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817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 권량지_송영준_이승종_정재은
주최 /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조소전공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라온 GALLERY RAON 서울 서대문구 거북골로 82(남가좌동 215-15번지) B1 Tel. +82.2.725.6986 blog.naver.com/yellow_cha
'어제, 변화, 치유, 관계'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바람이 진하게 풍기는 어휘들이다.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는 지금까지 각자의 삶은 달랐으나,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무늬를 만들어 가고 있는 동년배의 작가들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작업을 좀 더 심화하고자 동문수학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아보니 구체적인 표현과 형상은 다르지만 '지금·여기'에 던져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 권량지는 지우개로 만든 우수에 어린 소녀상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서른이 된 여성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한 인간으로서의 여자와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사이의 갈등 말이다. 송영준의 작품은 각각의 개체들이 모여 육면체 혹은 구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 형태를 보니 각각의 개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그 형태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개체들이 틀 속에 억지로 들어가 틀의 모양에 맞춘 것 같은 모습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 아닐까 싶다.
정재은의 작업은 직설적이다. 그래서 매우 강하다. 그녀의 작업은 자신의 삶에서 타인과 관계 속에 매순간 경험하게 되는 '자존自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에 나는 자존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그녀는 어떤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승종의 작업을 보노라면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의 첫 장면이 생각난다. 과연 산업화로 우리의 삶은 풍요롭고 안락해진 것일까? 이 시대에 '인간적인 삶'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기계에 동화되고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발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 이들의 작업을 통해 '나'라는 존재는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모종의 공감대가 그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하긴 모든 종교, 철학, 예술은 하나의 시원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이들의 작업을 보며 조형행위 또한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려나가는 무늬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 박춘호
지워지지 않기 ● 작업을 시작할 즈음 부천에서는 세자매 동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누가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까? 부천 세 자매 중 큰언니는 33살, 둘째 언니는 31살, 막내는 29살로 10년간 수입이 없어 생활고로 자살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춘의 나이에 무엇이 그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나는 내 또래 여성들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동반 자살에 관심이 갔다. 기사에는 생활고라고 한마디로 정의하였지만, 과연 세 자매의 죽음이 한마디로 표현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 나는 올해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누구에게는 로망의 나이이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두려움의 상징이 되는 나이이기도 한다. 나에게도 역시 그러하다. 지우개로 만든 소녀상은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여성을 의미한다. 사회적 역할이 부여되면서 본인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여성을 작가는 지우개를 재료로 하여 표현하였다. 삼십대로 진입한 여성의 가정과 사회에 대한 기대감과 혼란이 뒤섞인 심리 또한 표현하려 하였다. ● 단지 29세에서 불과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사회적으로 많은 역할을 부여받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30이라는 숫자의 무게감에 '달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나는 라캉(후기 구조주의자들 중 주체의 가장 근원적인 장소인 무의식의 영역에서 주체의 붕괴를 목격한 이는 정신분석학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다. 자크라캉은 정신분석학 이론을 기호학에 접목시킨 인물로써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근거하여 인간의 억압된 무의식이 언어의 구조를 통해 사회의 명령 체계속에 형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분석학계와 언어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의 사회명령 체계가 의식을 지배한다고 이야기 한 것에서 근거를 들어본다. ● 주체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며,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왜곡시키면서 형성된 주체의 외피일 뿐이다. 상상적 완전성에 자신을 동일시 함으로써 형성된 주체는 근본적으로 가짜인 것이다. ■ 권량지
관계 relationship ● 개체에 꼬임과 곡선의 방향을 주어 일률적이지 않은 형태로 정형화된 구형태로 표현한다. 그 안에 각을 나타낼 수 있는 기본 개체를 넣어서 겉으로는 곡선으로 보이지만 이를 나타내는 개체는 반드시 부드러운 개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기본적인 심리에 대한 표현으로 일률적이지 않은 개체와 정형화된 구형태로 집적된 형태와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 이유를 묻는다. 사람과 지구, 비주류와 주류, 이상과 현실, 망둥어와 갯벌, 우리와 타인, 알려진것과 알수없는 그무엇과의 관계... ■ 송영준
변화의 정체停滯 ● 변증법적인 의미에서 「변화」란, 양적∙질적 규정성을 갖춘 어떠한 대상이 양적인 증대나 감소와 같은 양적 규정성의 점진적 변화를 거쳐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한도를 넘어서면서 근본적인 질적 변화, 즉 새로운 질로의 이행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인류사회에서도 자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가 존재하는데 전자는 진화, 후자는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흔히 설명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사회는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진화와 혁명이 거듭되어 온 결과라 할 수 있으며, 또한 현대인들은 사회의 양적∙질적 변화를 야기하는 일종의 역할자라 볼 수 있겠다. ● 인류는 사상과 철학의 확장, 기술과 과학의 진보라는 「진화」와 '지배와 피지배'로 이루어진 권력관계를 해체했고 기계화∙자동화를 산업에 도입해 (지엽적인 의미에서의) 탈노동화와 같은 「혁명」을 통해 발전적인 변화를 추구해 왔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이기(利器)는 저러한 변화에서 비롯한 것이고, 우리는 또 다른 이기를 추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이전에 선행된 변화들이 긍정적인 유산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현재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변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발전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변화들 속에 내재되어 있던 병폐들은 현재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다. 변화는 대상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모순을 원인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의 변화는 정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노트 중) ■ 이승종
Vol.20150817f | 어제, 변화, 치유, 관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