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813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지평_김형관_박혜원_신은경_오윤석 윤석남_이피_임영주_정경심_주재환_차기율
오프닝 퍼포먼스 「인왕산 호랑이」 2015_0813_목요일_06:00pm_목진호 외 7명
점집 퍼포먼스 「사주를 봐드립니다」 전시기간 중 매주 토요일 02:00pm~05:00pm_신은경
전시연계 세미나 / 2015_0916_수요일_04: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서울메세나_우성아이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부암동 362-21번지) Tel. +82.(0)2.395.3222 www.zahamuseum.org
악마의 맷돌에 갈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감흥의 전시, 『용한 점집』 ● #1. "만사에 대해 그 고장의 신령에게 물어보라." (알렉산더 포프) ● #2. "들판은 '악마의 맷돌'의 아가리에서 쏟아져 나온 토사물, 즉 온갖 석탄 부스러기와 쓰레기더미에 묻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보수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자본주의 지지자들, 사회주의자들 할 것 없이 한결같이 산업혁명에서의 사회 상태는 그야말로 바닥 모를 인간 퇴락의 구렁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중에서)
전시 『용한 점집』(큐레이터 유정민)은 무엇보다도 부암동 언덕에 자리잡고 인왕산의 정기를 가득 받은 자하미술관의 터줏대감이 기뻐할 만한 전시이다. 인왕산은 '예족'의 토템이었던 호랑이 산신이 터줏대감인 고로 이 전시는 한바탕의 대감굿이라고 할 만하다. '대감굿'이란 터주, 즉 한 토지에 부착되어 자신의 신격을 한 차원 떨어뜨린 대감(Taigam, 토지신)이 본래가 없는 하늘이라는 지고의 신격인 텡그리(Tengri, 천신)로 다시 격상되는 굿 형식이다. 그러니까 호랑이 산신이 다시 천신의 신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남한에서 '씻김굿' 위주로 흘러가는 굿 형식에서 12마당 중에 하나의 마이너리티 굿처럼 되어 있거나 드물게 하는 굿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대감굿' 형식이야말로 주어진 문화의 정체되어 있는 조건을 뒤흔들어 한 사회의 건강한 교란을 만드는 트릭스터의 놀이이다. ● 동북아시아의 문화와 문화가 서로 사귀는 형식은 '대감굿'이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끼리 인과적인 대화 형식으로는 불가능해도 한 차원 높은 신격들끼리는 비인과적으로 "감통(感通)" 즉 느껴서 한 방에 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1984년 도쿄 초월(草月) 회관에서 펼쳐진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의 소위 「코요테 콘서트」는 그런 "감통"의 형식으로 진행된 '대감굿'이 무엇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준 바 있다. 달과 달빛에 해당하는 음악들을 덩덩그리 피아노로 연주하며 마치 몽골 초원의 쓸쓸한 정취를 맛보게 할 때, 보이스의 늑대 울음소리가 그 사운드스케이프 위로 울려버치는 것이다. 마치 달을 뛰어넘는 선회의 춤을 보여주는 것처럼, 흑판에는 '뮤즈 부호(Muse code)'를 가득 찍어놓고서. ● "감통"이란 비인과적으로 문득 이심전심 연결되어 버리는 사태인데, 여기에는 호랑이 발도 필요하다. 김형관 작가와 신은경 작가가 설치한 사방치기 놀이는 바로 호랑이 발을 끼고 뜀뛰기 하는 동안, 어느 순간 호랑이 자체로 변신하는(!) 놀이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놀았던 이 놀이의 금 그어진 공간 속에 몸을 던지는 동안, 마치 『삼국유사』 신도징 에피소드에 나오듯이 "벽에 걸린 호랑이 가죽을 입고 문득 호랑이로 변하여" 인왕산 숲 속으로 내달리기 직전의 임계점까지 치달아야 마땅하다. 자하미술관 바깥에 텐트를 설치하여 신은경 작가가 '용한 점집'의 점 보는 퍼포먼스를 진행한 것과 아울러 이 호랑이 산신-되기는 서로 맞닿아 있다. 그리고 벽에 걸린 비디오 영상 「뉴타운 순교」는 마치 호랑이 산신이 된 것 같은, 신인합일이 된 것 같은 의식 상태, 즉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의 무지막지하고 랜덤한 걸음과 그 걸음 걸음마다 확확 변하고 핸드헬드의 흔들림까지 혼곤한 의식의 반영처럼 느껴지는 안팎풍경이 여과없이 진행된다. 이제 호랑이 산신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 인왕산 준령을 타고!
윤석남 작가는 그 신인합일의 '강신무'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슴에서 대양과도 같은 물들이 콸콸 쏟아져 나온다고, 그 물들이 생명의 새로운 원천으로 작용한다고, 가느다란 푸른 철사를 목각상의 가슴 부위와 연결해두었다. 「물」이라는 작품의 이 간결한 표현은 자기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신과 함께 가는 존재의 모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전인격을 투신하는" 희생의 결과는 만사와 만유를 먹여살리는 생명수의 공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죽은 다음, 저승에 가서 병든 아비와 뭇 사람들, 그리고 훗사람들을 위하여 생명의 물을 떠다주는 바리데기처럼. 여기에는 고뇌가 서리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목각상의 눈길, 그 처연하면서도 평면적이라 어디든 따라오는 시선 아래로 툭 눈길을 돌리면, 거기 못이 가득 박힌 밤송이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밤송이는 선가에서 말하는 "목구멍 속의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이를 삼킬 것인가 뱉을 것인가" 라는 화두와 다름없다. "감흥"을 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뭇 사람들, 뭇 생명들을 위한 것이라, 겪는 자의 격렬한 고뇌와 존재론적 흔들림을 현위치로서 깔고 있다. 윤석남 작가의 이 두 작품은 무연하면서도 처연하고 담담하면서도 격렬한 정동(affect)으로 가득 차 있어서 좋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눈 앞에는 김지평 작가가 「묘-향」이란 작품에서 제안하는 '묘향산'의 비전이 떠올라 온다. '묘향산'의 다른 이름 중에 하나가 '봉래산'이므로 '묘향산'은 동북아시아의 신비로운 삼신산(三神山) 중에 하나이다. 평안도라는 검은 대륙의 한(恨)을 기본적으로 깔고서 그 위에 붉은 색 계열의 판타지를 입힌 이 비전은 출렁거리는 바다와 높은 산의 리듬이 반복되는 불교의 수미산 체제를 염두에 두면서도 1) 비로봉 2) 향로봉 이라는 두 개의 감각적 원천을 내밀하게 보여준다. 첫째, 비로봉은 '빛의 부처' 비로자나불을 상징하는 봉우리로서 '무량광명 무량수명' 즉 "무한히 뻗어가는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암시한다. 둘째, 향로봉은 '향기 나는 보살'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봉우리로서 '운기화생 연화화생' 즉 "구름 같은 향의 기운으로, 연꽃 같은 향의 기운으로 뭇 생명들을 살려내는 세계"를 암시한다. 이것은 『용한 점집』의 생명서판처럼 우리 눈 앞에 파노라마치기 시작한다. 샤머니즘적인 배색들, 보색대비들이 호랑이 산신-되기 이후, 우리가 어디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이념적 지표를 제시한다고 할까. 우리는 인왕산에서 바야흐로 '묘향산'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바캉스라도 떠나야 할 법이다. ● 이 김지평 작가의 매크로한 비전 곁에는 주재환 작가의 해학적인 작품이 놓여 있다. 고장난 시계를 가져다두고 그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고장난 시계, 하루 두 번 맞는다. 고장난 인간, 하루 몇 번 맞을까. 용한 점집에 물어보자." 시계가 멈추면, 24시간 체제에서 두 번은 그 시간대를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것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고장난 인간에게도 그런 요행이 기다리고 있을까. 주재환 작가는 묻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2008년 세계 금융 대위기 이후, 해체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비극적인 것이 이제는 인간을 고장내는 정도가 아니라 '악마의 맷돌'에 갈아버리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몸을 갈면서 운행하는 맷돌의 우주 속에 우리는 살고 있고, 『용한 점집』은 바로 그러한 우주를 공격하고 있다. 주재환 작가는 "두 번 맞을까" 라고 눙치는데, 여기에는 1) 용하다 2) 맞는다(hit) 라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세상은 맷돌 아래 '가루인간'을 주로 만들고 있는데, 그들은 인과관계라는 뻔한 영역에 처해서 운명이나 비합리성을 이해하는 이성 같은 영역은 미신으로 치부한다. 정신분석 역시 사회적 표피 구조에 매몰되어 삶의 비의라든가 우주법칙 같은 것은 도외시한다.
이피 작가는 이처럼 고장난 세계, 가루인간의 세계에도 여전히 "감흥", "감통"을 통해 '묘향산'으로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피 작가는 '악마의 맷돌'에 갈린 사람들에게 아직도 몸이라는 무의식으로 꿈꾸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8개의 다리로 분리되었지만, 몸통과 다리들은 "행복하다"는 듯이 분홍 찰흙의 신기한 표현적 권능과 함께 새로운 평행우주, 일종의 거울우주를 나타낸다. 마치 메소포타미아의 티아마트 여신이나 중국의 반고처럼 하늘과 땅을 다 덮어버릴 기세이다. 인간의 몸은 다시 한번 터줏대감의 영역에서 점프하여 하늘신의 영역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마음에는 수많은 서랍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피 작가의 다른 작품 「하늘 달동네 여자」에는 각진 몸체의 거대한 외양 틈과 틈 사이로 서랍들이 암약하고 있다. 누구나 그 서랍들을 눈썰미 좋게 발견하면, 그 서랍을 열어 내부에 있는 일기장을 볼 수도 있고, 보석상자를 열 수도 있다. 라캉 정신분석이 말하는 것과 달리 동북아시아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저 심층에 있는 무의식은 '의식을 반영하는 트라우마'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무의식'이다. 이처럼 이피 작가는 "새로운 것을 몸에 기반한 상상력과 놀이정신으로 만들 수 있다" 라는 드림타임(dreamtime, 에보리진족의 세계관으로서 무한집합체를 만들 수 있는 꿈-현실이라는 매트릭스)의 세계를 제안한다. 이 작가의 작품 세계는 오랫동안 마음이 하늘처럼 환하게 열리면서 일관되게 이 자유롭게 해방감 넘치는 드림타임의 표현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내왔다. ● 정경심 작가의 「조율이시 홍동백서」는 인왕산 호랑이 산신이 아직까지 터줏대감의 탐욕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감안한 제삿상이다. "우리 대감의 거동을 봐라, 어떤 대감이 내 대감이냐, 욕심도 많고 탐심도 많은 내 대감!" 하면서 대감을 불러 한 상 그윽하게 내드리는데, 이 작품 속의 음식들이 그득그득도 하거만, 터줏대감의 음성은 시종 툴툴거리기만 한다. "아니, 저게 무어냐, 저게 뭐야. 앞다리 선각 뒷다리 후각에 양짓머리 걸안주는 어딜 가고, 저게 다 뭐야."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악마의 맷돌'에 갈려서 인간들의 삶이 말이 아닙니다. 작은 마음을 큰 마음으로 생각하시고 상을 받아주시옵소서!" 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 제삿상이 예사 제삿상이 아니다. 인왕산을 마주하고 차려진 것. 전시 큐레이팅이 아주 재미있다. 동선과 작품의 배치가 "해학 유모리스트"(시인 정지용) 저리가라 할 정도이다. 그리고 의미심장하다.
오윤석 작가의 「Hidden Memories-Herb」는 주역의 괘사를 지난한 반복의 수작업으로 일일이 그려넣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샤먼 자신을 위한 치유 목적의 '진적굿'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치유한다는 것은 자기 신세를 돌아봄인 동시에 신세(身世), 즉 "몸이 처한 세계"의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일종의 거친 삶의 파고를 받아들이는 운명애의 서판이라고 할까. 이제 '운명' 같은 단어도 고색창연하게 느껴지는 21세기이다. 더 이상 자유의지로써 외길의 운명을 선택하는 방식,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방식은 잊혀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석 작가의 이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잠재하고 내포한 의미는 그러한 지난한 시간 동안의 작업 과정이 곧 "감흥"을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치유, 진정한 '진적굿'은 신세한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넋두리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감흥"의 가락, 장단, 무늬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와 남의 운명이 단자(單子)의 형태로 새겨진 '점'을 상대할 때의 태도이기도 하다. ● 차기율 작가의 「21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는 우리의 아발론, 이상향이기도 한 '묘향산'으로 떠나는 방주의 구축이자 진수식이며, 그 모든 것이 의식과 무의식의 직물짜기에서 비롯된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호랑이 발을 하고 인왕산을 한달음에 솟구쳐 올라 '묘향산'으로 향했지만, 그 '묘향산'이 실재한다면? 그리하여 그 산정에 오른다면? 가장 무서운 것이 유토피아의 현실화이다. 유토피아는 도래하지 않는다. 도래하지 않는 것이 현실화되면, 그것은 디스토피아가 된다. 디스토피아는 일상이다. 일상은 도래한 첨점으로서 무(無)이다. 과거라는 원추형 기억과 미래라는 원추형 시간 사이에 이 첨점이자 무(無)는 검은 먹구름의 자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차기율 작가가 보여주는 이 먹구름, 즉 현(玄)하고 현(玄)한 구름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사슬세우기를 할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변성의식 상태의 착각에 지나지 않고, 그 먹구름의 환(幻)을 폭로하는 마그리트식의 방주가 내리꽂힐 것이다. 아니다. 구름기운의 잠재력과 방주의 현실화는 서로 어깨를 겯고 항상 동시성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것들은 동시적 영역(synchronous parts)이다.
#3. "옛날 옛적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천차만별이어서 그 사람 사이 제 정으로 언약하고 다니며 사람 노릇 하기란 참으로 따분한 일이라, 그 어디만큼 서 그만 작파해 버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와 버린 두 사내가 있었습니다. 한 사내의 이름은 '기회 보아서'고, 또 한 사내의 이름은 '도통이나 해서'였습니다. '기회 보아서'는 산의 남쪽 모롱이에 초막을 치고 살고, '도통이나 해서'는 산의 북쪽 동굴 속에 자리 잡아 지내면서, 가끔 어쩌다가 한 번씩 서로 찾아 만났는데, 그 만나는 약속 시간을 정하는 일까지도 그들은 이미 그들 본위로 하는 것은 깡그리 작파해 버리고, 수풀에 부는 바람이 그걸 정하게 맡겨 버렸습니다." (서정주, 시 「풍편의 소식」 중에서) ●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쓰지만, 그것은 옛날의 '풍편(風便)' 즉 바람편지 대용이다. 성능은 바람편지 쪽이 훨씬 우월하며, 비매개적이다. 매체를 동반하는 것은 열등한 것이며, 정신과 정신 사이의 텔레-파시(tele-pathy, 원거리 감응) 쪽이 '오래된 미래'로서 초현대적이다. 예술의 방향이 이처럼 샤머니즘의 사상 쪽으로 옮겨가는 것은 현재 문명의 위기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4만년의 현생인류, 1750년 이후 260년의 시간 동안 문명은 지구의 건강을 해쳐버렸고, 대양과 숲은 오염되고 고갈되어버렸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면서 생명적 정감 있는 에너지의 흐름을 끊어놓아 버렸다. 기계론의 세계관은 극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그 에너지의 흐름을 촉감할 수 있는, 그리하여 "감흥"하고 "감통"할 수 있는 감각 이상의 느낌이 돌아오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예술가라는 이름의 샤먼이 필요한 것이다.
시 「풍편의 소식」에서 '도통이나 해서'라는 사내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아름다운 바람이 북녘에서 불어와서 산골짜기 수풀의 나뭇잎들을 남쪽으로 아주 이쁘게 굽히면서 파다거리거던, 여보게, 「기회 보아서!」자네가 보고 싶어 내가 자네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줄로 알게.』 이것은 「도통이나 해서」가 한 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기회 보아서'라는 친구는 이렇게 대꾸한다. "『아주 썩 좋은 남풍(南風)이 불어서 산골짜기의 나뭇잎들을 북쪽으로 멋들어지게 굽히며 살랑거리거던 그건 또 자네를 만나고 싶어 가는 신호(信號)니, 여보게 「도통이나 해서!」그때는 자네가 그 어디쯤 마중나와서 있어도 좋으이.』 이것은 「기회 보아서!」의 말이었습니다." ● 2층 전시장에서 만나는 박혜원 작가의 「Shelter –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하는 것들」은 이처럼 '기회 보아서'와 '도통이나 해서'가 즐겨하는 텔레-파시의 기호, 즉 낌새, 기척, 징후들로 충만한 오브제와 거울 그리고 그림들이 가득하다. 붉은 카페트가 깔려 있는 그 공간은 누구나 샤머니즘의 서블라임한 느낌을 맛볼 수 있고, 동시에 공식적인 타입으로 "이것이 샤머니즘이다!"라고 선언하는 데까지 이른다. 가면들, 무구들, 사물들은 제각각 '바람편지'를 쓰고 있다. 작은 그 무엇이든 일상으로부터 떠나게 하여, 방주를 그리워하게 하든 제삿상을 차리게 하든 어떤 태도를 조형한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의 수용이 필요하고, 『용한 점집』이 단순히 "신통방통한 점" "용한 점"에 의존하는 전시가 아님을 반증한다.
전시 『용한 점집』에는 이런 식의 "감흥", "감통"의 세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감생(感生)"의 창출 형식이 필요하다. 임영주 작가의 「삼위일체, 영롱한 소리를 듣는 밤」은 인왕산 대감굿이 하늘과 땅 사이의 '사슬 세우기'가 일어난 후, 관람객들의 몸과 무의식도 어느덧 가랑비 옷 젖듯 그 판의 기운에 젖어드는 공간을 연출한다. 소리와 빛은 지금까지 관찰자였던 사람들을 참여자로 슬그머니 이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새 '무감서기' 판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샤먼이 아니지만, 샤먼의 권능에 힘입어 "감흥", "감통"이 남의 얘기가 아닌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신격들이 대상화된 것, 물신화된 것은 속상한 일이지만, 그 차원은 다시 탈마법화의 '미신'을 벗고 탈계몽화되는 것이다. 과잉계몽화되어 이미 '냉소적 이성' 상태에 도달한 인간이 곧 '악마의 맷돌'에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루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인간에게 신과의 터치를 통해 다시 감흥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다. 이렇게 된 후에야 「三」에서 우리는 어떻게 "감생"의 코드가 가능할지 탐색하러 접어든다. 석 삼(三)이 일필휘지의 단순한 획이 아니라 그 안에 꿈틀거리는 애벌레 주체들이 한도 끝도 없이 징그러울 만큼 생명감을 앙양시키며 동시에 중첩되어 이글거리고 있는가를 클로즈업으로 확인하게 된다. 원초적인 생명의 이물감은 이처럼 양가적인 정서를 낳는데, 그에 아랑곳없이 임영주 작가는 '사랑' '믿음' '신의'를 벽에 내건다. 야생적 에너지 흐름의 인간화라고 할까. 그 아래에는 두 개의 두꺼운 방석 위에 작은 함이 놓여 있다. 아마도 그 안에 "감생"을 낳는 비밀지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임영주 작가는 「삼위일체, 영롱한 소리를 듣는 밤」 「三」 등의 작품으로 비인과적인 힘, 출처를 알 수 없이 편재해 있는 힘, 그리고 신성성의 힘이 어떻게 부유하고 공간을 점유하는지, 분위기 속에 새로운 느낌의 생성을 낳는지를 유력하게 체험시켜준다. 다소 섬뜩하면서도 친절한 분위기는 샤머니즘의 오리지널에 가깝다.
『용한 점집』은 자하미술관이 자리잡은 지리-철학(geo-philosophy)를 극한으로 살려서 치른 대감굿 형식의 전시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왕산은 살아있다!" 라는 선언이다. 전시 내용은 거의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스토리텔링 구조를 갖고 있으며, "감흥"의 수위 역시 상승곡선을 긋는다. 마치 부석사 무량수전의 가람배치가 산의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면서 상승곡선을 긋듯이 이 전시의 내적인 리듬 역시 경사진 면을 타고 오른다. ● 우리는 계몽주의의 신민으로서 더 이상 비인과적 연결 상태를 믿지 않는 족속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전능한 작인의 힘을 무의식적으로는 허락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이면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서 신년 운세를 보고 자식의 대학 당락 여부를 묻는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가 작동한다는 것, 우주적인 힘의 단단한 장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는 형태로 믿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문화적인 형식으로서 믿지 않지만, 믿고 있다"라는 것을 뒤집어서 "실질적인 작동으로서 믿고 있지만, 문화적인 형식으로는 믿지 않는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용한 점집』은 이러한 분열증적 조건 속에서 차츰 형해화되어 가는 마음(mind)의 감흥 형식을 하나의 시대적 과제로서 제안하고 있다. ■ 김남수
□ 전시연계 세미나 / 2015_0916_수요일_04:00pm 1부: 16:00-17:00 _ 샤머니즘의 원리와 구조/ 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2부: 17:10-18:30 _ 비인과적 연결원리로서 동시성 혹은 점 / 김남수 (안무평론가) + 김형관, 신은경, 임영주, 이피 (참여작가) 18:40-19:00 _ Q&A
Vol.20150813e | 용한점집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