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1020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이화아트센터 Ewha Art Center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번지 Tel. +82.2.3277.2482
동행, 성찰적 만남과 소통 ●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다른 무엇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소중하고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세계는 자신만의 의미를 소유하는 개별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고 관계맺음으로써 만들어지고 운영된다. 그것은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평범한 진리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존재의 본성 안에 담긴 특별함을 망각시키고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시켰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자유와 행복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고, 개개인은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자 문명이 부여한 의무와 역할에 충실하며 전진해왔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도래로 계몽주의적 진보에 대한 자기반성과 초월이 시도되었으나 현실은 여전히 진보를 위한 전진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진정한 건강과 행복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존재들과 단절되고 있다. 소통의 부재와 소외의 반복은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심리적 문제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며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많은 현대인들은 풍요 속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삶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인간은 곧 죽음에 이르며, 기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 전통적인 의미의 환자는 아니지만, 이 새로운 환자들은 "시대의 병(maladie du siècle)", 불안, 내면적 무감각 때문에 고통 받는다. (중략) 그들의 가장 평범한 고통은 자기로부터의 소외,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중략) 소외감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은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행복(well-being)의 현존에 있다. (D. T. Suzuki, Erich Fromm and Richard de Martino, Zen Buddhism & psychoanalysis, New York: Grove Press, 1960, pp. 85-86.)
이러한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우리가 스스로를 통찰하고, 존재들과의 관계를 복구하여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시킬 수 있는 통로를 찾아내게 했다. 그리고 행복을 향한 통로로서 유의미하게 논의되는 대표적인 영역이 바로 미술-예술-이다. 미술은 창조의 주체, 감상의 주체 모두에게 감정의 정화와 승화를 통한 심리적 균형 상태를 이끌어낸다. 섬세하고 예민하면서도 풍부한 의미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미술은 문자 혹은 음성 언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표현 주체가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의 의미를 확립할 수 있게 이끈다. 또한 다른 사람-존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공간을 제공한다. 일시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全)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내적 충족과 행복을 경험한다. 이에 2015년 열리는 제 34회 채연전(彩研展)은 『동행(同行)』을 전시의 표제로 선택하게 되었다. "동행"이라는 단어에는 '만남 그리고 관계맺음',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미술을 통해 나 자신과 만나고 '이화(梨花)' 안에서 사제지간, 동문간의 아름답고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가며 채연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1981년에 시작된 채연전은 참여 작가들이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 동문이자 여성,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작가로서의 역량을 선보이며 세계 속 사람-존재-들과 소통하는 장(場)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자신의 동행인(同行人)들을 확인하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작가들을 더욱 성숙된 존재로 고양될 수 있었다. "동행"이 함유하는 '함께'의 의미는 동양화의 정신, 기법과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안료(顔料)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바탕에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동양화의 재료들이 보유한 유연함과 포용성은 그 자체만으로 소통과 관계의 회복을 실현한다. 흔적을 민감하게 남기는 한지(韓紙) 위의 작업은 진실하고 거짓 없는 관계를 이끌어낸다. 세계-자연-와 하나가 되는 초월의 경험인 명상과 감추어져 있는 본래의 성품을 지키기 위한 수행이 중요시되는 동양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동양화의 특수성 또한 소통을 완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전통 동양화의 재료와 형식을 뛰어넘어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근간(根幹)으로 작용한다. 본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사람들과의 동행, 세계-자연-와의 동행, 자기 자신과의 동행'을 주제로 한다. 동행은 인간사(人間事)의 중요한 부분이다. 동반자는 고단한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한다. 갓난아기와 아이들, 소녀, 가체(加髢)를 한 여인, 그리고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누군가에 이르기까지 일상과 꿈, 그리고 상상 속에서 우리와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화폭 위에 가득하다.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진보와 발전에 집중하는 현대 사회의 자아(self) 중심주의는 타인에 대한 배척과 경계를 당연시해왔다. 모든 존재 위에 놓이는, 비관계적인 독립된 완벽한 자아가 상정된 사회에서 동행은 불가능하다. 나와 타인으로 이분화 된 인간관계를 극복하고 동행의 길을 가기 위해 작가들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다.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손을 내민다. 세계 속 모든 사람들은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반자이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 놓이는 과정 중의 주체(subject)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행인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모두 귀하고 소중하다. 예술은 이미 그 자체로 사람-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함축한다. 작품의 가치와 의미는 작품 자체에 존재하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성질이 아니다. 특히 오늘날의 미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함께하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작품 사이에서 일어나는 조응의 결과이다. 공감의 산물이다.
한편 채연전의 동행인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전제(前提)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이다. 그러나 채연전의 작가들은 결코 여성만의 영역 혹은 분리주의(separatism)나 본질주의(essentialism)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충만한 관계맺음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뿐이다.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의 표현처럼 관계와 유대, 희생과 헌신 등에 기반을 둔 돌봄과 보살핌의 여성적 윤리에 대한 숙고를 통한 동행은 현대인들을 치유시키고 회복시킬 수 있다. 그것은 보다 충만한 관계맺음을 향한다. 그런데 동행은 인간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그들을 둘러싼 모두는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함께 한다. 특히 동양의 철학은 자연 중심적이고 유기적, 순환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합일적인 관계를 이상으로 추구해왔다. 인간과 자연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자연은 도구도, 자원도 아니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도 서로 연결되고 의존적이라는 생태주의(ecologism)적 태도와 일정 부분을 공유한다. 각양각색의 꽃과 풀과 나무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숲,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 그 모두를 내려다보는 하늘과 구름이 담긴 전시 작품들이 그렇듯 동양화는 예로부터 산수화를 통해 자연과의 소통을 이루어왔다. 그리고 이 소통은 작가들의 사의(寫意)를 표출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또한 여성은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즉 상생을 바탕으로 창조와 재생을 반복하는 자연의 본래적 질서와 연결된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주의적 관계 복원이 여성적 미학과 연결되는 것이나 도가(道家) 철학에서의 현빈(玄牝), 물(水), 무위(無爲), 유약(柔弱), 고요함(靜) 등이 여성적 원리의 암시이자 자연 질서의 구현으로 해석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특히 자연과의 동행을 보여주는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꽃이다. 그런데 꽃은 여성과 에로티시즘(eroticism), 바니타스(Vanitas)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재생과 부활의 연결고리로서 의미를 갖는다. 흙 속에 담긴 배설물과 죽음이 꽃으로 승화되고 그것은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개화(開花)는 닫혀 있던 폐쇄적 공간이 세계를 향해 열리는 것과 같다. 세계를 받아들이는 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꽃은 그저 한 송이의 꽃이 아니다. 죽음은 그저 최종적인 종말이 아니다. 꽃은 생성과 소멸, 재창조의 순환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세계는 같은 존재, 비슷한 존재,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술했듯 그것은 가장 평범하고 근원적인 진리이다. 진정으로 고양된 존재일수록 더 많은 관계맺음을 실현하며 삶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존재들의 본래적 가치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공존을 뛰어넘어 동행의 세계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세계와 동행을 이루었을 때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동행도 가능해진다. 본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공통되게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동행-이다. 작업을 통해 스스로와 세계를 향한 성찰적 소통을 실천하는 것이자 진실한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표현대로 행복은 인간이 자신의 독단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을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러야지만 가능하다. 세계를 향해 깨어 있고, 스스로를 열어 세계와 응답하고, 스스로를 비워나갈 때 모든 분리와 소외를 극복하고 자신을 포함한 세계 속 모든 존재와 진정으로 동행할 수 있다. 제 34회 채연전을 통해 예술이 지닌 소통과 공존, 치유의 가치를 확인하고 진실하고 거짓 없는 관계를 이끌어내는 동양화의 미학적 의의와 정신을 그 빛을 발하길 기대해본다. ■ 이문정
Vol.20151019c | 채연전-동행-제34회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 동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