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821_금요일_05:00pm
기획,전시감독 / 김복영
관람료 / 대인 3,000원 / 소인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GANA ART 서울 종로구 평창 30길 28 가나아트센터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1.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사후 3년이 되던 해에 출간된 책(Paris: Gallimard, 1964)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이라는 책의 주제어는 당시로서는 아주 이색적이어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건 이 책이 사물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로 과감하게 나누고 있다는 데서다. 이 주제어가 어떤 뜻에서 어떠한 의도로 쓰여졌는지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덴마크의 닐스 보어(1885~1962)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원자의 내부 세계를 가시화하고자 했던 걸로 증빙할 수 있다. 서두에 이 말을 하는 건 한국 미술의 시원(始原)사상이 바로 여백의 세계를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과 한국 현대미술 또한 그 특유의 뿌리를 이러한 여백 사상에 두고 오늘의 시대를 맞고 있다는 걸 강조하고 이와 연계선상에서 이번 가나아트 기획전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1』을 부각시키려는 데 있다. (...) 이 기획의 참 뜻은 이러하다. 즉 우리 작가들이 화면과 입체를 물질로 채웠으되 그 결과는 물성을 넘어 텅빈 여백을 빌려 물성을 커버함으로써,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칭하는 기호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이를 '여백의 세계'라는 말로 지칭하고자 하는 건 요컨대 그들이 평면과 입체를 보이지 않는 여백의 메아리를 담아내는 장소로 삼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
이렇게 말하는 건 이번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1』에 참가하는 이승조(1941~1990), 박석원(1942~), 이강소(1943~), 김인겸(1945~), 오수환(1946~), 김태호(1948~), 박영남(1949~)은 물론 이들과 함께했던 선대와 동배, 후대에 이르는 일군의 작가들의 눈과 정신을 이에 의해 이해하고 포용하고자 함이다. 그들은 그들의 화면과 입체를 물질로 채우면서도 물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러하리라는 걸 열렬히 시연(試演)해왔다. (...) 이를 바르고 정확히 알리고자 필자는 이른바 '경계논리'를 제기한다. 이에 의해, 우리 작가들이 이룩한 여백의 세계가 전혀 독자적이라는 걸 입증코자 한다. 경계논리(logic of marginal mete)는 우리 미술의 눈과 정신을 다룸에 있어 메를로-퐁티가 그랬던 것처럼 작품과 타자 간의 관계에 주목하기보다는 우리 작가들이 응시하는 세계를 작품으로 정위시키는 그들 특유의 여백의 조형방식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보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럼으로써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하나의 풀(pool)로 다룬다. 그런데서 우리 현대미술의 특이성이 연유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순서를 가려 말하기 위해, 나는 우리나라 건국 초기 시절의 고고학자 김원용 선생의 잘 알려진 경구를 인용하고 이어서 고고미술사가 고유섭 선생의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같은 의미 있는 몇 마디를 곁들이고자 한다. "한국 미술에는 여러 양식이 있으나 그 바탕에 흐르는 하나의 한국적 특성이 있으니 그것을 우리는 자연주의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자연주의로 돌아가는 현상을 반복한다. 이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평화롭고 인간미가 있으며 가식이 없다는 데 특징이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미술이 상징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이어서 우리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솔직히 말해, 나는 왜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한국적 자연주의가 계속해서 이어져 왔는지 그 이유를 꼭 집어서 말할 수가 없다." (김원용, 『한국미술사』, 범문사, 1968, 4~5 쪽에서 번안)
2. 지나간 시절 우리 선대학자의 언급을 상기시키는 건 우리나라 1970~8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 세대의 한국미술은 어쩌면 이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다. 나는 이를 오늘의 관점에서 재접근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우리세대의 키워드로 삼아 세월은 가도 우리의 문화예술의 형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자 한다. 『물성을 넘어, 여백의 세계를 찾아서―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1』은 이를 입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획에서 필자가 제기하는 경계논리는 이에 의해 김원용이 "솔직히 말해, 나는 왜 한국의 자연주의가 면면히 이어져 왔는지 그 이유를 꼭 집어서 말할 수 없다"는 데 대한 명징한 답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경계'(境界)라는 말을 좀 더 정치하게 사용하기로 한다. (...) ● 이를 김원용의 의도와 무의도, 그리고 고유섭이 우리 미술의 특질로서 일찍이 제시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과 같은 일견 모순일 듯싶으나 우리 미술의 정곡을 찌르는 언급에 적용해보자. 그들이 우리 미술을 이해했던 건 크게 말해 물질로써 작위(作爲)하는 경계와 그 너머의 여백을 뜻하는 무위(無爲)의 경계를 빌려서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들이 이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것들의 양 경계, 자세히는 그 둘의 상호지연(相互遲延)으로 언급한다는 데 있다. 자세히는 두 경계의 연기(緣起)를 말하는 데 있다. 그들이야말로, 여백이라는 보이는 것이 없는 여백의 경계의 이쪽과 저쪽의 완충지역에서 우리 미술의 특성을 찾으려 했던 통찰력의 소유자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원용은 우리 미술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걸 일러 당당하고 완벽하고 존대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좀 어정쩡한 주석을 붙여 놓았다. 이는 분명히 명쾌한 지적은 아닐 듯싶다. 그 대신 이에 상응한 제작하는 마음이 순수하다든지 부드럽고 평화롭다든지, 모든 걸 자연으로 돌리려 했다든지 하는 다소 소극적인 면을 에둘러 말하는 한계를 보였다. 반면 고유섭은 두 경계의 상호지연에서 우리 미술의 탈(脫)형식성의 연원을 찾는데 탁견을 보였다. 일괄해서 이들은 모두 우리 미술의 형성원리로서 의도와 무의도, 계획과 무계획의 두 측면을 인정하면서 이것들의 경계 너머라는 상호지연과 연기의 경계에 우리 미술이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우리 문화예술의 장점이자 '멋'으로 규정한다. (...)
3. (...) 여기서 중요한 건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문화적 차이가 예외 없이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이야 말로 우리 시대의 거대 담론이 아닐 수 없다. 서구 현대미술의 그것과 우리 현대미술의 근본적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원천이 무엇인지는 한국의 시원사상으로 돌아가 다시 물어야 한다. 이를 앞서 작위와 무위의 상호지연과 연기라 하였지만 이보다는 무와 총체성의 경계가 우리 미술을 정의해 줄 차별적 세계관의 핵심이라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한국 미술이 갖는 세계 이해의 시원(始原) 세계관을 다시 보아야 한다. 여기에 변별력을 총동원해서 그 진원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고기, 古記」로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보이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서구의 근대주의적 전체성의 논리(Holism)와는 다른, 전체에 앞서 유와 무를 합한 총체성(Totality)의 논리를 강조하는 우리 특유의 세계관을 만날 수 있다. 이를 필자의 경계논리로 번안하면 무를 유와 동급의 성분요소로 간주하고 이것들을 합쳐 총체성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총체성에 대한 우리의 시원적 이해는 서구의 전체성의 이해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별적이다. 서구의 근대주의가 신봉한 전체성은 보이는 유(有)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이것들을 보이는 것의 전체로 간주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의 시원세계의 경계논리는 유와 무를 하나의 풀(pool) 멤버로 정의한다. 이것들을 무(無)와 총체성(總体性)으로 별도의 이름으로 다루고 정의한다. 요컨대 총체성의 정의부터가 서구의 전체성의 정의와 다르다. 우리의 총체성은 존재하는 유와 무를 하나로 아우를 뿐 아니라, 무를 무위의 원인이자 총체성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 우리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은 크게 말해 물성을 여백의 경계에 둠으로써 공간과 시간의 사건들을 유발시킨다. 우리 작가들은 이 때문에 작업에 있어서도 무와 총체성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우리 미술은 무와 총체성을 원인으로 해서 작동된다. (...)
4.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갖는 우리 현대미술이 당대의 공간과 시간을 경유해서 사회 속에서 그들의 양식을 창출하는 절차를 언급한다. 그 최초의 단서는 1960~70년대의 운동들에서 볼 수 있는 사물로의 회귀운동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을 당시에 팽배했던 물질주의의 작위적 근친관계는 물론 이와 모순대타(矛盾對他)적 무위의 연기로 이해해야 한다. 전자부터 말하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60년대 초 5.16을 통해 집권한 군부집단이 제3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일련의 사회의 물질화가 시작되었다는 걸 염두에 두자. 산업화과정, 그리고 이를 효율화하려는 산업화 통치체제는 한편으로는 국민의 집단적 물질의식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 개인의 원자화, 익명화, 소외라는 타자지향성을 촉진하였다. 1970~80년대를 여과하면서 한국 사회의 물질화는 우리가 신봉해 온 전통사회의 정신적 가치를 해체하였으며 사회조직의 거대화는 작가개인의 미소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하였다. 대체로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던 일련의 물질 의식화와 거대 체제화는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전복시키면서 삶의 의식을 무의 지평으로 몰아갔고 총체적으로 가치공동(空洞)화를 가져왔다. (...)
당연히 쁘띠부르주아와 작가의 주체의 미소화 간에는, 서구사회에서처럼 기존의 인식체계의 균열과 해체를 동반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화단의 경우, 국전을 중심으로 전근대적 보수주의가 재빨리 상부의 권위주의와 결탁하면서 쁘띠부르주아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였으나, 기층민으로서 하부구조에 머물렀던 현대작가들은 스스로 소외자로서의 의식을 마음에 각인해야 했다. 일단의 대학교육을 받은 현대미술의 엘리트들은 소외자로서의 의식을 배경으로, 바로 위의 쁘띠부르주아에 대해 별도의 「신 엘리트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상호 대타적 의식을 심화시켰다. ● 단독자로서의 개인이자 익명화된 존재로서 현대 작가들은 당시의 상부 쁘띠부르주아에 대해 스스로 「타자」임을 표방함으로써 상부의 권위주의 집단이 구가했던 「거대 주체」에 대항하는 한편, 자신들의 미소주체 내지는 주체의 익명화를 작품으로 연계시켰다. 박서보의 「허상시대」는 그 하나의 전구였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데서 「묘법시대」를 가져왔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타자의식」은 바로 그들의 소외자로서의 의식을 반증하는 것이자 그들의 눈과 정신을 김원용과 고유섭이 말하는 우리의 전통세계관으로 회귀시키는 계기를 낳았다. 평론가 이일은 당시 이를 가리켜 "우리 작가들이 사물을 보는 방식에 있어, 이를 서구의 미니멀리즘적 시선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시야에서 받아들였다"고 썼다. (...)
5. 당대를 이끌었던 이들의 언급을 빌리면, 타자의식과 무에 대한 인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당시의 화단을 둘러싼 「국전」과 「반(反)국전」의 의식 패러다임의 선별준거였음이 드러난다. 이야말로 우리의 근대사가 경험한 최초의 사회적 지형도라 할 수 있다. 이들 간의 상호 대타적 행보는 곧 당시 한국의 지식사회 전체의 단면을 말해준다. 소위 군부집단의 권위주의에 편승했던 쁘띠부르주아 지식층과 소외자를 대변했던 대타적 신 엘리트주의 지식층의 대립은 우리의 1970~80년대의 지식⋅문화⋅예술의 구도를 총체적으로 규정했다. 이로부터 우리의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의 밈풀(meme pool, 리처드 도킨스)이 구축되는 데 무려 한 세대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여기서 당대 우리 작가들이 어찌해서 물성을 뛰어넘고자 했는지는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건 타자의식을 자아의식과 합일하는 과정에서 내가 '나'이면서 '나'가 아니라는 부정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물성과 자신의 타자의식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물성의 부재와 동일시했던 걸로 설명된다. 정창섭의 물아합일(物我合一)은 이렇게 설명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1970년대 들어 한지(韓紙)와 만났는데 그 때 느낌은 요걸 한 번 써보자가 아니라 내가 한지와 만났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한지로 다가감을 느꼈다. 나의 작업은 종이의 특성을 이용한 인위적 조형이 아니다. 오히려 종이의 물(物)적 실존과 내가 하나가 되어 물(物)과 아(我)의 일원적 합일을 시도한 데서 이루어졌다." (『충청일보』, 1986.4.26, 기고문에서 번안)
(...) 여기에 추가할 건 주체의 미소화와 죽음은 주체가 무화(無化)되는 경계에 이르고 여기서 비로소 사물들을 여백의 근접선에서 그리고 무와 총체성의 맥락으로 인식하는데 이르렀다. (...) 앞서 김원용과 고유섭이 말하는 영원한 자연주의가 현대미술에 등장하는 주인(主因)이 이렇게 해서 우리 현대미술 30년사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여백의 경계가 현대미술에서 재부상했던 게 이렇게 설명된다. 1960년대 초 이승택이 연기⋅바람⋅불을 통해서 사물에의 회귀를 시도했던 것이나 곽인식이 '돌을 깨트린 후 깨진 조각을 다시 붙여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했던 건'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선구적인 예의 일부였다. 이번 전시에 참가하는 7인의 작가들 역시 이와 연장선상에서 활동한 후세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물성을 넘어 여백의 경계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환기하는 보다 심화된 방법이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 김복영
Vol.20150814e | 물성을 넘어, 여백의 세계를 찾아서-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1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