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2015_0717_금요일_05:00pm
2015홍티아트센터 멘토멘토링展
멘토,기획 / 김성우(아마도 예술공간 책임큐레이터)
관람시간 / 12:00pm~06:00pm
홍티아트센터 HONG-TI ART CENTER 부산 사하구 다산로 106번길 6(다대포동 1608번지) Tel. +82.51.263.8661~3 hongti.busanartspace.or.kr
시선의 이동, 외부에서 내부로 ● 개인적 트라우마와 같은 깊고 거대한 감정적 동요를 수반하는 과거의 상처나 기억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위해 예술창작의 행위를 치유의 수단으로써 삼는 일종의 수행적 행위는 과거에서부터 종종 있어왔다. 그리고 신지혜의 창작행위 역시 그러한 수행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러니까 7월17일 전시개막 당일로부터 정확히 일년 전 신지혜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 드셨다고 한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는 작가에게 동시대 현대미술의 국제적/ 지역적 주요 이슈에서 자신의 주변과 가족,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 눈을 돌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가족의 죽음은 신지혜에게 작가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구성원이자 개인으로서 그녀의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그리고 언젠가는 겪어야만 하는 가장 큰 사건중의 하나였고, 그것은 작가로서 그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슈보다도 더 크고 충격적인, 거대한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은 작가에게 동시대 예술가들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사회적인 이슈나 예술의 사회 참여적 문제, 혹은 젊은 작가로서의 예술창작과 노동/ 생존의 문제, 예술생산의 방식과 같은 문제로부터 동떨어져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에서 촉발한 개인 정서의 문제와 자기 스스로의 치유와 회복에 집중하게 하였다. 기존에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새롭게 마주하는 공간에 대한 촉각적 경험, 인상, 혹은 그 공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떠오르는 어떤 기억에 대한 물질화를 주제로 하던 기존의 작업과는 다르게 이 사건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작가 개인의 기억과 가족 혹은 주변의 기억을 추적하고 그 흔적을 더듬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가 부재한 가족의 모습, 어머니가 아버지와 당신의 일상에 대해 기록한 오래된 일기, 할머니가 옛 추억을 회상하며 들려주던 이야기들, 아버지의 서재에 희미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깊게 배어든 아버지의 흔적들, 아버지가 떠난 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자 꺼낸 옛 기억들의 교차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결국 작가본인에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끊임없이 재차 마주하게 만들었고, 반복적으로 과거를 방문하고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것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결국 작가 자신을 마주하게 하며 시시각각 찾아오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의 동요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종의 방어 기제였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렬한 격정, 즉 심리적 외상인 트라우마에 대해 무의식으로부터 작동하는 반복강박이라는 방어기제를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경험으로 인해 야기된 내부의 혼란과 격정을 길들이고자 그 경악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고, 그 경험을 되풀이하게 함으로써 의식에 의해 수용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강박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일상적 생활에서 상실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기제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가는 본인이 경험한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 흔적을 더듬고 그것을 추적하며 그것을 새롭게 다시금 환기시키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반복을 함으로써 일종의 반복강박을 수행하는 것이다. 절망과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지만,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그것은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치유이자 회복의 과정일 것이다.
망각된 존재의 회복 ● 신지혜는 시시각각 찾아오는 감정의 동요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아버지와 가족을 둘러싼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가기 시작했고, 그 과거로의 여정은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일기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일기장에는 진석씨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신지혜는 그것을 단초로써 하나하나 발견되는 여러 과거의 단서들을 자의적인 해석과 함께 거기서부터 피어오르는 다양한 상상들을 연결지음으로써 모종의 네러티브를 구축한다. 우선 전시의 타이틀이기도 한 '진석씨' 라는 이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의 일기장에 수시로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쉽게 눈치챌 수 있듯이 진석씨는 작가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신지혜는 본 전시의 타이틀을 『진석씨』로 정함으로써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명명되고, 사회적인 지위나 관계속에서 본인의 이름과 개별자로서의 존재는 삭제된 채 특정 관계에 종속된 존재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거부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본 전시의 구성에서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석씨'라는 작품에서 스스로 일기장속의 어머니가 되어 그 이름을 반복적으로 호명함으로써 드러난다. 가족으로써 누구보다도 익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에 쉬이 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이름 '진석씨'를 되풀이하여 부르는 행위는 아버지를 모든 관계로부터 해방시키며 그 고유의 존재 자체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일기장속 진석씨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문장을 발췌하고 일기장 속 그때의 시공간으로 돌아가 그것이 쓰여진 시간대속 어머니를 대신해 부르는 행위는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결국에는 타자로서 그때의 시공간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부재에서 나오는 신지혜의 호명은 작품속에서 복잡하게 뒤섞이고 중첩됨으로써 오묘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며, 결국엔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진석씨로 대변되는 개인적 존재가 갖는 잠재적 다양성을 소환해내기에 이른다. 신지혜의 이러한 행위는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며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위로의 행위인 동시에 아버지라는 존재로써 기꺼이 포기해야만 했던 그 모든 가능성들을 진석씨라는 이름의 호명으로 회복하는 일종의 제의적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들뢰즈가 '차이자체'를 강조함으로써 개별의 존재가 갖는 무한한 잠재적 다양성을 발견하고자 하고, 그 가능성을 획득하도록 관습이나 개념의 틀로부터 벗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행위의 차원에서 해석 가능하다.
이미지 사이로의 유영 (游泳) ● '진석씨'에서 시작한 신지혜의 과거로의 여정은 전시장 중간중간 파편처럼 흩뿌려진, 그러나 잘 살펴보면 특정한 리듬과 형식을 갖고 배열된 여러 발견된 오브제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시적인 문장들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형태와 높낮이의 좌대위에 오브제와 함께 놓여진 이미지, 그리고/ 혹은 개인적인 단상이 시적형태로 끄적여진 글귀의 병치가 그것이다. 각각의 오브제와 병치된 이미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시적인 문구들은 좌대위에서 서로 묘한 울림을 주고받으며, 개별의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심상으로부터 특정한 네러티브로 발전되기 위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를테면 '채비' 와 같은 작업은 낮은 높이에 다소 넓은 면적의 좌대위에서 등산용품과 등산복, 산의 이미지와 '미처 채비를 시작하기도 전에 서둘러 떠났다' 라는 글귀로 구성된다. 각각의 구성요소들은 외견상 유사성을 중심으로 어떠한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규정해서 말하기에는 힘든 모호함 역시 지니고 있다. 이것은 신지혜가 각 구성요소들의 집합속에 치밀하게 계산해 넣은 느슨함으로부터 기인한다. 오브제와 이미지, 문구 사이의 느슨한 접점은 관객들로 하여금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그것들의 관계망 사이를 파고들 수 있도록 허락하며, 각각의 요소들을 단서로써 추적해 뻗어나아가는 각자의 상상/ 이미지는 무한히 증식하여 고유의 네러티브를 생성해내도록 한다. 즉, 이러한 구조속에서 각 구성요소들로부터 뻗어나온 심상/ 이미지들은 서로 얽히고 연결되며, 각 요소에 내재한 사연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의 독자적이고 비정형적/ 비선형적인 네러티브를 직조해내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안에서 관객들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각각의 단서들을 무의식적으로 추적하게 되고, 어느덧 신지혜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의 의도는 본인의 여정에 그저 관객이 함께 동참해주기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진석씨'와 같은 맥락에서 특정 관습이나 개념작용 뒤에 가려져 있던 무한한 가능성을 관객 스스로 이끌어내고 진석씨의 흔적위에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그들 고유의 네러티브를 이끌어 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도달하는 여정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신지혜는 각 요소들로부터 떠올려지는 이미지를 우회하도록 각자의 거리를 조절하고 그 사이에 특정한 리듬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 이미지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자유롭게 유동하는 상상력의 추동은, 시작과 끝이 이미 정해진 이야기가 아닌 관객 스스로 그 이야기들을 채워나가도록하는 유희적인 사유의 시간을 제공할 것 이다.
신지혜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여정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개별적 존재의 회복을 위해 그 속에 남겨진 다양한 가치를 해방시킴으로써 그 여정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본 전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슬픔과 비통함의 차원에서 오는 추모식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끊임없이 방문하고 그것을 보듬으며 일상 속 잊고 있던 매 순간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순간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른 차원으로 불러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이다. 오래된 일기장 속 잊고 있던 기억을 살며시 들추어내듯 고유한 사연이 담긴 일상적 오브제를 전시장으로 소환해내는 작가는, 그것들을 치밀한 짜임과 리드미컬한 구성을 통해 예술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단초로써 치환하고자 시도하며, 그럼으로써 본래의 내재한 이야기로부터 탈각하여 자유로운 상상의 유영을 담보하는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에 너무 익숙하여 미처 망각되었던, 혹은 의미를 상실했던 존재는 스스로 새로운 목소리를 내게 될 것이다. ■ 김성우
그가 떠나고 그의 흔적을 찾는다. 그것은 그가 남긴 물건일수도, 내 맘속에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일수도, 그를 위해 만든 나의 작업들일 수도 있다. 전시명인 진석씨는 엄마의 일기장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아빠에게 직접 표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썼던 것 같다. 진석씨라고 불렸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태어나면서 이름 대신 (지혜)아빠로 불렸다. 32년동안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대신에 항상 같은 작업복을 입고 출근을 하셨다. 유학 중 반부터 그는 수술과 항암 치료 때문에 작업복 대신 환자복을 입는 반복되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는 아픈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건강해 보이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유학이 끝날 즈음에는 이전의 상황과 달랐다. 일정을 당겨서 귀국한 후에 아빠와 2달여의 시간이 허락 됐었다. 아빠가 어느 날, 병원에 이렇게 매일 와 있는데 작업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지금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빠를 위한 음식을 만들고, 같이 먹고,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해 하시는 다리를 주무르는 등 이러한 일련의 모든 행위와 감정이 내 모든 감각에 각인 시키는,,, 그와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갑자기 떠 오를 땐 가슴이 다시 뜨거워 지지만 난 나의 일상을 보낸다. 작업을 하며 아빠와의 기억이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인데도 잊고 있었던, 사사로운 일상의 순간을 기억하게 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잊었다는 것에 자책을 하기도 한다. 아빠가 작년 여름에 병원에서 수술 직후 검사에서도 암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해서 가족이 낙담해 하고 있었을 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예상했었던 것 같다. 남겨질 가족에 대한 위안의 말이 였으려나,,, 인간은 살기 위해 특히나 아픈 기억, 고통스런 기억 등의 나쁜 기억들을 무의식 너머로 보내 버리거나 다른 기억 보다 빨리 지우려는 심리가 있다고 한다. 나 또한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빨리 그와의 시간을 떠 올리려고 해도 희미해지겠지만 아직은 예민하게 기억하고 싶다. (2014년 11월) ■ 신지혜
Vol.20150717e | 신지혜展 / SHINJIHYE / 辛芝惠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