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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903_목요일_06: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 『Emerging Artists: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작가 전시입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케이크갤러리 Cake gallery 서울 중구 황학동 59번지 솔로몬빌딩 6층 www.cakegallery.kr
무용(無用)의 미학 ● 정기훈의 작업세계는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 획일화된 집단, 표준화 되고 있는 문화, 강제된 규칙에 저항하는 독특한 태도/행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만일 우리가 집단적 차원에서 사회적 구조와 관습을 변형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출발한다. 그는 사회구조 안에서 부분적 차원의 아주 미세한 단위들에 대한 작은 수정들을 시도하며, 힘의 논리에서 한 발자국 후퇴하면서 무상, 주목 받지 못한 것, 비정규적 활동, 시장의 논리에 역행하고 있다. 노란색과 검정색이 반복되는 교통안전표지 사인들, 건설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굴착기는 작가에게는 일종의 규칙, 규제, 억압 그리고 권력으로 다가온다. 사진매체와 드로잉으로 기록된 정기훈의 초기 작업 「마킹, 2006-2013」에서 작가는 노란색과 검정색으로 도색된 도로교통시설물들에 새로운 해석과 기능을 부여한다. 또 「500ml만큼의 사랑, 2013」, 「굴착기 활용법, 2008-2009」에서 작가의 엉뚱하고 무모한 행위들은 바로 거대자본과 시스템이 구축한 힘의 논리에서 한 발자국 후퇴하면서 확고한 구조에 미세한 균열을 유도하고 있다. ● 정기훈의 이번 개인전 『백발무중』은 작가의 이러한 작업세계를 명쾌하게 반영하는 제목이라 할 수 있겠다. '백발백중'의 언어유희인 정기훈의 신조어 '백발무중'은 무능력, 무용, 무상, 놀이, 헛수고의 동의어와도 같다. 이는 기술의 필요성, 생산성의 법칙, 물질적 안락을 위한 발전 논리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이와 맞물린 작가가 속한 88만원 세대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울을 반영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직접적으로는 「9 to 5, 2014」작업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예측 가능하듯, '9 to 5'는 '노동과 시간'을 다루는 작업이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일반 근로자들과 동일한 근무시간을 부여한다. 그는 매일 매일 9시부터 6시까지 단순하게 반복되는 행위들을 통해 일상의 사물들에 변화를 가한다. 그의 노동시간은 건설에 사용되는 도구들이 파괴 혹은 소멸을 위해 열심히 가동된다. 그는 대못, 배구공, 벽돌, 소주병, 숟가락, 천 테이블, 표찰, 나무 등 주변에 뒹구는 사물들을 해체하거나 갈아버린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엇을 만들 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라지게 만드는 헛수고 행위들을 비디오를 통해 기록 하였다. 그리고 행위의 결과들은 '사라지게 만드는' 일종의 형용모순의 위치에 존재하게 되었다." (작가와의 인터뷰, 2015년 8월 3일) 주지하듯이 「9 to 5」 언제나 더 많은 발전을 추구하는 진보적 사고에 저항하며, 노동과 생산의 법칙을 다른 차원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생산성의 법칙과 물질적 안락을 위한 발전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의 효율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기훈의 이러한 개입은 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계산된 것도 아니며, 목적과 의도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의 조용한 말 없는 행위들은 진보, 힘, 거대구조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대한 방향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정기훈의 『백발무중』전시는 「시간은 금이다」, 「허점의 균형」, 「의자의 기원」, 「시계 밖의 시간」, 「Roll」, 「태양초」등 총 6점의 신작으로 구성된다. 「시간은 금이다」는 「9 to 5」에서 보여줬던 노동과 시간의 개념을 연장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시간은 금이다'라는 속담을 참조하며 '시간'의 개념과 성격을 확대적용하고 있다. 「시간은 금이다」 작업은 현대사회에서 시간과 금의 모순적 상관관계를 부각시킨다. 작가는 자신이 모은 돈과 작품 제작지원비 일부를 합해서 금을 구입하고, 종로 금은방의 한 세공사에게 이 금을 갈아 달라고 의뢰한다. 매 주 토요일 작가는 세공사에게 금을 가지고 가고, 세공사는 숙련된 솜씨로 그 금을 갈아낸다. 3개월 동안 이 금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미세한 입자가 된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게 되는 비디오 작업은 바로 세공사가 금을 가는 장면들을 기록한 것이다. 금을 세공하여 귀금속으로 만드는 일이 본업인 금은방의 숙련된 세공사는 지속적으로 금을 가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어떠한 경험을 할 것인가. 세공사가 금/시간을 가는 행위는 금/시간을 낭비하는 것일까. 세공사가 만들어 내는 것은 귀금속이 아니라 가루가 된 가치 없는 금이 아닌가. 가치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금을 갈아 없애는 행위는 사회적 경제적 통념의 가치기준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금가루는 일반적 가치기준의 위배를 넘어서 우리에게 '불용의 가치'라는 대안적 가치를 제안한다. "오늘날 시간의 개념은 물질하고 거의 동일시되어 있다고 본다. 시간을 더 적게 투자해서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그래서 이 작업은 많은 것을 투자해서 적은 것을 만들어 내지만(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는 많은 것을 생산하게 된다." (작가와의 인터뷰, 2015년 8월 3일) 「시간은 금이다」는 시간과 금이 동일시 되는 물질만능 시대에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것, 구체적인 결과보다는 추상적이며 모호한 가능성을 지향하며 소비, 낭비, 허비를 통한 또 다른 가치기준들, 즉 무용, 불용, 헛수고, 유희, 무상의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정기훈은 이번 전시에서 시간과 시계의 관계를 가시화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시계는 시간을 수치화(24시, 12달, 365일...)한 것이다. 정기훈은 바로 이 수치화 된 시계가 일종의 제약과 규칙으로 다가왔다. 정기훈은 추상적 개념의 시간보다는 구체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시간, 즉 근무시간, 증권가의 시간, 약속 시간 등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이러한 시간들은 아마도 작가에게(물론 우리들에게도) 강박, 억압, 제약, 긴장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계 밖의 시간」은 정기훈의 이러한 생각을 시각화 한 작업이다. 전시장에는 사각형 거울이 한 장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그 거울 바닥경계에 맞닿은 바닥에는 동일한 크기의 거울을 간 거울가루가 한 움큼 놓여 있다. 작가는 사각형의 거울은 시계, 즉 규칙으로 보고, 쌓여진 거울가루는 시간으로 본다. 「시계 밖의 시간」에서 규칙(시계)을 가는 행위는 규칙의 와해 그리고 와해된 규칙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
원래 가구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매일 사용하는 의자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도 작가는 의자의 기원을 위해 역사적 고증은 잠시 유보한다. 반면 작가에게 의자의 기원은 인간의 역사처럼 "권력과 권위와 욕망이 엄청나게 투영된 산물"처럼 다가온다. 「허점의 균형」은 "낚시터에서 우연히 의자를 하나 주었는데, 낚시의자로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차에 있는 톱으로 의자 다리를 자르는" 행위를 비디오로 기록한 작업이다. "눈대중으로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잘 못되었고, 자르다보니 헛수고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 (작가와의 인터뷰, 2015년 8월 3일)을 담은 「허점의 균형」은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의자의 기원」과 쌍을 이룬다. 작가의 작업실에 있던 의자들의 다리를 잘라서 -수평을 맞추려고 계속해서 자르다보면 의자의 다리가 거의 없어지게 되는- 설치한 작업이다. 결국 의자의 다리는 바닥과 균형을 맞추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균형, 조화, 평등이 불가능한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저항 할 것인가. 어떠한 방법으로 저항할 것인가. 정기훈의 「허점의 균형」과 「의자의 기원」에서 헛수고처럼 보이는 미미한 행위들은 거대시스템을 파고들며 소리 없는 균열을 만들어 내며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밝은 '내일'을 신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올려다보는 것을 멈추고 발아래를 보게 된다. 암울하고 불안한 현재로 시점을 돌린 정기훈의 프로젝트는 작가 특유의 냉소적 유머와 비장한 유희를 통해서 고정관념과 관습으로 획일화된 일상을 변화시킨다. 정기훈은 일시적이면서 지속될 수 있는 것, 거대 담론과 연약한 사유, 부정과 긍정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이적 공간을 공략한다. '무용의 미학'을 대변하는 정기훈의 작업세계는 자극적이거나 관능적이거나 심지어는 강압적인 것만이 승리하는 현실에 대한 조용한 하지만 지속적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 김성원
Vol.20150906i | 정기훈展 / JEONGKIHOON / 鄭祺勳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