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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약품(주) 갤러리AG 신진작가 기획공모展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공휴일 휴관
갤러리 AG GALLERY AG 서울 영등포구 시흥대로 613(대림동 993-75번지) Tel. +82.2.3289.4399 www.galleryag.co.kr
AG 만다라 ● STUDIO 1750[(김영현, 손진희)+정혜숙]에 의해 기획된 『만-약』전의 주요 소재는 '약(藥)'이다. 그리고 그 약의 제조사는 안국약품(주)[Ahn-Gook Pharm. Co., Ltd., 安國藥品(株)]이다. 나라를 편하게 한다는 뜻의 '안국(AG)'은 아마도 '(전 국민의) 몸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변환되어 약품 제조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안국약품의 알약에 새겨진 영문 이니셜 'AG'는 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로 읽힌다. 흔희 전위주의로 부르는 이 말은 기존의 예술적 관념과 형식을 부정하는 혁신적 예술경향을 일컫는다. STUDIO 1750의 세 작가는 병든 몸을 치유해 온전한 몸의 조화를 이뤄내는 약의 효험에서 만다라적 상상을 피워 올렸고, AG에 와서는 그것을 창조적 예술로 전환시켰다. 약과 만다라와 AG와 창조적 예술이 논리적으로 만날 가능성은 제로(0)다. 하지만 바로 그 '논리적 제로'야 말로 새로운 예술이 터질 수 있는 가장 큰 상상력 씨알이 아니고 무엇일까? STUDIO 1750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작품들은 뜻의 상징이 깊고, 새로우며, 유쾌하고, 또한 전위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예술을 'AG 만다라'로 부르고 싶다.
김영현+손진희 ● 전시제목 '만-약'은 '만병통치약'에서 '병통치'를 지운 '만병통치약'의 '만-약'이지만 그렇다고 '만병(萬病:온갖 병)'과 '통치(痛治:한 가지 약으로 여러 병을 고침)'와 '약(藥:약제)'의 상징을 삭제한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김영현+손진희(이하 김손)는 '만-약'의 원래 개념이었던 '만병통치약'의 세 구조 [만병+통치+약]에서 작품을 위한 밑개념을 추출했다. 첫 번째는 온갖 병으로서의 '공포'다. 사람은 살면서 숱한 병을 앓는다. '병치레하다'라는 말은 '병을 앓아서 치러 내다'라는 뜻인데 오죽하면 '치러 내다'는 동사를 써야만 했을까? 그것은 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두 번째는 한 가지 약으로 여러 병을 고치는 '절대 질서'다. 만병통치약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은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할 만큼 강력한데, 오직 하나의 알로 온갖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절대적 믿음'에 다름 아니다. 세 번째는 약의 판타지다. 약이 우리 몸에서 번져나가는 방식과 효능을 일으키는 형식은 마치 약의 물성이 몸 내부에서 프랙탈(fractal)처럼 리듬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세 개의 밑개념을 풀어서 작품과 함께 살펴보자.
김손은 온갖 병의 '만병'에서 '공포'를 떠올렸다. 두렵고 무서운 말, 공포(恐怖). 그런데 그들은 이 말이 매우 중의적이라는 데에서 예술적 상상을 시작한다. 국가의 돈을 축내서 빚을 진 것도 공포(公逋)요, 관을 닦는 삼베 헝겊도 공포(功布)이고, 실탄 대신 쏘는 소리만 나게 만든 연습용 탄약도 공포(空包)다. 또 한옥을 지을 때 주도리창방과 장여(長舌) 사이에 끼어 들어가는 것도 공포(控包)다. 그러니까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을 공포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한옥 처마 밑의 공포에 주목했다. 공포 없이는 무거운 지붕이 기둥 위에서 안전할 수 없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불안을 안전으로 바꾸는 처마 밑의 공포(控包)는 두렵고 무서운 말 공포(恐怖)와 다르면서 비슷했다. 그들은 처마 밑에서 여러 개의 가짜 처마처럼 삐죽 튀어 나온 하앙의 장식성을 빌려와 작품을 제작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방향표지대다. 이것은 또 무슨 맥락일까? 우리가 온갖 병을 얻어서 두려움에 떤다는 것은 삶의 방향타를 상실한다는 것과 같다. 그들은 두려운 공포(恐怖)를 비틀어서 처마 밑 공포(栱包)를 만들고, 다시 또 그것을 비틀어서 하앙의 공포(栱包)로 표지대를 세웠는데 그 표지대의 혼돈이 두려운 공포로 돌아왔다. 예술적 상상은 이처럼 뜬금없고 변화무쌍해야 한다. ● 두 번째 상상이 된 '절대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옆으로 누운 '마하푸루샤(Mahapurusha)'의 상징을 먼저 살펴야 한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Eliade, 1907~1986)의 『세계종교사상사2:고타마 붓다에서부터 기독교의 승리까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미래의 붓다가 브라만교의 사원에 도착했을 때, 여러 신상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살의 발아래 꿇어 엎드려", "(그를 찬양하는) 찬가를 불렀다"라고도 한다. 아이는 아버지로부터 싯다르타(Siddhārtha; 완성된 목표)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이의 몸을 살펴본 예언자들은 '위대한 인간(Mahapurusha)'이 지니는 32개의 근본적 표지와 80개의 부차적 표지를 발견했고, 마침내 그가 전 세계의 지배자(Cakra-vartin; 「轉輪聖王」) 혹은 붓다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연로한 리쉬(rishi) 아시타는 히말라야에서 카필라바스투로 날아와 새로 태어난 아기를 만나보고, 그 아이가 장래에 붓다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그때까지 살아서 붓다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지음, 최종성 옮김,『세계종교사상사 2 : 고타마 붓다에서부터 기독교의 승리까지』, 서울 : 이학사, 2005, 103쪽) ● 마하푸루샤는 '위대한 인간(Mahapurusha)'을 뜻하는데, 곧 그는 32상 80종호의 절대적 질서로 표상화 된 부처 혹은 부처상이다. 부처의 사후 500년이 지난 뒤, 인도의 동쪽 나라들에서 지어진 사원(Buddhist temple, 寺刹)들은 모두 그 위대한 인간의 상을 절대적 질서로 개념화하여 가람(伽藍)을 배치한 것이다. 예컨대 그의 머리는 대웅전이요, 그의 발바닥은 일주문이다. 우리나라는 산세가 많아서 가람배치가 질서정연하기 힘들지만 본래 가람배치는 좌우대칭의 균형미가 핵심이다. 김손은 마하푸루샤의 형상 이미지 내부를 형형색색의 약으로 채웠다. 온갖 병들이 아니라 온갖 약들의 형형색색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절대적 완전미를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빛'으로 존재한다. 단전에서 전두(前頭)까지 그려져 있는 '륜(輪;수레바퀴;佛法)'을 보라! 저 환한 수레바퀴의 빛이 세계를 밝히는 지혜임을 전두의 세 번째 눈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김손은 안국약품의 토비콤 알약으로 지혜의 눈을 그렸다. ● 김손은 약성의 판타지와 프랙탈 이미지를 '약지도(藥地圖)'라고 말한다. 그들의 고백에 따르면, "약으로 그린 만병통치약지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할 법한 이 지도는 만다라를 닮은 남인도의 코람(kolam) 문양에서 왔다. 신의 축복을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환영의 의미를 담은 그림"이라 한다. 코람의 문양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중세 고딕 성당의 둥근 창과 스테인글라스의 색을 참조했고, 하나의 선에서 시작해 전체의 상을 그려 나가는 만다라의 표현방식도 찾아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리는 그림은 'AG 만다라'다. '륜(輪;수레바퀴;佛法)'이 완전한 지혜의 깨달음을 상징하듯이 만다라[曼茶(陀)羅, mandala]는 우주의 진리를 상징한다. 성당의 창은 성스러운 빛, 성령의 빛이다. 동학의 주문에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가 있다. 그 뜻은 이렇다. '지극한 기운이시어 내 안에서 지피소서. 바라옵건대 내 안에서 크게 지피소서. 한 얼을 내 안에 모시니 조화가 이루어졌나이다. 그 조화를 영원토록 잊지 않으니 만 가지 일이 깨우쳐 집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불-빛'의 씨알을 가지고 있다. 그 씨알을 터트려서 크게 밝혀야만 신명이 터지고 조화가 이뤄질 수 있다. 한 얼은 큰 빛의 하늘이요, 하늘님이요, 하느님이다. 그 한 얼을 모시고 조화가 이뤄져야 크게 깨닫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만다라다. 약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몸의 조화일 것이다. 마찬 가지로 이들이 그린 '약지도'는 그 조화의 만다라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만다라의 이미지에서 어쩌면 우리가 상실한 것들-축복, 환영, 지혜, 깨달음, 진리, 빛, 한 얼, 씨알, 신명-을 되돌려 줄 '약(보물)'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약지도를 보물지도라 생각하면서.
정혜숙 ● 전시주제이자 제목인 '만-약'은 '만병통치약'의 앞자와 끝자를 따서 만든 것이지만 그 사이의 '병통치'가 빠진 '만-약'은 '만약'도 되고 '만 가지 약'도 된다. 그것이 무엇으로 읽히든 상관없지만 '-'이 '병통치'라는 그러니까 '병을 치료한다'는 개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 STUDIO 1750의 작가들은 안국약품의 약에서 처음 그 상상의 불씨를 키웠으니까. 정혜숙은 "'만-약'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불가능한 허상 또는 이상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불가능한 허상'과 '이상'으로부터 '만-약'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어쩌면 예술이야말로 불가능한 허상일 수 있고 이상에 다가서려는 몸부림일 수 있다. 그가 '만-약'에서 추출한 뜻의 상징은 '개념', '효과', '동경'이다. ● '만-약'의 중간에 끼어 있는 사이(-)를 보자. 아니, '만'과 '약'도 빼버리자. 그러면 온전히 '-'만 남는다. 어떠한 말도 단어도 없는 '-'는 오직 개념으로만 해석될 것이다. -의 앞과 –의 뒤. 그가 첫 번째 뜻의 상징으로 추출한 '개념'은 바로 그것이다. 앞(前)과 뒤(後). 텍스트 작업으로 완성한 그의 작품은 '-'을 '|'로 세운 뒤 '|'의 앞과 뒤에 그야말로 '앞'이라는 말과 '뒤'라는 말을 다국적 언어로 적시해 놓는 것이다. 앞과 뒤라는 말의 '개념'은 약을 먹기 전과 약을 먹은 후일 수도 있고(그것은 매우 1차원 적인 해석일 것이다), 몸의 부조화(앞)와 몸의 조화(뒤), 아픔을 보는 마음(앞)과 아픔이 사라진 뒤의 마음(뒤), 존재(앞)와 부재(뒤), 있는 것(앞)과 없는 것(뒤), 나(앞)와 너(뒤)의 경우처럼 여러 양태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만-약'에서 '효과'를 추출한 것은 '약의 효능'이라는 측면에서 시작된 것 같다. 케이스가 있는 약의 경우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읽어보면 약의 여러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섞어 먹어서는 안 될 것들과 아이들을 위한 주의사항, 그리고 부작용에 대해 친절하게, 아주 친절하게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적어 놓았다. 그런데 그가 '효과'로 제시한 작품은 흥미롭게도 '약의 효능' 따위를 보여주는 무엇이 아니라 낡은 테이블이다. 그것도 정확히 테이블의 반이 깨끗하게 사포질 된 것이다. 어떤 나무가 테이블이 되는 것은 가능태인 질료(質料:나무)가 현실태인 형상(形相:테이블)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철학적 그것은 휠레(hylē 질료)가 에이도스(eidos, 形相)을 얻어 사물이 된 것을 뜻한다. 그는 에이도스의 상태에서 이미 시간이 오래 경과된 사물을 '획득'하여 이 작품을 제작했다. 획득된 상태의 에이도스는 이미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마치 휠레가 에이도스를 얻는 최초의 순간인 것처럼 테이블의 반에서 '시간성'을 지워버렸다. 진시황제는 죽지 않기 위해, 더 젊어지기 위해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하고자 했다. 설령 그런 약초가 있다고 할 손 삶의 시간성을 온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약의) '효과'라는 것은 무엇일까? 에이도스(형상)를 휠레(질료)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효과가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그가 우리에게 테이블을 보여주면서 묻는 화두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 정혜숙이 '만-약'에서 추출한 마지막 단어는 '동경'이다.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 오롯이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불안해하는 것, 憧憬. 그러므로 그가 생각한 '동경'은 '약(藥)'과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만약, 내가 ~을 할 수만 있다면"처럼 그가 생각한 '만-약'은 하나의 가정을 드러내는 말 '만약'을 생각한 것일 수 있으니까. '동경'을 드러내는 작품은 영상이고 그 영상이미지는 드넓은 바이칼 호수이다. 그는 바이칼호를 간절히 그리워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곳에 가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한 없이 푸른 바이칼호를 우리에게 펼쳐놓는다. 자, 그런데 이런 반전이 있을 수 있다. 바이칼호는 우리 민족의 시원이다. 북쪽을 향하게 하는 많은 문화적 상징들은 모두 이 바이칼호가 그 지향점이다. 솟대의 머리, 죽은 영혼을 부르는 초혼, 죽은 자의 머리. 그리고 바이칼호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모두 아드리아 해의 발칸반도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발칸이 '바이칼'이 되고 '밝달'이 되었다는 말의 소문은 거짓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동경, 그가 추출한 이 말은 '만'과 '약' 사이의 '-'조차도 무색하게 하는 그리움의 언어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오직 죽은 뒤에야 갈 수 있는 영혼의 고향이라고 우리 선조들은 믿고 또 믿었다. '약(藥)'이라는 말의 뜻을 보라. 풀 초(艸)와 즐거울 락(樂)이 아닌가. 풀의 약성은 원래 그 풀이 고유하게 가진 '독(毒)'이다. '약은 쓴다'는 것은 곧 풀의 독을 풀어서 우리 몸을 치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치유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동경이다.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김종길
Vol.20150719a | 만약_만병통치약-STUDIO 1750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