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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901_화요일_06: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선광미술관(선광문화재단) SUNKWANG ART MUSEUM (SUNKWANG CULTURAL FOUNDATION) 인천시 중구 신포로15번길 4(중앙동4가 2-26번지) Tel. +82.(0)32.773.1177 www.sunkwang.org
이영욱의 집 이미지 혹은 삶의 환유 ● 이영욱이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도시의 풍경과 집의 표정이다. 그가 내보이는 집들의 표정은 일견 무심해 보인다. 구도심을 걷노라면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풍경들이다. 그래서 오히려 눈여겨보지 않았던 집들이다. 물론 담쟁이가 벽과 창을 다 덮고 있는 옛 북성동외과의원 건물이나 80여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2층짜리 인천흥업주식회사 건물은 향토사나 건축적 가치도 적지 않은 건물로 보이지만 뜯어보면 시간의 풍화 작용 속에서 남루해지고 있는 여느 살림집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웃이 문득 사라져 허리를 시린 바람에 내맡기고 있는 집(개항로 95-3번지)이나, 새로 대지를 구획하느라 몸통의 일부만 남아 잘린 벽체를 방수포로 간신히 가리고 있는 집(월미로 26번지)의 옆모습은 사뭇 비감스럽지만 그의 카메라는 오히려 침착하다. 일부러 끌어당기지도 않고 시야를 넓히지도 않으며 애써 디테일을 강조하지도 생략하지도 않는다. 앵글도 맨눈으로 본 풍경과 다를 바 없다-마치 이미지에서 메시지를 소거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처럼. ●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 그가 덜어낸 '의도'만큼, 어쩌면 그보다 많은 의미가 파문을 일으키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가 포착한 '낡은 집'들이 애당초 단순한 오브제가 되기 어려운 피사체라는 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집은 이야기의 고리들이 무한히 연쇄되는, 다시 말해 시간의 켜를 바탕으로 한 서사적 함축이 풍부한 주제로 비상한다. 그가 「이상한 도시산책」(2014)에서 보여준 사진들은 도시의 표정들은 시간을 괄호로 묶어 둔 정지화면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그의 작품들이 시간의 켜가 깊은 내러티브로 읽히는 이유는 집 이미지 특유의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은 외연과 내포가 동시에 큰 독특한 말이다. 집은 먼저 가옥이나 주택을 가리키지만, 문학작품에서는 마을이나 도시, 고향과 대지, 자연과 우주의 은유로 사용된다. 또 가족이나 공동체, 국가와 같은 집단과 사회적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이영욱의 작업을 통해 집은 '생활'의 가장 적절한 환유(換喩)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집이야 말로 삶과 삶의 켜를 담는 그릇이라는 것, 몸이 우리의 영혼을 감싸고 있듯이 집은 몸을 감싸고 있다. 집은 '확장된 신체'인 동시에 '축소된 세계'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은 몸과 세계를 매개하는 공간이다. 세계는 집을 통해 몸을 영토화하고, 몸은 집을 통해 세계를 영토화하고 있으니까. 그의 작품 속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도, 채소가 자라는 화분이나 깨진 슬레이트 지붕 따위를 통해 집에 깃들어 살던 주인공들의 삶은 물론 그들의 현존과 부재, 그 부재의 사유를 능히 상상할 수 있다. ● 그가 렌즈에 담아 온 강화도의 한 폐농가 풍경을 보자. 나즈막한 토담집을 중심으로 오른편엔 키높은 측백나무 한그루가, 오른 쪽 둔덕에는 대여섯 그루의 크고 작은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정정하게 서있다. 마당은 잡초밭으로 바뀌었고 지붕과 추녀가 부서지니 옛 보금자리는 비바람에 노출되었다. 퇴락한 섬돌에 뿌리를 내린 덩굴식물들이 창을 넘어 집안으로 드나든지 오래이다. 이 덩굴들은 집의 주인공들이 집을 버리고 떠난 해를, 마당귀의 측백나무는 이 집의 대들보가 얹힌 날을 아는 증인들일지 모른다. 이 사진의 구도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방불케 하지만 집에 닮긴 이야기는 이용악 시인의 대표작 「낡은 집」(1938)의 그것과 짝을 이룸직하다. 이용악은 「낡은 집」을 통해 1930년대 우리 농촌의 이농현상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뿌리뽑힌 농민의 삶을 가장 인상적으로 노래한 바 있다. 물론 이용악은 서사적 시어로 '낡은 집'이라는 선명한 심상을 창조한 것과 달리 이영욱은 사진을 통해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집에 대한 이같은 상상은 얼마간 낭만적 심성의 소산임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들이란 집이 가지고 있던 풍부한 기능을 잃어버리고 점차 추상적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존 방식은 가족과 집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산업사회의 분업생산 방식은 집이 가지고 있던 여러 기능들을 급격히 사회화하였다. 전통사회의 집(가정)을 떠올려 보라. 거기에는 공동의 노동, 식사, 휴식과 놀이, 양육, 탄생과 죽음, 질병의 치유 기능을 갖추고 있는 자족적 공간이었다. 그러한 집의 기능들은 이제 공장과 일터, 학교, 병원, 식당과 같은 '사회적 집'으로 양도되면서, 집의 기능은 축소되거나 공소(空疎)해지는 길을 걷고 있다. ● 주택의 기호화도 집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다. 육체의 확장, 삶을 담는 그릇이었던 집은 이제 상품화되면서 기호로, 심미적 대상으로 바뀌었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판매되며, 쉽게 지어지고 쉽게 허물어진다. 가옥의 상품화되면서 대지와 결합되어 있던 생활공간이자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의 고유한 인격, 혹은 인격체와 동일시되던 집이 지니고 있던 일체의 정서적(감성적) 성질도 제거된다. 집이 가지고 있던 사용가치는 사상된 채 오로지 교환가치로만 측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물신사회에서 모든 사물과 인간이 겪어야 하는 운명이며, 자본이 모든 노동생산물에 들씌운 저주와 같다. 저주의 결과는 '허울만의 실재'(unsubstantial reality)이다. 아우라가 빠져나간 예술품의 운명처럼 집도 영혼이 제거되어 유일성과 사물 본래의 권위가 사라진 복제품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이영욱의 집 연작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빈집이나 낡은 집, 쇠락해 자연을 닮아가는 집들의 표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집의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집들은 대부분 빈 집이거나 인적 없이 고요하지만 그 집의 일대기와 집이 겪은 이야기, 옛 주인의 애환으로 오히려 충만하다. 그렇다면 상품화된 집, 기호화한 집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떻게 '촬영'될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 김창수
Vol.20150904g | 이영욱展 / LEEYOUNGWOOK / 李榮旭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