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1008_목요일_06:00pm
후원 / 익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창작스튜디오 E127 GALLERY E127 전라북도 익산시 중앙동 2가 14-2번지 www.iscf.or.kr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Yalu River Cafe』: 기호(Sign)로 표현된 언어와 존재의 사유 공간, 그리고 이분법적인 존재의 틈새 엿보기 ● "저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빈 기호(記號, Sign)로 가득한 나라로 생각이 들어요. 이상(理想)만 존재하고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나라. 압록강에 가상의 카페를 설정하여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그렇지 못한 북한에 대한 환상과 의문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묘하게 교차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업입니다." (임노아) ● 압록강 카페(Yalu River Cafe). 작가 임노아의 이번 전시 제목이다. 매번 독특한 시각과 발상의 작품을 선보였던 임노아가 오랜만의 개인전을 통해 선보이는 이번 전시 타이틀 역시 매우 흥미롭고 예사롭지 않다. 지난 2004년 『System City』 전시를 통해 존재와 자아, 사회적인 억압과 개인의 욕망 등을 표출했던 임노아가 이번 전시 『압록강 카페, Yalu River Cafe』 에서는 언어와 사유공간으로서의 '카페'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유토피아(Utopia)와 디스토피아(Dystopia), 가상(假想)과 실재(實在), 현재와 과거와도 같은 이분법적인 존재의 틈새를 작가만의 예술적인 감각과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임노아는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고 있는 몇몇 텍스트와 사진 및 영상, 그리고 우리가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같은 평범한 오브제 등을 활용하여 개념적인 설치작품 「압록강 카페」 를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다분히 암시적이고 상징적이다. ● 필자가 이번 전시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이상(理想)만 존재하고 현실과는 괴리감이 큰 '북한'을 주목하면서 북한을 빈 기호(記號, Sign)로 가득한 나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한민족이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이념차이 때문에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한국과 북한.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바로 북한인 것이다. 임노아는 지극히 암울한 북한의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이와는 반대로 『압록강 카페』 라는 가상의 공간, 환영의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유토피아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디스토피아적인 북한의 현실을 묵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임노아는 이런 이분법적인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극복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염원 역시 암시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임노아의 이번 전시 『압록강 카페, Yalu River Cafe』 를 통해 우리는 일종의 '기호(記號, Sign) 이미지로 표현된 이분법적인 본질과 이분법적 존재의 특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된다.
미술작품은 눈으로 보고 느끼는 시각예술이다. 하지만 임노아가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서의 미술작품이 아닌 '읽히는 것'으로서의 미술작품, 바로 기호(記號, Sign)로서의 텍스트이다. 필자가 임노아의 이번 작품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 『압록강 카페』 에서는 전시의 주요 개념이 되고 있는 'Begging(구걸), Lie(거짓말), Stealing(절도)' 과도 같은 상징적인 텍스트가 전시장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이는 탈북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지하게 된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만의 텍스트이자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런 임노아의 작품 경향은 페미니스트 개념미술가인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사진과 텍스트를 연상시킨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진과 텍스트에는 일관된 프로세스와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작가가 느끼는 사회와 예술에서 발생했던 문제와 부조리, 사회적인 억압 등이 내포되어 있다. 특히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그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의 메시지를 대변하였는데,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하는 독특한 예술형식을 통해 기존 예술에 대한 비판과 사회제도적 권력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백인남성 지배구조에 함몰되어 있었던 모더니즘 예술과 제도, 사회적 편견 등에 저항하였다. 마찬가지로 임노아의 이번 작품 「압록강 카페」에 등장하고 있는 'Begging(구걸), Lie(거짓말), Stealing(절도)' 과도 같은 북한과 탈북자들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와 사진 및 인터뷰 영상 역시 사회적 약자와 현실을 비판했던 바바라 크루거의 방식과도 매우 닮아있다. ● 임노아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사진과 영상 이미지 역시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를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기호(Sign)로서 존재한다. 해체론의 대가인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언어관에 의하면, 기표는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이 직접적으로 기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기표와 기의는 계속해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조합을 형성한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가 종이의 양면처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 소쉬르의 기호모델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데리다의 기호구조는 영원히 부재하는 타자의 흔적에 의해서 결정되고, 기의는 그것이 얽혀 있는 다양한 기표의 연쇄에 의해서 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차이'와 '지연'의 효과를 산출하는 데리다의 '차연(差延, différance)'의 의미가 발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임노아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사이보그처럼 인위적인 여성들의 영상 이미지와 몽환적인 음악,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이야기로 가득한 카페의 소음, 탈북여성의 인터뷰 영상 등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혹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암시와 상징 등으로 가득 찬 기호의 세계이다. 임노아는 『압록강 카페』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하여 가상과 실재, 이상과 현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로서의 사회와 세계를 하나의 기호처럼 제시하면서 이분법적인 존재와 이분법적인 본질의 틈새와 간극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기호로서의 텍스트에 대한 관심과 탐구, 그리고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을 암시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임노아의 작품은 올해 7월 익산 레지던시에서 선보였던 이상의 1963년 작품 『지주회시(鼅鼄會豕) 』 를 모티브로 작업했던 『거미가 돼지를 만나다』 라는 제목의 전시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난해하면서도 독창적인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상의 1963년 작품인 『지주회시(鼅鼄會豕) 』 에서 '지주' 란 거미를 의미하고 있으며, 원래 '지주(蜘蛛)'로 표기해도 될 것을 이상은 굳이 '지주(鼅鼄)'로 표기하였는데, 이것은 현학적 취미라기보다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시도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소설 '지주회시'라는 제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가해적인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사회와 현실에 대한 이상의 비판적인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를 주요 모티브로 전시했던 임노아의 『거미가 돼지를 만나다』 역시 현실비판적인 시각과 더불어 데리다의 차연(差延)처럼, 다양한 읽기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 필자가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에서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언어적인 공간'으로서의 카페이다. 사실 '카페'라는 가상공간을 설정하고 있는 임노아의 작업방식이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임노아는 가상의 공간으로서의 다양한 건축물들을 실험적으로 시도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현재까지의 귀결점이 바로 '카페'였다.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에서는 일반적인 카페에서 나눌 수 있는 편안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만이 아닌 정치적인 메시지와 일상의 소소함이 뒤섞여 있는 공간, 개념적인 오브제와 텍스트가 공존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카페, 다시 말해 장소적인 요소로서의 가상의 공간뿐만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적인 공간 역시 공존하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역설했다.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존재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에서 언어의 문제 또한 매우 중요하였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문제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서의 언어'였다. 즉 언어는 육신이고 존재는 영혼과 같은 것으로서,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적인 공간으로서의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는 존재(存在)와 자아(自我), 정체성 등에 대한 무의식의 표상과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가 '언어적인 공간'에서 '존재와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는 은유와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사진으로부터 드로잉과 텍스트, 영상과 설치로 확장되고 있는 임노아의 근래의 작품성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듯하다. 해외에서의 오랜 유학생활을 통한 경험과 사고, 독특한 시각과 다양한 발상은 그녀가 한곳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시도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열악한 창작조건, 작품에 대한 열정과 그에 따른 불만족, 불확실한 미래 등으로 고민하고 방황하는, 마치 유목민과도 같다. 임노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고민과 방황만으로 끝내지 않고 부단한 노력과 고민을 통해 오히려 이런 상황들을 즐기며 헤쳐 나가고 있는 듯하다. '유목민' 혹은 '유랑자'를 뜻하는 노매드(Nomad)의 세계를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그의 저서『차이와 반복』(1968)에서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였다. 노매디즘(Nomadism)이란 단순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한 장소에 안주해서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고 변화하며 마침내 진화하는 창조적인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유목민은 정착민의 안정적인 생활양식과는 달리 예측할 수 없는 불완전한 삶이지만, 반대로 '자유로운 삶이자 열린 삶'이기도 하다. 그것은 항상 떠남을 염두에 둔 삶으로서, 한 장소에 도착함과 동시에 떠남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임노아의 이번 전시 『압록강 카페』 역시 이런 사유로서의 여행공간과 다름 아니다. 임노아의 『압록강 카페』 는 가상의 공간과 상징적인 기호들을 통해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이상과 현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가상과 실재의 이분법적인 존재와 본질을 찾아 헤매는 기나긴 여정(旅程)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런 여정에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임노아의 작품 성향들은 작품의 정체적 혼란기가 아닌,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통한 진화의 과정이자 사유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임노아가 찾아 떠나는 새로운 공간으로서의 카페, 이다음의 사유공간이 사뭇 궁금해지고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태호
상대적인 크기는 서로의 개념을 초월한다. 이는 크기라는 양이 단순히 장소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변화를 내포한 시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념은 우리 인간의 시계처럼 공간 지향적이고 정적이지만, 가변성을 지닌 물리적인 단위들은 언제나 변화의 과정 속에 생멸하는 시간적인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서로 다른 두 상황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가치와 의미를 주장할 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우리의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다국적인 경제적, 사회적 상황들이 우리 삶의 환경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 가치중립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개인이 추구하는 자신의 삶의 모더니즘적인 성취나 성취의 과정이 주는 의미 같은 것들이 아직도 유효하기는 하지만(물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도 마찬가지로), 좀 더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마주하는 삶의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의해 발생하는 의식의 지평은 글로벌이라는 상황과 의미에서 볼 때, 이전과 달리 엄청나게 많은 인간조건의 변수들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게 만들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주관적인 상태로 복귀시킨다. 말하자면 반성적인 사유(칸트는 예술은 반성적이라고 말했다)를 통해 현상들을 다시 재정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변증법적인 지양과 통일의 과정으로서 인지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삶의 조건들에 대한 공리적인 반응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정신과 의식의 형식을 해체시킬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가 구축해온 의미의 구조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물리적인 패러다임의 변환(paradigm shift of the physical)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 개인의 '고유한 공간'(proper space)이 '고유한 시간'(proper time)의 차원으로 연장되고 확대되면서 우리의 삶에서 속도는 삶의 과정을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이런 면에서 칸트의 미학적 판단이 주관적이고, 객관성을 포용하는 직관적인 판단이라는 관점은 다시 한 번 우리 삶의 내용을 설명해줄 수 있는 철학적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적인 사건들과 그런 인간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사건들을 인간 삶의 인덱스이자 형식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하버마스의 소통(communication)과 합의(consensus)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합의는 인간들 간의 관계, 사건들 간의 이해를 위해 남아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민주적인 방법론이었다. 이런 면에서 하버마스 역시 칸트의 주관주의라는 관점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지만 하버마스가 택한 정치사회적인 지향성은 칸트의 형식주의 미학적 세계관과 다른 세계이해를 보여주는데, 하버마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특히 노동과 같은 과정을 통해 자기 삶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칸트의 정태적(static) 주관주의와는 다르다. 이는 형식과 내용의 구분을 떠나 우리 삶이 이 세계의 사건들에 관한 의식과 더불어 삶의 관점들을 지속시켜 나아가는 의지에 관한 질문에서 철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 임노아의 「압록강카페」는 압록강이라는 명칭과 카페라는 장소로 인해 공간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압록강이라는 공간은 분단의 현실에서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오히려 다수에게 그 장소는 지도위의 어떤 장소의 이름일 뿐이고, 통일이나 아니면 정치적인 화해의 문제들이 선결된 이후 현실적인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 압록강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현재의 사실적인 정치적 상황들뿐만이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 이전의 민족적인 과거가 가지고 있는 향수와도 관계가 있다. 그 향수는 압록강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강이 아니라 과거에 한민족이 공유했던 공간이고, 앞산 뒷산처럼 평범하고 친근했던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으로 비롯될 것이다. 평범한 것이 금기가 될 때 우리는 한 대상에 투사되었던 평범함과 익숙함 만큼이나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부재와 욕망과 같은 것과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너무도 친근해서 잊고 있는 듯 하지만 부재하는 그것은 근원적인 상실감의 원인이 되고 강렬한 욕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전시의 한 작품인 「압록강카페」를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 작가의 비디오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콘적인 형상들은 '시각적으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일까? 임노아가 제시하는 것은 현실과 교차되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단지 현실적이지만 부재하는 장소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실과 부재의 원인으로서 아버지(Phallus)가 아닌 라캉적인 의미에서 근원적인 존재인 어머니(Mother)에 대한 환상인 것이다. 다큐와 픽션이 한 공간 안에 공존하고, 기억과 현실이 한 공간 안에서 교차한다. 「압록강카페, 2015」 비디오 작품은 픽션으로서 상징적인 부재를 현실의 조건들이 아직도 개입하고 있는 환상으로 재현한 것이고, 다큐적인 탈북이주민 인터뷰 작품인 「내가 건너야할 강, 2015」은 현실을 환상이 개입할 수없는 결핍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래서 환상적이지만 현실적인 사건들과, 현실적이지만 상실로 인해 욕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이 한 공간에 공존하면서 역사적 상황들에 갇혀 있는 인간조건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Table Talk, 2015」를 구성하는 텍스트 "구걸, 거짓말, 도둑질, 누가 나를 그렇게 독하게 만들었는가?"는 통일이나 체제의 변화 같은 정치적인 커멘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근저에는 궁극적으로 통일을 통해 북한도 민주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는 바램이 깔려있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이다. 작가는 그런 기록을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장치들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가장 직접적인 장치를 이용해 관객에게 제시한다. 도둑질이나 거짓말 같은 반사회적인 행동들은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일탈적일 뿐만 아니라 법률적인 처벌의 대상이지만, 작품 내용을 구성하는 탈북이주민 개인의 경험적인 관점에서 보면 생명유지(생존이라는 보편적인 용어가 아니라)를 위한 극단적 행동이었다. ● 여기서 작가의 관점이 아니라 관객과 작품 속 주인공들의 생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는 실제 사건에 기초한 예술적 해석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보편적인 시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의 시간에 속한다. 북한 사회 시스템 이탈자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마 분리된 그들만의 시간에 속할 것이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현실이고, 그 시스템에서 탈출해 남한의 민주사회 시스템에 속한 지금 그것은 기억에 남아있는 트라우마인 것이다. 이는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 경험이 연장되지 않았고 마치 물질처럼 하나의 정지된 측정할 수 있는 양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남과 북이라는 대치 상황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에게나 탈북이주민들에게나 북한이라는 시간은 아직 진행되고 있는 시간인 것이다. ● 작가는 분열적인 시간이 만들어 내는 상황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미지와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 두 상황의 분열은 사실 현실에서의 분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분단과 사회적, 문화적 이질성들이 만들어 놓은 분열 그 자체를 환상의 시간성 안으로 전이시킨다. 여기서 작가의 '고유한' 시간과 작품 속 사건들의 '고유한' 시간이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만남은 존재론적인 명제를 환기시키는데, 우리는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작가의 시간과 이 세계의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이질성이 작품 안에서 만나고 충돌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삶의 다양성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 임노아의 이번 전시 『압록강 카페』는 현재 우리 삶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각각 공간적, 시간적으로 분리시켜 독립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얽혀있는 본질적인 시간의 원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봄으로써 이미지의 기원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 인간 존재의 특성을 변증법적 변화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예술적 사건이 충분히 의미 있는 삶에 속성들에 관한 언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정용도
Vol.20151008j | 임노아展 / NOA S. IM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