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서 비물질로

국대호展 / GUKDAEHO / 鞠大鎬 / painting   2015_1015 ▶ 2015_1128 / 수,일요일 휴관

국대호_물질에서 비물질로展_브릭래인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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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01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2:00pm / 수,일요일 휴관

브릭래인 BRICK LANE 서울 마포구 잔다리로3길 10(서교동 395-2번지) Tel. +82.2.6730.1989

작가 국대호의 작품들이 눈앞에 있다. 미술 평론가도 아닌 내 눈앞에, 미술보다 음악에 더 길들여진 나로서는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다. 미술을 음악처럼 반복해서 듣는 것으로 이해한다. 미술과 음악, 둘 다 비 언어적이다. 작품이 작가 개인의 말이라면, 국대호의 작품들은 작가의 마음의미로, 마음에서 벗어나는, 그러나 다 드러내지 않는, 드러내어서는 안 될 말들이다. 작품은 언제나 비밀이고, 오래된 비밀.

국대호_Jelly Bean-094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12 국대호_S2015201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15

첫 번째 본 작품은 초점이 흐릿하다. 비 사실적이다. 구도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불안하게 보인다. 도시의 길 풍경을 담은 그림인데, 건물들과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그리고 너른 신작로 같은, 포장된 길만 있을 뿐, 걷는 이들은 없다. 진정한 비참함은 관계 없음이다. 작품이 비 물질화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비 물질화 된 작품은 물질세상에 대한, 물질 너머에 대한 해석일 듯하다. 이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질문을 촉발시킨다. 왜 이렇게 흐리게 찍었지 라는 경계와 불안한 구도가 지닌 관점에 대해서. 대답이 이렇게 찍어야 만 제대로 찍은 것과 차이가 생기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하는 미술의, 작가의 태도라고 말하면 좀 싱거울 게다. 현실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 더욱 그러하다. 작가는 이사진을 사물의 앞이 아니라 뒤에서 찍었다. 포옹이 아니라 분리인 셈이다. 이것은 시간의 초월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으려는 억제로 보인다. 보이는 것을 애써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두려움에 속하는 일이다. 두려움이 커지거나 지속 반복되면 강박이 된다. 주차 되어있는 차들은 못에 박힌 채 있는 사물들, 도주가 불가능한 사물들이다. 차 곁에, 길에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이것들과의 접촉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와 닿는다. 남는 것은 고백과 같은 시선뿐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한 비운동성, 물질에서 비물질로 옮겨가는 꿈과 같은 작품은 삶의 비밀에 대한 헌신. ● 빨갛고 노랗고, 푸른빛을 띤 강낭콩 같은 알들이 빛을 받아 한 테 섞여있다. 작은 사물들의 집합체, 그곳에서는 위와 아래가 없고, 좌우가 없다. 발음된 단어들처럼 그냥 널브려져 있다. 그림의 앞에 보이는 것들이 있고, 뒤에 보이지 않는 것 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은 움직임이 아니라 움직임 이후의 흔적, 자취이다. 강낭콩 같은, 색깔 입힌 작은 단추 같은 초콜릿들이 침묵하는 모습이 있다. 움직임이 정지되면 언어도 활동을 멈춘다. 말을 하지 않으니까 의미도 유예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위에서, 옆에서 같은 사물들이 쏟아져 들어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멈춰 고정된 사물들의 침묵은 다른 사물을 포획하려는 집단을 이룬 포식 동물 같다. 누에고치의 알 같은 것 들이 제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다.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도전의 한형식. 알들의 침묵은 공모의 한형식.

국대호_S2015101-S2015105_캔버스에 유채_54×36cm×5_2015

화려한 색깔들이 벽면을 가로로 여럿 수놓고 있다. 어릴 적, 종로5가 광장시장에 있던 포목가게 진열장에 쌓여있던 이불 같기도 하고, 색동 저고리 옷감 같기도 하다. 색깔의 양형 구조, 편극의 광경, 색들이 분리되어 있으면서 쌓여 동일한 하나가 되는 것, 환영은 이렇게 생성된다. 천연의 색들은 과거이다. 과거가 쌓이고 쌓여, 확장되면 제 스스로를 박탈하고, 섬광처럼 보인다.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이 그러할 것이다. 색들이 옆으로 누운 채 쌓여있지만, 그것들이 한 테 모여 부동의 모습을 지닐 때, 보는 이들은 긴장하게 된다. 그림을 보는 독자의 눈은 노예의 눈.

국대호_물질에서 비물질로展_브릭래인_2015
국대호_T2014001-T201402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7.5×45cm×21_2014

용지를 좌우크기를 같게 나누면 모눈종이가 된다.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의 세로줄과 가로줄을 그린종이로, 한자어로는 방안지라고 한다. 줄이1 밀리미터 크기 같기도 하고, 그보다 커5밀리미터 일 수도 있겠다. 생이 그렇게 평등하게 잘려 나갔으면 좋겠다. 한치도 다르지 않게, 잘려나가도 옆에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 모눈처럼. 대칭적 매혹 혹은 대칭이 매혹이 되는 형태, 그러나 보면 볼수록 고통스럽다. 가로와 세로가 균등한 공간들은 잘려나간 육체, 그것들의 분산과 교합을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가차없는 고통이다. 벌거벗은 칸들은 옆에 있는 칸들에 복종하는 것, 이런 그림을 거푸 보면 최면에 걸리게 된다. 뚫어지게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순종을 강요하는 분리.

국대호_C2014001-C2014004_캔버스에 유채_72.8×60.6cm×4_2014
국대호_P15001-P15008_종이에 유채_76×56cm×8_2015

파란색 천이 길게 늘어서있다. 여섯개, 천과 천사이에 약간의 사이가 있다. 어릴 적 기억으로 보면 동네국수가게에 널려 있었던 기계에서 막 나온 말랑말랑한, 볕을 쬐거나 바람을 쐬기 위하여 펼쳐놓은 가느다란 면발 같기도 하고, 가난한 연극무대의 배경 막 같기도 하고, 지리산 함양 백전리 산속, 홀치기 한천을 잿물에 담궜다가 다시 쪽물에 헹구어 빨랫줄에 널은 천연 염색한 천 같기도 하다. 비 의지적 이미지의 해석은 친숙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 막대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 천 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의미는 이미지와 등가의 것들을 찾아야 하는 노력을 강요한다. 그것은 꿈을 해석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란색천은 기관들이다. 서서, 곧추서서 아래로 추락하는 체위이다. 어른에서 어린아이가 되려는 고통스러운 이미지, 그것은 무언의 애착. ■ 안치운

Vol.20151018j | 국대호展 / GUKDAEHO / 鞠大鎬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