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스테디셀러도 존재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책이 출간되고 그 중 제대로 읽히는 책은 손에 꼽으며 출판사의 판촉이나 매체에 노출된 빈도수에 의해 팔리는 정도가 다르다. 출간 당시 잊힌 책이 세대를 넘어 다시 재조명되기도 한다. 어려운 전문서적은 전공자만이 찾으며 출간되는 많은 책들은 그 나름의 쓰임이 있다. 이 또한 자본에 의해 선택된다. 예술도 그러하다. ● 난 예술생산에 있어 긍정적 순환의 고리가 생성되려면 순환 고리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자기 위치의 자릿값들을 온전히 지탱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현재의 난 내가 해야 하는 몫을 할 것이다. 난'작가로서' 작업 할 것이다. ■ 김정은

김정은_놓인 그대로_칠(漆)판에 옻칠_120×180×4.6cm_2014~15
김정은_넘치지 않는_칠(漆)판에 옻칠_110×60×4.6cm_2014~15

판화를 전공한 김정한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으로 2년간 준비한 옻칠회화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옻이라는 까다롭고 성가신 작업을 통해 작가는 칠과 연마과정의 결과물로써의 작품들을 출품된다. 「성장」,「놓인 그대로」,「흐르는」을 비롯하여 15여 점의 작품이 출품될 예정이다. ■ 갤러리 담

김정은_흐르는_칠(漆)판에 옻칠_90×90×4.6cm_2014~15
김정은_가만히_칠(漆)판에 옻칠_90×90×4.6cm_2014~15

시간을 담은 공간 ● 풍경화는 아니지만 돌, 물, 나무 등, 풍경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켜켜이 깔려있는 김정은의 작품에서 자연은 두텁게 나타난다. 나무와 비교하자면, 일순간의 단면을 무늬로 고착시킨 판자때기가 아니라, 깊이를 가지는 통나무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가지는 실재감은 둔탁한 덩어리가 아니라, 수많은 표면들이 중층 결정되어 만들어진다. 한두 번이 아니라, 수 없는 색칠을 통해 내부로부터 발해지는 색 또는 빛이다. 그것은 인간 주체의 알량한 필요에 의해 도구화되거나 코드로 환원된 객체로서의 자연적 대상이 아니라, 묵직한 실재를 담지 한다. 작품은 그러한 실재를 담는 형식이자 그 자체가 또 다른 실재가 된다. '담다'라는 전시부제는 실재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원초적 수용기(코라)를 떠올리며, 전시된 작품 중에는 가장자리가 산세의 형상으로 파여진 그릇 형태의 작품도 있다. 작가는 작품이 단지 벽에 걸려 있는 무엇이 아니라, 시간을 머금고 있는 손 때 묻은 사물 같은 느낌을 주고자 했다. 담아도 담아도 고갈되지 않는 것이 자연이며, 특히 예술의 방식에 의해 담긴 자연이 그러하다. ● 실재는 필요를 포함한 모든 것의 원천이 됨에도 불구하고, 기능과 쓸모라는 피상적 요구에 쉽게 답하지 않는다. 실재를 손쉽게 취하려는 조급한 마음과 경솔한 행동, 그리고 어설픈 방식은 어떠한 환원도 피해가는 실재의 완강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래서 실재는 쓸모 없는 것, 더 나아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대체물들이 추구 되곤 한다. 실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억지스러운 대용물이 삶과 예술을 뒤덮어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실재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이러한 여정은 실낙원과 복락원에 관련된 서사의 줄기가 되기도 한다. 자연이라는 뿌리를 잘라낸, 뿌리 없는 성장이나 풍요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잡을 수도 없고 다루기도 힘든 실재를 비워낸 텅텅 빈 시뮬라크르의 시대, 자연은 몸과 무의식을 비롯한 자신의 요구에 충실해왔던 이들의 관심을 끈다. 옻이라는 자연적 재료를 사용한 김정은의 작품은 한 겹, 두 겹....n겹까지 수없이 축적된 시간과 공간 속이 체현된 자연을 내재적으로 모사한다. 그것은 자연의 외면이 아닌 과정의 모사이다. ● 자연뿐 아니라, 오래된 사물도 그러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오래된 시간의 지층을 담지하고 있는 작품들은 자연과 사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크고 작은 돌이 박혀있는 듯한 작품은 한해두해가 아니라 영겁의 시간이 한 공간에 응축된 것 같은 형상이다. 제작 방식이나 형태는 작은 작품에도 마찬가지여서 오래된 바위 위에 있는 동식물이나 미생물 같은 흔적은 겹에 겹을 더한다. 여기에 가세하는 또 하나의 겹은 물의 이미지이다. 어른거리는 물은 또 다른 조건을 반영하면서 계의 복잡성을 높여 작품을 볼 때마다 달리 보이게 한다. 물이라는 풍경적 요소는 습도에 민감한 재료를 쓰다 보니 생겨난 무의식적 선택일 수도 있다. 옻이 제대로 안 말랐을 때 공예가의 입장에서는 질색 하지만, 화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불확정성 역시 작품의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물의 이미지는 찰랑거리는 물속의 소우주에서 대도시의 포도에서 갑작스럽게 맞는 소낙비에 이르는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돌 속에 새겨진 물리적 조건에 의해 오묘한 무늬가 발생하고, 이 살아있는 무늬는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연상의 선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간다. ● 그 중 하나는 풍경이다. 흐름은 색과 재질이 다른 영역들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변모와 흐름이 파악되는 것이다. 삶의 구체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는 그 시공간으로부터의 일정거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태도가 극단화되면 신비주의나 형이상학에 기울어진다. 그러나 물질과 육체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어떠한 야성적 예술에도 신비나 명상에 대한 지향은 있다. 이러한 지향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헐벗은 구체성에 불과할 뿐이다. 한편 시야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바꾸면 풍경적 요소는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물속에 반쯤 잠긴 돌멩이는 마치 섬처럼 기념비적인 형상으로 솟아오르고,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수평선은 거세게 흔들린다. 섬이자 대지인 돌, 폭풍우이자 바다인 물은 실재계에 대한 풍부한 은유이다. 실재는 자아의 상상이나 사회적 상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연의 원초적 바탕이다.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선들은 나뭇가지나 무의식이 뻗어나가는 모습이다. ● 켜켜이 자리한 정지된 요소들이 잠재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면, 계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요소도 첨가된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 (세월호 참사에서)죽음의 바다 위에서 하얗게 무너져 내린 하늘, 도보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갑작스런 소낙비 같은 사건적 속성을 내재한 기상현상이 그것이다. 기상은 예측불가능성으로 인해 일상에서 숭고함을 감지할 수 있는 대표적 현상인데, 김정은의 작품에서 실재의 역동성을 암시하는 요소로 나타난다. 지난 여름 견디기 어려웠던 무더위를 상징하는 쨍쨍한 황금색은 푸른 하늘을 화면 귀퉁이로 밀어내고, 둥근 창공 속 이카루스는 이글거리는 태양열 때문에 추락한다.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일그러지는 듯한 형상이 몽환적이다. 판화를 전공한 김정은이 현대미술 재료로서는 낯선 옻을 사용한 계기는 70-80년대에 여염집 가정에 하나쯤은 있었던 자개 장 같은 일상문화에 대한 추억에 있었다. 그렇게 보편적이었던 생활문화의 맥이 끊어지고 모두가 국적불명의 현대미술에 전념하고 있을 때, 작가는 무형문화재로부터 옻칠을 배웠다. 필요에 따라 원점부터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방식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독특한 어법을 갖추게 되는 작가들의 특징이다. ● 예술은 자연(自然)처럼 자신의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 하는 것일 때 진정한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풍부한 층에 대한 감식안과 방법론을 지닌 판화라는 매체와 어우러진 옻은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 작가의 성향과 잘 맞아 떨어져 장인정신과 창발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방법이 되었다. '마티에르'를 물신화해서 결국은 '심오한' 장식으로 전락했던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방식과 달리, 층층의 겹으로 쌓아 올려지며 밑바닥의 물질과 무의식이 용출하는 듯한 김정은의 방식은 심미적 요구와 의미에 대한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작가는 옻의 특징으로, 바탕인 나무와 같이 숨 쉰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탕 면과 밀착해서 함께 호흡하는 과정은 매체가 생명처럼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옻은 색깔내기가 까다로운 물감이자 접착제, 그리고 광택이 나는 외장재로 사용될 수 있으며, 사포 등을 이용하여 물리적으로 연마될 수 있다. 칠과 연마의 반복된 교차적 실행을 통해서 색은 변한다. 이렇게 마무리 되고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변하는 색의 메커니즘에 대해 작가는 '색이 핀다'고 표현한다. 목기의 외장재로 사용하기도 하는 옻은 잘못 칠하면 플라스틱이나 페인트같은 생경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잘 칠하면 보석 못지않은 오묘한 색을 낼 수 있다.

김정은_투둑투둑투둑_칠(漆)판에 옻칠_60×60×4.6cm_2014~15
김정은_이카루스_나무 접시 위에 옻칠_11.2×11.2×2.3cm_2015_부분

이처럼 한끝차이가 결정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오늘날 예술은 대량생산과 소비에 맞춰진 문화에 침수 당해 아무런 차이도 없이 함께 둥둥 떠 있으며 대중의 눈먼 관심에 기대고 있는 형편이다. 옻은 칠할 때, 마를 때, 다듬을 때의 색이 모두 달라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작은 자신이 하지만, 완전히 제어될 수 없는 자연적 재료의 특징을 말해준다. 옻칠을 위해서는 단단한 밑 작업이 필요하다. 작업실 한 켠에는 나무 상처럼 생긴 밑 작업된 나무 판들이 쌓여있다. 통상적인 그림 크기의 작품만큼이나 손바닥 크기의 작은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는데, 김정은의 작품은 크기에 상관없이 자족적인 소우주 같은 느낌을 주며, 그것은 보석같이 정성껏 다듬어지는 과정이다. 원이나 정사각형 모양의 틀은 이러한 과정을 오롯이 보존한다. 그것이 '담다'라는 전시부제에 담긴 의미일 것이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색과 형태를 담은 한계 지어진 전체는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한계 지어진 전체는 자연이나 삶에서 아무렇게나 떨어져 나온 임의적 파편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영원의 상(相) 하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한계 지어진)전체로 본다는 것이며,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의미가 아닌 존재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예술 역시 이 신비로움의 대열에 속한다. 김정은의 작품에는 여행지에서 발에 채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서 세계와 우주를 보는 이 특유의 신비로움이 있다.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는 것, 그리고 야생화 가운데서 하늘을 보는 것은 손바닥 안에서 무한을 붙잡고 있는 것이며, 시간 안에서 영원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고 노래한 바 있다. 그러한 신비로움은 앎을 통한 지배와 소유가 아닌, 자연과 하나 되는 영혼을 요구한다. 비트겐슈타인이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있다고 했듯이,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있는 자연과 삶에 대한 신비를 담고 있는 김정은의 작품은 단순히 눈의 즐거움을 넘어 시간과 공간 밖에 놓여있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이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사물들이 생겨나며 어떻게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려는 욕구를 형이상학이라고 했다. ● 그러나 영원성을 중시하는 형이상학은 시간의 요소를 경시했다. 시간이라는 요소는 불확실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리차드 테일러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형이상학자들은 시간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변화도 생성도 죽음도 없는 실재의 영역이 줄곧 형이상학적 특성을 이루어 왔다. 지금 여기의 자잘한 관심사를 벗어나는 김정은의 작품은 형이상학적이지만, 형이상학에서 배제했던 시간적 요소가 적극 개입되어 있다. 중세시대의 하늘처럼 황금색으로 도배된 작품마저도 한쪽 귀퉁이에 푸른 창공을 남겨두어 변화, 즉 시간적 추이를 암시한다. 시간성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강이다. 김정은의 작품에도 강처럼 흐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의 강은 통상적인 의미의 흐름처럼,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의 수평적 이동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재질과 밀도를 가진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는 액체는 각기 접한 면에 따라 그 흐름의 속도와 방향이 다양할 것이다. 어느 굴곡 면에서는 가속도를 붙이기도 할 것이며, 어느 굴곡 면에서는 거꾸로 흐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작업할 때의 시간처럼 비(非) 균질적으로 흐른다. 이러한 시간성은 노동과 예술의 극적인 차이를 알려준다. ● 리차드 테일러는 강이 멀고 분명치 않은 원천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에는 광대한 바다로 흘러 든다고 하면서, 이와 비슷하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시간 자체의 시작과, 이것이 귀결되는 광대하고 흐르지 않는 영원성에 대해 사색해 왔다고 말한다. 반면에 공간은 일반적으로 강이 아니라 그 안에 모든 것이 펼쳐져 있고 담겨 있는 거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그릇을 닮은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은의 작품에도 작은 접시, 또는 큰 그릇의 형태의 작품이 있다. 손바닥만한 접시에 천구(天球)가 담기는가 하면, 큰 그릇의 가장자리는 일률적이지 않다. 공간적 차원에서 이 '그릇'들은 정량화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 공간에 담기는 김정은의 작품은 키네틱 아트나 영화같은 움직임이 아니라, 공간의 동시적 배열을 통한 잠재적 움직임이다. 작품이라는 원초적 그릇에 담기는 것은 먼지의 알맹이들처럼 공간적으로 아주 적은 것들, 번개의 섬광처럼 시간적으로 아주 짧은 것들, 때로는 풀과 바다처럼 억겁의 시간 동안 동일하게 존재/운동하는 것들이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사물에서 시간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담길 수 있을까. 김정은의 작품에서 시간은 공간적 관계로 암시된다. ● 철학이나 문학은 이를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시간화' 등으로 묘사해오곤 했다. 공간적 관계로 암시되는 시간은 일정 주기에 따른 천체의 공간적 배열이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곳에 도달하는데 서로 다른 시간을 요구하는 천체들은 한 공간 안에서 성좌를 이루며 빛나듯이, 가까우면서 먼 것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오묘한 형태와 색으로 재조합된다. 계의 복잡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매번 재조합 되고 그것이 잠재적인 운동감을 낳는다. 공간은 시간으로, 시간은 공간으로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는 점은 공간과 시간이 실체가 아니라 관계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차드 테일러는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사물들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를 말해야 한다고 본다. 김정은의 작품에서 이러한 시공의 관계는 그녀가 최초에 전공했던 판화, 그리고 학교 밖에서 따로 배우고 터득했던 옻칠을 통해 무한히 확장시킨 층위들을 통해 활성화된다. 그것은 또한 지속되면서도 변화하는 자연과 예술의 면모를 알려준다. 자연과 예술의 드라마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생성과 소멸이란 사건은 주어진 공간에서 먼지와도 같은 작은 존재들의 지속적인 자리바꿈에 의해 일어난다. 김정은의 작품은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매 순간 갱신되고 있는 우리의 육체와 자연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과정에 대한 은유이다. ■ 이선영

Vol.20151022b | 김정은展 / KIMJEOUNGEUN / 金廷恩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