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817c | 배정문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5_0724_금요일_05:00pm
1전시실 프로젝트展 2
후원 / 청주시
관람료 / 문의문화재단지 입장객에 한해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DAECHEONGHO ART MUSEUM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제1전시실 Tel. +82.43.201.0911 museum.cheongju.go.kr
초창기의 대청호미술관 전시실 용도는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로 구분되었고, 그 중 상설전시실의 기능을 담당하기 위한 공간이 1전시실이었다. 하지만 동일한 전시공간의 구성과 낮은 천정의 전시실 구성은 전시 작품을 돋보이기보다 공간속에서 침전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대청호미술관은 2014년 가을, 10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전시를 어머니 품처럼 받아준 미술관 1전시실의 기존 구조물을 철거하여 전시작품의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했다. 1전시실 공간의 해체는 대청호미술관의 시간과 역사, 기록, 흔적들을 상징하며, 화이트큐브의 벗어남과 동시에 전시공간에 대한 정체성을 제시하기 위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2015년 진행되는 1전시실 프로젝트는 여행이라는 전시주제와 함께 특성화된 공간으로 제시하기 위한 시도이며, 권준호 작가의 『잠수하는 갈매기』에 이어 1전시실의 공간 구조를 고려하여 제안된 배정문 작가의 『내세로의 여행』展으로 이어진다. ● 『내세로의 여행』전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근본으로 부조리한 사회 현실로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작품을 만드는 일이 개인의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대부분의 경우처럼 배정문은 인간 내면 무의식적 단면들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단순화된 사물의 변형과 사유 과정을 통해 새로운 조형 질서를 부여해 왔다. 배정문의 표현방식은 일상적인 오브제들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중성적인 대상으로 재구성되며, 이렇게 변경된 오브제들은 작가가 전달하고자하는 새로운 의미를 품기 위한 텍스트로 존재한다.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오브제들의 변형과 결합은 은유적인 관조와 명상의 기회를 제공하며 대청호미술관의 전시장 구조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배와 같이 다른 시공간으로 안내하고 있다. 전시는 미술관의 2015년 전시주제인 여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이동의 수단으로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3대의 배를 중심으로 그 위에 박힌 골프 핀은 화려한 만다라의 그것처럼, 혹은 작가가 말하는 꽃상여의 오방색을 기조로 하는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로 길게 늘어진 끈, 그리고 그 끝에 매달린 304개의 종들은 작은 움직임과 진동에도 울림을 발산하며, 고요한 강을 천천히 건네주듯 배를 움직이는 동력을 만들고 있는듯하다. ● 본 전시에서 작가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근본으로 하는 이전의 예술적 세계관을 직접적인 대상과 주제의식으로 예술적 행위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자신의 이야기를 벗어나 세상의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상대방에 대한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현재, 우리가 사회에서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과 꼭 기억하고 아픔을 나누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3대의 배 위에 얽혀있는 실과 304개의 종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이어주며 명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내세로의 여행 Death, a journey to Next Life"을 조형화한 이번 작품은 말 그대로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所望이며 인간이 꼭, 반드시 겪어야 할 불변의 진실眞實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세관은 사후死後의 세계에 관한 관념으로서, 넓은 의미에서 이에 수반되는 의례적(儀禮的) 행위를 포함한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되리라는 신념체계를 가리켜 내세라 이름한다. 따라서 내세관은 삶과 죽음이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하여 나는 내세란, 삶의 단절이 아닌 다른 형태와 차원으로의 전이이며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 나에게 내세來世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근거한 다른 차원의 삶에 대한 정념이며 신앙이나 신념을 넘어, 순수한 믿음과 바람이 깃들어 있다. 부당한 사고로 세상을 마감하는 수많은 생명 중에 지난 어느... 안타까운... 여행자들을 위해 꽃상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돕고 싶었다. ● 상여는 상례 때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규모에 따라 대여(大輿), 소여(小輿)라고도 한다. 나는 여러 번 전통적 상여의 장례행렬을 경험한 적이 있고 또 상여꾼으로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다녀보기도 하였다. 망자에 대한 예의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메고 상여가를 따라 부르며 걷는 길은 참으로 슬프고 허망하여 육신을 입은 나 스스로의 존재를 자꾸만 확인하게 되었다. ● 신자유주의의 중심,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무기력하게 맹목적 수용과 강요, 생산성과 효율성 중시되어 일방사회로의 퇴화가 불가피하게 된다. 분별력을 상실한 발전은 이미 우리 사회에 수많은 상처와 슬픔을 반복하고 있다. 허영과 허세가 장려되는 순응 중심의 사회에서 책임과 권한이 이원화되어 기형화되었고, 그로 인한 인식부재의 오늘날, 우리는 실로 참담한 사건과 사고에 중독되어 마치 그러한 사건과 사고의 재현을 통해 폭력과 슬픔의 실재를 다시금 실증하려는 양 무신경한 망각을 습관화 하고 있다, 무감각한 사회화는 은폐의 가면을 쓴 경직된 통제보다 불편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으로(트라우마)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내고 있다. 이러한 윤리적 신경계의 마비는 충격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학습되도록 요란한 발전관을 앞세워 우리안의 창조성 마비를 격려하고 그러한 권력들이 바쁜 숨을 쉬는 불행한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 『킹스맨』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 우수하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과거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변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문제는 무엇을 위해 변하는가이다. 권력인가 아름다움인가. 지혜로운 사람들은 후자를 추구한다. 권력은 타인의 시선이고 아름다움은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상품이 된 시대, 경박한 이쁨에 지나지 않는 식민화된 정신성을 미美라고 일컬는 몰지각의 사회에서 아름다움은 바름正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조작되고 길들여진 예쁨이 될 때 우리는 인간의 타고난 심리적 결함을 확인할 뿐이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셜리 케이건은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삶은 죽음의 다른 이면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의 삶은 지금 숨 쉬고 있는가?. ● 나는 304명의 죄 없는 영혼을 위해 고운 상여를 지어주고 싶었다. 잘못된 식민의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오늘날, 현대사회가 끊임없이 살을 찌워온 부정직, 불신뢰, 기만이 앞으로, 앞으로 거침없이 생각 없는 성장과 발전의 질주를 해갈 때 악취와 질병의 틈바구니에서 오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에 도취해온 우리들의 잘못은 아닌가? 우리 모두의 잘못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분명 우리 모두는 깊은 병에 걸려 있다. 죽음의 전제는 나에게도 다시금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며 정신운동의 폭을 확장하기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 「그날」 이상목 "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더욱 열심히 뛰겠다고 한다. 썩지 않는 시체에 항생제를 붓는다. 인간이 인격체가 아니라 방부제인 사회 절망할 기력조차 없다 "
나는 오늘날 우리들의 제도화된 감정과 화석화된 동정심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오직 해답과 결과 중심의 양적 팽창과 수치 위주의 편협한 설득강제의 시대성을 통해 이뤄진 신기루의 성장이 만들어낸 참담한 결과를 드러내고 싶었다. 왜? 가 질식된 사회, 창백한 문제의식마저도 자포자기된 질병의 공통체, 치밀한 대립과 충돌이 만들어낸 조급증 사회가 묵시적으로 약속한 합의를 받아들인 결과를, 우리들의 민낯을 반추해보고 싶었다. 자성과 성찰이 없는 생명과 익사된 윤리의 시대를 채운 권력지향의 사회, 성공과 지적 허영과 자기과시, 자기만족의 고치 안에서 영혼 없이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박제인간들 가득한 이 사회가 그들이 직면할 내세를 바라보고 자신의 숙명 앞에 고개 숙이기를 바랐다. ● 평민의 삶, 아름답기보다 진실하고자 했던, 주장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간절한 정의를 추구했던 생명들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눈뜬 채 가라앉았다. 천천히 고르게, 불편함을 감수하며 바르고 옳게 삶이 균형을 갖기 바랬을 그들이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었던 믿음을 지켜주지 못한 박제된 사회에서 슬픔과 애환, 분노, 증오마저도 쉽게 포장되고 가급적 빨리 잊혀지는 망각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슬프기는 한가? 존재가 의식의 토대가 되지 못하고 욕망이 의식을 지배하는 세상,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닌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우리 모두에게 일상화된 상처는 경조증輕躁症, hypomania 의 결과이며 수치심을 버린 낙천주의자들의 자상自傷이다. 인사불성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참된 인간성의 지향을 위한 연습과 수양이 부족한 현대사회, 학습된 습관을 기억화하여 존재성이 아닌 생명연장이 전부인 인공호흡의 시대에 살고 있다. 순응에 대한 성찰, 암기와 학습에 대한 적의, 편파적 의혹에 대한 공론,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 약자들을 위한 대변이 죄의 부메랑이 불가능한 사회는 가능한 것일가? 막다른 국가의 위상처럼 애처로운 것은 없다. 우리는 어느새 방편화된 과정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주책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사회나 국가를 정의하기 전에, 우리는 사회와 국가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 아는 것을 선행해야 한다. 사회와 국가가 생겨난 이유와 문제의식에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삶의 전제와 맥락을 모르게 된다. 이때 그의 삶은 그때, 그때의 사회악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미봉책으로 전락하고 앎(진실)이 아니라 허위의 정보만 소유한 채 스스로 지식인 놀이에 집중하게 된다. 과연 문제의식에 마음을 통째로 여는 사회는 내세에나 가능한 것일까? ● 나는 이러한 자성적 고민을 통해 304인의 검은 절망과 하얀 눈물과 빨간 아우성이 수장되던 그날의 슬픔을 태워줄 상여를 조형화하고자 하였다. 화려하게 채색된 희망과 배신이 전제된 무능한 믿음이 나의 가슴을 두껍게 칠 때, 나의 삶은 내세로의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아가 증발한 사회적 함의를 목도하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불렀을 수많은 이름이-아빠, 엄마, 친구, 딸, 선생님, 아들, 남편, 아내, 동료, 그리고 믿었을 국가...- 깊은 바다속으로 차갑게 수장될 때 어쩌면 우리는 이 오만한 사회를 부여잡고 물 위에 오래도록 떠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함께 더불어 공존해야 할 숙명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거나 은폐시키고 제도화된 슬픔을 마모시키는 기술을 숙련하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여성학자 정희진은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용서와 평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에 두려움을 느낀다. 2차 폭력의 주된 작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 17세기 뉴턴의 과학혁명 이후 인과론은 인간의 인식론에서 과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회는 '원인과 대책' 식의 사고에 익숙하고 마치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노력, 이것이 흔히 말하는 근대성의 폭력이다." ● 강제된 권력으로부터 온 수많은 사실에 대한 인식의 승리, 이것으로부터 진실은 자괴감에 빠져 부패되어 간다. 여성학자 정희진 "모든 이(平)가 사이좋은 상태(和)'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현실이 먼저고 규범은 부차적 문제여야 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악마성이다. 당위적인 윤리는 없다." ● 고통과 슬픔까지도 서열화 계량화해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성의 가면 뒤에 숨겨진 오만이 사회 변화에 대한 민중의 절망과 무관심을 작위적인 해석으로 도구화하여 사용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숨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분별없는 악마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당위적 삶 또한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타인과 자신의 죽음 앞에 깊은 무릎을 꿇고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들 속에 난무하는 온갖 언어와 실천의 표현은 도구적 목적을 숨긴 그 표현을 권력화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사유와 질문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를 통해 우리의 지적수준이 도덕성의 참됨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 ● 「사회학적상상력」 C라이트밀즈 "대개 지식의 수준은 노동의 시간과 질에 의해 결정된다. 사유 자체가 중노동이다. 획기적인 문제의식은 노동의 산물이다. 여기에 선한마음이 더해지면 인간의 기적이요, 공동체의 축복이다." ●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내세로의 여행을 시각화하는 작업은 정말... ...힘들었다. 밤마다 꿈은 수십 번씩 무의식을 익사시켰고 의식은 저승을 들락거렸다. 읽고 보는 모든 것으로부터 두렵고 미안한 눈물이 내 몸의 모든 곳에서 곪아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작업실 꽃상여의 실을 매고 쓰다듬으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삼키고 앉았었다. 지난 1년 지쳐 주저앉은 날이 많았다. 끊임없이 나의 관점과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반복해서 분해하고 조립해야 했다. 그런데, 수많은 죽음들 가운데 유독 그 304인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슬픔이 깊게 각인되어 마치 내가 그들의 경험을 함께 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가끔은 물에 부은 몸처럼 아침마다 부풀어 있기도 하였다. 하여, 힘들고 지칠 때 마다 그들의 죽음이 당면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천박한 집단지성을 용서하라고, 그리고 부디...제발 더 좋은 세상에 가 닿으라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담아 예쁘게 지은 상여를 입혀주고 싶었다. 하고도 나는 상여를 둘러맬 만용도 부려선 안되기에 하늘과 가까이 매달아 놓을 뿐이다. ■ 배정문
Vol.20150727d | 배정문展 / BAEJEONGMOON / 裵正文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