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화가 15인의 어제와 오늘

2015_0922 ▶ 2015_112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5_0923_수요일_03:00pm

참여작가 김봉태_김윤배_김윤신_박재호_박한진 서승원_석난희_이민희_이봉열_이정지 이태현_제정자_조영동_최경한_한영섭

후원 / 경기도_양주시

관람료 / 성인 3,000원 / 8~19세,경기도민,군인 1,000원 미취학 아동 및 65세 이상 무료관람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안상철미술관 AHNSANGCHUL MUSEUM 경기도 양주군 백석읍 권율로 905 Tel. +82.31.874.0734 www.ahnsangchul.co.kr

내적 세계의 표현 ● 글을 더 이상 안 쓰고 책을 점점 더 안 읽는 이 시대에 내적 감정을 추상적인 형태와 색채로 표현하는 세대가 있다. 소란한 외부세계로부터 무수한 영상과 숫자를 주입받고 이에 복종하는, 내적 감정을 전달하는 편지가 없어지고 휴대폰의 문자메시지가 긴 편지를 대신하는 이 시대(필립 소럴Philippe Sollers이 생각하는 현대)에 사는 현대인들 가운데, 추상적인 것, 내적인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지금부터 50-60년 전인 1950년대 6·25전쟁 후에 한국에 밀어닥친 추상미술은 역사 속으로 들어간 예술운동이다. 그 당시에 파리 화단으로 유학을 갔다 온 몇몇 화가들은 한국의 추상미술사 속에서 유명해졌다. 김환기, 이응노, 이성자, 남관, 권옥연, 기타 다사제제하다. 파리유학은 안 갔지만 같은 세대에 속하는 유영국 같은 사람도 예외로 있기는 하다. ● 남관 선생이 자기는 너무 늦게 파리에 왔기 때문에 따피에스(Antoni Tàpies) 처럼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본적 자격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사실이다. 물론 재능의 차이와 미술교육을 어떻게 받았느냐의 차이도 있다. 따피에스는 유럽에서 있었던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 미술사를 잘 교육받고 작품들을 실제로 보고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따피에스는 혜택 받은 화가다. 그와 비교하면 남관 선생은 동방의 가난한 나라에서 너무 늦게, 추상미술이 다 끝나갈 무렵에 파리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그의 생각대로 불행했다. 그래도 한국미술사에서 추상미술사 하면 남관 선생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김봉태_nonorientable 199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75×120cm_1990 김봉태_Dancing box 2010-1_반투명 플렉시글라스에 아크릴채색, 테이프_180×90cm_2010
김영배_해변에서A_캔버스에 유채_174×129cm_1965 김영배_해변에서_캔버스에 유채_182×227cm_2015
김윤신_예감 시리즈_석판화_57×38cm_1967 김윤신_내 영혼의 노래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3

남관 선생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 다음 세대, 추상미술을 열심히 배우고 자기 나름대로 연구한 세대들이 최상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국제적으로는 이미 추상미술이 종말을 고했었다. 바로 그렇게 운이 나빴던 세대의 모 화가는 '운이 나쁘게, 실컷 그림이 잘 그려졌다 싶을 때에는 이미 그것은 끝난 회화양식이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 추상 이후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팝아트'가 유행하는 시대가 되었으나 가난의 밑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국에서 사회현상을 반영한 팝아트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추상에서 구상미술로 급변한 미술양식의 변화에 미국화단을 제외한 세계는 팝아트에 적응하지 못 했다. ● 더구나 당시 한국의 수도 서울에는 화랑이 없었다. 현대화랑이 1970년대 중반에 유영국 선생의 추상화를 처음으로 판매했다고 한다. 뉴욕에서처럼, 화랑이 있다 해도, 영리가 목적인 화랑들은 이익이 큰 유명 추상화가들 몇 사람만을 취급했을 뿐 갓 화단에 출현한 추상미술의 신인들을 전시할 장소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미국 추상미술가는 미국화단으로 들어가는 데 실패한 후 자기 침대 밑에 발표하지도 못한 추상화를 비끌어 매어두고 사망했다. 그의 자손들이 이를 신문에 알려서 확인해 보니 드쿠닝(Willem de Kooning)에 가까운 양식의 꽤 괜찮은 추상화였다고 한다. 이렇게 길을 잃은 추상화가들이 한국에는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 무슨 신앙이나 정절을 지키듯 젊었을 때 한 번 시작한 추상화를 계속하여 그리는 화가들이 많다. 그것이 아주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상징주의 사전을 보면 20세기 초 1905년경, 야수파가 출현한 후에 알려진 화가들이나 작품들이 많다. 늦게 출발한 화가들이 다음에 오는 회화양식으로 꼭 그림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보나르(Pierre Bonnard) 같은 화가는 인상주의회화가 다 끝난 후에 약 50년간을 인상파 그림을 그렸다. 그는 미국의 색면파 화가(color field painter)의 선구자로 칭송 받기도 한다.

박재호_파시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1966 박재호_자연 이미지_혼합채료_130.3×162.2cm_1992
박한진_장승_캔버스에 유채_135×60cm_1981 박한진_장승_OSB에 아크릴채색_26×30cm_2013 박한진_장승_나무에 먹_13.8×48cm, 13.8×33cm_2013 / 박한진_장승_종이에 먹_2013
서승원_67-15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1967 서승원_02-동시성 14-8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0cm_2014
석난희_자연87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1987 석난희_자연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9

상징주의 미술관이 파리에 있다. 인상파는 한국에 몇 명 없지만 이와 반대로 추상화가는 많다. 한국에는 추상미술 미술관이 설립되어도 좋을 것 같다. 이번 추상전에 전시된 화가들의 작품이 옛날 그림들이어서, 실제로 일일이 보면서 작품에 대한 글을 쓰기 어렵다. 화가자신들이 자기 작품에 대해서 쓴 글과 다른 전시회 카달로그에 나온 비평들을 참고하여 읽고 전시된 그림들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위에서 쓴 '불행한 추상 세대'라는 개관이 작품 이해에 도움이 크게 안 될 것을 안다. 작품해석은 비평가마다 다를 수 있고, 관객도 비평가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추상미술은 반세기가 넘은 미술사적 양식이므로 관객 또한 비평을 시도해볼 만하다. ● 대체적으로 파리의 서정추상, 뉴욕의 추상표현주의는 무채색이거나 무채색에 가깝다.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말, 60년대 초까지 계속된 파리와 뉴욕의 추상화는 세계화(世界化) 시대로 들어간다. 한국추상화는 이 세계화 시대의 추상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뉴욕파 추상에는 색채파 화가가 나왔으나 파리에는 그것이 없다. 한국추상에서 색채파 추상화가들은 여기 전시된 화가들 외에도 적지 않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을 대표화가로 받드는 뉴욕 추상에서 폴록의 드리핑회화를 모방한 화가는 드물다. 드리핑기법보다는 '액숀 페인팅'의 개념이 많이 유포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파리에도 드리핑기법과 유사한 경향이 있었다. 원래 드리핑기법을 발명한 것은 파리의 초현실파 화가인 앙드레 마쏭(André Masson)과 에른스트(Max Ernst)이었다. 추상표현주의에는 드쿠닝 류의 붓터치가 격렬한 추상을 계승한 화가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다. 파리파의 서정추상은 미국화가 중에 마크 토비(Mark Tobey)처럼, 동양철학에서 뿌리를 찾은 화가들이 많다. ● 그림에는 역사적 양식이 존재함으로 해서, 시대를 구획하고 나아간다. 역사적 시간으로 보는 시간 구획에는 늦은 감이 있다 하더라도, 예술이란 한 인간의 내적 정신세계를 화면 위에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미술비평은 미술가가 생존하는 당대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조지 들라 뚜르(Georges de La Tour)처럼 300년 후에 재평가되고 영광을 얻은 화가도 있다. 보나르처럼 한 50년 시대에 뒤떨어져도 유명해지는 경우도 있다. 유명해지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으며, 좋은 그림을 시대를 초월하여 많이 그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 정병관

이민희_불균형적균형 unbalanced balance_캔버스에 유채_165×112cm_2008 이민희_녹색대녹색 green to green_캔버스에 유채_199×130cm_2013
이봉열_도시_캔버스에 유채_23×33cm_1957 이봉열_무제 공간-0911_캔버스에 혼합재료_80×160cm_2009
이정지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유채_53×46cm_1975 이정지_○-321(코지)_캔버스에 유채_194×259cm
이태현_space 70-1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1970 이태현_space 97981002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1998

미래학적인 미술사 ● 미래학자의 말에 의하면 인류는 다른 인류로 종이 바뀔 수 있고 역사도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미술사를 바꾼 예가 유럽에 있었다. 프랑스는 이태리 르네상스를 배우고 또 배웠다. 프랑소와 1세 왕은 이태리의 일급화가인 다빈치(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Raphael) 들을 초대하여 퐁탠블로성의 벽화를 그리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들 일류화가들은 프랑스왕의 초대를 모두 사양하고 그들의 수제자들을 대신 보냈다. 왕은 프랑스화가들에게 이태리 대가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잘 배우라고 권장했다. 프랑스는 이태리 미술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미술의 2등 주자가 되었다. ● 그런데 프랑스는 나중에 17세기 화가인 푸쌩(Nicolas Poussin)을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로 결정하고 푸쌩의 모든 그림을 사서 모았으며 개성이 확실한 그를 프랑스회화의 국부처럼 모시게 되었다. 이태리 영향을 많이 받은 푸쌩 이전의 그림은 진정한 프랑스 미술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 한국의 추상 미술사를 미래학자적인 견지에서 생각한다면, 서양의 프랑스와 미국 영향을 받은 추상미술은 서양으로 돌려보내고 니콜라 푸쌩처럼 개성이 강한 대가의 작품을 한국추상의 선두에 앉혀야 할 때가 올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미대를 졸업하고 10년 이내의 그림은 '자기작품'이 되기 이전의 작품이다. 서양의 유명 추상화가의 외부 영향권 안에 든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내 개인 의견이 아니라 미술사 학계에서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이다.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해방 후 미대졸업생들의 그림이 초기부터 제대로 자기작품이라는 예술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이번 추상전에 전시된 각 작가의 전반 작업들, 특히 1950년대나 1960년대 작품들처럼 연대가 빠를수록, 외부의 영향권을 보이는 반면 후반의 작업들은 대체로 작가자신의 고뇌가 무르익어 자기만의 색채가 짙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김봉태나 김윤신의 현실생활을 즐기는 듯한 밝은 추상은 고전적인 어두운 추상을 초월했고, 서승원의 회색조의 선과 색으로 그린 회화적인 추상은 초기의 신조형주의적 기하형태를 벗어났다. 이봉열의 무채색에 가까운 명상적인 섬세한 추상과 박한진의 탈속한 느낌의 장승 그림도 초기의 큐비즘적인 대상세계를 초월했다. 무한세계와 자연을 느끼게 하는 석난희와 이정지, 최경한과 한영섭의 추상도 초기의 모습에서 멀리 벗어나고 있다. 60년대 이후 김영배와 박재호, 이민희, 조영동은 서정적인 방향으로, 이태현과 제정자는 한국을 주제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전시된 작가들을 포함하여 모든 추상화가들은 새로운 기준으로 '자기 작품'을 규정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제정자_자연의 흔적_캔버스에 유채_94×119cm_1962 제정자_靜과動_캔버스에 면, 아크릴채색_194×259cm_2009
조영동_점에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89.4cm_1974 조영동_선에서_캔버스에 혼합재료_199.3×336.3cm_1992
최경한_운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1966 최경한_풍진 風塵_캔버스에 유채_130×89cm_2009
한영섭_단청과 콘크리트_캔버스에 유채_140×140cm_1969 한영섭_갯벌-바람_한지 탁본_131×227cm_2005

아직도 그 작업의 형태나 내용면에서 모방의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작품들이 미술관 전시회에서 한국추상을 대표한 지도 반세기가 지났다. 형태가 조금 있다고 '단색 전'에서 제외되고, 동일한 작품을 형태가 적다는 이유로 '추상'이 아니라 하고, 어디에 설 자리가 있는지 모르는 추상작가들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어떤 전시장에서 모 작가를 만났을 때 한국 추상 미술사는 모방작품들을 제거하고 새로 써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 비평가나 미술사가들이 각자 주관적으로 미술사를 여러 권 쓰기 보다는 화단과 화가들의 여론을 충분히 반영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20-30년 만에 드물게 미국 미술사를 쓴 어떤 사람이 미술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썼다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의 역사편찬위원회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 빌바오 미술관 건축으로 유명한 프랑크 게리(Frank Gehry)는 리챠드 세라(Richard Serra)와 친구인데, 만나면 자기들 두 사람의 작품만 좋고 다른 사람들 작품은 모두 나쁘다고 욕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6·25 이후 옛날에는 파괴된 명동의 폐허 위에서 작가들이 자주 만나서 여론이 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미술잡지들이 대신한다. ● 안상철미술관이 이번 주최하는 추상미술전은 좋은 작가들을 발굴 하고, 특별한 어떤 의미로 성공했으면 한다. 물론 모든 전시회가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안상철 자신이 전위적인 작품을 했고 사후에도 한국미술계에 공헌하는 것이 보기에 좋다. 파리 유학을 일찍이 갔다 온 나희균 선생의 뜻이 안상철 선생의 생전의 뜻과 합쳐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국화단이 감사해야 할 것 같다. ■ 정병관_김철효

Vol.20150924h | 한국 추상화가 15인의 어제와 오늘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