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달, 푸른별 The White Moon, The Blue Star

박소영展 / PARKSOYOUNG / 朴昭映 / sculpture   2015_1020 ▶ 2015_1121 / 일요일 휴관

박소영_하얀 달 the white moon_모조잎, 오브젝트_55×55×16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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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020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동덕로 36-15(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지금까지 조각가 박소영에 관한 설명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뤄져왔다. '작업은 껍질 같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수많은 껍질은 결합되어 덩어리를 이룬다. 그가 선호하는 재료들은 이미 쓰임새를 다한 폐기물이고, 이건 생명체가 가지는 활력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된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반복이 필수적이다(그냥 반복이라고 해서는 전달되는 감이 모자라고, 반복에 반복이 거듭된 상태에 또 반복이 더해진 정도). 좌우지간 작가는 무진장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음과 같은 시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한 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필요한 붙이기 작업을 영상에 모두 담아서 빠르게 돌리면 꽤나 괜찮은 스펙터클이 될 거다. 동시에 그 촬영 과정은 그 스스로에게 끔찍한 벌이 되겠지만 말이다.

박소영_무제 Untitled_종이에 투명필름_57×76cm_2015
박소영_칼바람 aggressive wind_모조잎, 오브젝트_40×40×15cm_2015

당연하게도, 녹색 이파리들이 전체를 이루는 껍질은 그의 작업이 품은 의미 가운데에서도 집중되어왔다. 예를 들자면 뭐, 이런 식이면 어떨까. 껍질 쌓아가기 과정은 여성해방론의 시각으로 보는 관점이다. 뤼스 이리가라이(Luce Irigaray)가 여성 육체에 관한 탐구로서 딱딱한 남근 권력에 대항하는 여자만의 촉각적인 특성으로 껍질을 내세운다든지, 엘렌 식수(Helene Cixous)가 "그 자체가 하나로서의 전체"이며, "끝이 정해지지 않은 몸", 혹은 "정작 중요한 기관은 없는 육체"로 묘사하며 내세운 여성성 개념으로 박소영의 조각을 바라보면 맥락의 앞뒤가 들어맞는 분석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십 년 전, 내가 문화이론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에 수없이 훈련받은 이와 같은 종류의 비평으로 그의 작업을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포함하여,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가 독창적인 조형 예술작품으로 이어진다는 식의 미술 평론은 대부분 엉터리라고 보면 된다. 박소영의 작품을 통해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는 있지만, 페미니즘 이론이 박소영의 조각을 쉽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박소영_바람 wind_종이에 투명필름_40×57cm_2015
박소영_뿔난 덩어리 a horned chunk_브론즈, 사슴뿔_91×57×45cm_2015

아무래도 우리가 작가 개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편이 좋겠다. 조각은 그에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다. 가만히 보면, 작가는 매 작품마다 이야기를 끝맺음해야 만족하는 성품을 지녔다. 그렇다고 작가가 펼쳐놓은 이야기라는 게 대단한 서사(narrative)는 아니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같이 웃거나 혹은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려듣는 것이다. 어차피 그 모든 건 다른 사람의 삶이니까. 미술은 개인의 이야기를 갖가지 새로운 방법으로 순발력 있게 담아내고 있다. 이 마당에서 조각가들이 택할 여지는 무엇인가. 박소영의 조각이 하나의 교범이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새로운 작품들, 그리고 이전의 대표작들은 그 조각 표면으로부터 영원에 가까운 빛을 서로 비춘다. 얼핏 보아 역설 같은 이 명제가 실은 우주 물리의 진실일 수도 있다. 시적 표현으로 치환되는 이 전시 명제는 꽤나 직설적인 각 작품 제목으로부터는 한 발자국 물러나서 스스로를 관찰한다. 자기관찰은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한다.

박소영_황홀한 체념 ecstatic surrender_모조잎, 알루미늄 망, 스테인리스 스틸_250×110×194cm_2015
박소영_만세 here I am_폴리에스터_31×15×6.5cm_2015

이런 건 있다. 박소영의 조각이 예컨대 자신이 접한 예술사와 가족사와 사회상의 응집된 기록물이라면, 따라서 작가 탐구에 있어서 현학적인 이론을 괜히 소환하거나, 뜬금없는 지인 비평으로 얼버무리지 않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솔직한 면 말고, 별이나 달의 어두운 뒷면(나는 이 말이 dark side of the moon으로 번역되길 원한다.)처럼 감춰진 부분까지 바라볼 필요는 있다. 감춰진 부분의 관찰이란 게 예컨대 작가 무의식에 관한 정신분석비평을 뜻하는 건 아니다. 당장 위에서 난 페미니즘 이론의 적용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나. 뭔가 하면, 작품에 대한 꼼꼼한 관찰이다. 어떤 작품의 텅 빈 내부를 보면 또 다른 처리가 되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아주 더디게 이루어진 작품인 만큼 작가가 품은 속뜻은 신중히 감추어져 있다. 카덴차, 잼 세션, 액션 페인팅에 해당되는 예술의 즉흥적 기교가 그의 작업에서는 나올 수 없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매 순간 감정에 대한 상징의 선택이다. 그것이 별이 되었건 달이 되었건, 아니면 총이나 사람이나 정체불명의 무엇이거나 간에 모든 상징은 예컨대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 연구가들이 말하는 이야기 형태소처럼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비유를 쉽게 공감한다. 물론 그 형태가 직접적인 사실 표현이 아니라 절제된 추상과 재현의 중간 지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꽉 찬 겉과 텅 빈속이라는 서로 다름은 그 정반합의 결과가 드러내는 부정- "혹시나 해서 말인데, 이건 가짜야, 다 농담이라고."-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끝맺으려는 태도의 반대편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뭔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 윤규홍

Vol.20151020c | 박소영展 / PARKSOYOUNG / 朴昭映 / sculpture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