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유토피아

김유경展 / KIMYUKYUNG / 金兪京 / painting   2015_1002 ▶ 2015_1028 / 주말,공휴일 휴관

김유경_원초적 세계_펠트에 먹, 오일파스텔_115×147.3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925f | 김유경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안국약품(주) 갤러리AG 신진작가 공모展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공휴일 휴관

갤러리 AG GALLERY AG 서울 영등포구 시흥대로 613(대림동 993-75번지) Tel. +82.2.3289.4399 www.galleryag.co.kr

시간으로부터 추출된 공간, 의식 너머에 놓인 풍경 ● 재현이라는 정형의 틀을 넘어 삶과 자연, 자아의 안과 밖 및 내외를 환영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선보여온 작가 김유경의 작품은 가시적인 미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잡스러움이 배제된, 그러면서도 과장되거나 감정의 노출이 절제된 그의 근작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지각과 그 지각 속에 안주된 내적 세계, 작가 개인의 의식과 삶의 반영이 시공을 거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일궈낸 결과물로써 다가온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건 나를 포함한 '존재'라는 형이상학적인 주제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으며, 이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먹'의 변주를 통해 연장되고 확장된다. ● 다소곳하며 조용한, 허나 음침함과 불안함, 정적이 동시에 다가오는 가시적 결과도 그렇지만 필자가 무엇보다 인상 깊게 여긴 건 그의 근작에 담긴 내용이다. 사실 창작자에게 있어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은 어떤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만의 개념이 어떻게 발현되느냐의 문제만큼 예술 진척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는 드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결국 전체적인 구조와 형식을 결정짓고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유경의 최근 작품들은 정신적이고 사유적인 내 안의 사고와 시각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어 읽혀지기를 바라는지 확인하도록 한다.

김유경_원초적 세계_펠트에 먹, 오일파스텔_113×147cm_2015

작가는 지각되고 지속되는 모든 세계와의 관계에서 찰나의 지연, 순간의 지연을 보여준다. 그의 말처럼 "시간의 연속성으로부터 정지된 찰나적 순간의 심리적 이탈"을 하나의 표상으로 구축하며, 이는 한지에 먹을 찍는 과정을 통해 증폭된다. 이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작가는 '존재'를 관념으로 설정하고 의식을 덧대는 것이며, 밀착되어 있는 시공과 연관시켜 순환의 이미지로 상승케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을 분리해 시간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타자의 상상을 촉발시켜 무형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 속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과 작품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무형질의 실체가 점유하고 있으며 그 점유된 시공간을 이용해 작가는 '존재성'이란 무엇인지 자문하는 순연을 그려낸다.) 이 때 재료가 갖는 물성과 타슈(tache)에 근접한 행위의 매칭은 당연히 형식과 구조를 유도한다. 그런 면에서 김유경의 작업은 형식미란 본래 본질이 앞서면 자연스럽게 안착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부족함이 없다.

김유경_원초적 세계_펠트에 먹, 오일파스텔_115×140cm_2015

그렇게 해서 표현된 작품들이 갖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교류와 침투를 유발하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서술 그 자체로 머물기도 한다. 드넓은 대지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잔상」(2013)을 비롯해 을씨년스러운 풍경 속 집 한 채가 놓인 또 다른 「잔상」(2014), 호수로 보이는 물가 한 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섬을 그린 「잔상, 섬」(2013)과 「물 위」(2013) 등, 거의 모든 「잔상」 연작들이 동일한 범주에 든다. 어둑한 황혼과 산파적인 안개 및 구름과 연기, 청명하지만 침묵하는 대기, 무형으로 존재하나 자연물의 움직임을 통해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바람과 빗방울 등, 하나같이 규명된 물리적 세계로부터 단절되고 이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공의 흐름에 의지해 존치되고 있는 독립된 공간과 시간을 함유하고 있음을 내보인다. ● 이를 달리 말하자면, 실제성을 띠나 실제적이지 않은 실제적 양태로써의 시공의 모습이 해체되거나 재구성되어 정지된 채 존재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라는 것으로,(그러고 보면 김유경의 작품들은 고전적 예술 미학에 준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움직임 속에서 정지되어 있는 형식의 미가 들어 있고, 균형 잡히고 정지된 형식의 미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는 정적인 미학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8세기에 걸친 유럽미학의 전개를 담은 『타타르키비츠(Wladyslaw Tatarkiewicz) 미학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풍부함보다는 단순함을 훨씬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미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형식과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정신물리학적 미, 즉 정신적이면서 물질적인 미의 미학이었다. 김유경의 작품들에서는 바로 그 고전적인 미의식이 물씬하다는 측면이 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경계에서 재조립된 공간과 시간으로 존재하고 그 시공의 틈을 거쳐 알 수 없는 맥락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2013년 이후 제작된 「고스트, 유토피아」나, 시간에 대한 서사를 담으려 했다는 「고스트, 공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김유경_배추흰나비_펠트에 먹, 오일파스텔_150×113cm_2015

하지만 근작에서 중요한 건, 시공에 대한 이해에 앞서 작가 자신의 잠정적 자아로의 접근방법임을 암시한다는 점에 있다. 즉, 낯섦과 친숙함 사이에서 작업의 단초가 되는 소소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구성원리로 꼽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 속에서 이미지화 되며 유동하고 그것은 존재성에 대한 의문과 나름의 해답으로 채워진다. 무형이 지닌 비물질적인 내용들을 시각이 아닌 사유적 틀에 빈틈없이 대입, 발현시켜 의식과 무의식 간 간극에 내재된 존재성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 그렇기에 우린 그의 작품에서 그 어떤 것보다 서정적 미감, 사유적 체험에 깊게 개입하게 된다. 보편적 일상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사건들마저 현상의 건조한 목도를 지나 몽롱한 꿈처럼 재구성되는 특질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고요히 빛나는 빛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침묵하는 가운데 부유하는 역동적 태도, 또는 움직이지 않으나 움직이는 양태와 같은 것으로, 그것의 실체는 본래 나와 나를 점유한 모든 의문에서 찾아진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있어 존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동양사상식 자문자답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김유경_고스트_한지에 먹_65×73cm_2014

실제로 김유경의 신작들은 엄숙함과 냉정함이 동시에 공존하는데, 이는 곧 정(靜)이다. 그렇지만 우직한 세련됨이 공간과 시간을 함축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동(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의 조응, 즉 조용한 가운데 세련된 동세가, 리듬감 아래 차가운 엄숙함의 공존이 곧 중(中)임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정중동'은 그동안 작가가 시도해온 전통적 맥락과 습속성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담보한다. (먹을 일일이 찍어 만들어진 하나의 점은 태동의 뿌리를, 먹을 찍는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의 무중력을 나타낸다. 이는 기존 한국화의 전형적 표현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움에 대한 예술가로써의 갈망일 수도 있다.) 여기에 재료에 대한 실험을 잇는다든지 대형 걸개형 작업으로의 이어짐은 스스로의 조형성을 넓히려는 의지로 읽히며 이는 세상과 만물을 바라보는 공(空)의 관념, 인간과 사물을 관통하는 시공과 원류의 근원에 대한 넓은 고뇌의 시각으로 무리가 없다. (물론 이 공(空)에는 비워냄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성숙성을 담보하기도 한다.) ● 오늘날 김유경의 작업은 그의 발언에서처럼 물리적 세계관에 머무르지 않은 채 "무의식에 속한 잠재적 사태를 표층으로 끌어올려진 부유물"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투사되는 시공의 대입 혹은 관찰은 원형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사회적 시선과 예술적 시도가 철학적 변용을 거쳐 얽히고설킨 가운데 피어난, 일종의 존재성을 필두로 한 성찰의 의지를 미학적 차원에서 포괄하고 있다 해도 그르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흐르는 부단한 내면적 움직임이자, 겉으로는 강하게 대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의 그림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 공유이지 눈에 드러나는 시각적 이해는 아닐 수밖에 없다. 무언가 비워져 있는 듯하지만 실제론 채워진 비움이요, 채워진 듯하지만 더 채울 수 있을 듯한 심리적 여백 역시 그의 그림에서 목도할 수 있는 특징이다. 즉, 비워짐으로써 '충만함'을 잉태하고 충만함에서 비움을 생성하는 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유경_잔상_한지에 먹_53×65cm_2014

흥미로운 건 이 비움과 채움이 궁극적으로 사유의 여백으로 나아가고, 사유의 여백은 다시 그의 그림으로 시선을 이끄는 매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특별한 연유 없이 그의 그림을 접할 때 감정적 형용이나 울림 (「잔상」 연작에서의 시각은 흔적을 훑고, 그로부터 비롯된 이야기와 여백을 돌아보게 한다면 '울림'은 내적 양태를 지목하는 요소로 자리한다. 즉, 작가의 그림에는 시공의 정지됨이 녹아 있고 이것이 자연물과 어우러져 다층적-상호적 성격을 내재하며 그림을 감싸고 있다면 '울림'은 그 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심적 여울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바로 일종의 여운이거나 반향이고, 공감과 공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인상에 잡히는 자연물과는 달리 해석이 수월하진 않으나 대신 여진은 길고 오래간다.)이 이는 것도 이와 같은 시간으로부터 추출된 공간, 의식 너머에 놓인 침묵의 서사가 이입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김유경의 풍경들은 심연의 읊조림이자 누구나 갖고 있지만 전부 동일하지 않아 새로운 상상이 가능한 풍경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침묵의 대지와 바람, 뿌연 안개와 구름, 고요한 대기의 흐름만 놓고 보면 분명 외적으론 자연 풍경의 일부이면서 내적으론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한 자기의식의 한 단락의 투영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우린 그 양방향에서의 감정을 공유하며, 김유경의 작품에는 이처럼 다분히 감각적이고 인간적인 내면의 풍경이 숨어있다. 읽느냐 못 읽느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대기가 그렇고, 바람이 그러하며 울림이 그러하듯. 한편 이제 갓 30대에 접어든 작가에게서 이토록 깊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건 의외이다. 종이와 먹이라는 단순한 재료와 찍기라는 행위를 통해 건질 수 있는 다양한 예술적 요소들을 포박하고 있다는 것도 남다른 관점을 시사케 한다. 따라서 필자는 다소 장식적 흐름으로 변화될 수도 있다는 점만 주의한다면 향후 주목 받는 작가로써 자리매김할 가능성도 오늘의 작업 성과만큼 낮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래서인지 다음 전시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다. ■ 홍경한

Vol.20151003j | 김유경展 / KIMYUKYUNG / 金兪京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