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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714_화요일_06:30pm
기획 / 김종길(미술평론가)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_11:00am~05: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두인 gallery dooin 서울 강남구 역삼동 76길 25 엄지빌딩 B1 Tel. +82.2.567.1212 www.gallerydooin.com
"저는 목탄을 '검묵'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드로잉 재료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 먹이죠. 사물마다 고유한 형상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 그 고유한 형상의 바깥(너머)이 만들어 내는 빈 공간입니다. 그 어둠, 그 여백,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비경이 있습니다. 일종의 '초월'일 것입니다. 그림엔 보이지 않지만 달빛이 있어요. 숲은 신령한 존재로 드러나는데, 달의 빛, 달의 소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재삼) ● 『뜻으로 본 한국미술』을 시작하며 『뜻으로 본 한국미술』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차용한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께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한국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면,『뜻으로 본 한국미술』은 한국미술에 나타난 '한국성'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합니다. ●『뜻으로 본 한국미술』의 기획은 한국미술에서의 '한국성'을 지역화 또는 영토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유라시아 그리고 세계 인류의 미적 가치와 어떻게 만나고 교차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미학에서의 한국성을 선명하게 읽어보고자 하는 데에 그 취지가 있지요. ●『뜻으로 본 한국미술』의 첫 작가는 이재삼입니다. ● 그는 오랫동안 '마음 속 달빛(心中月)'을 나무 숯(木炭)으로 그려왔습니다. 달빛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그가 주로 선택하는 것은 소나무, 대나무, 매화, 폭포 등입니다. 그 나무와 꽃들은 대상이 없는 관념이 아니라, 이 땅 어딘가에 뿌리 내리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서의 실체였죠. ● 이재삼 작가는 달빛을 아리랑에 표현합니다. "달빛은 보이는 아리랑이고… 아리랑은 보이지 않는 달빛이다."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지요. 하여, 뜻으로 본 한국미술의 첫 주제는 '달빛 아리랑'입니다. 아시아의 민족들은 달빛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달력(月曆)은 삶의 체계를 구축했고 생철학의 근원이 되었죠. 아리랑은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사람들의 밀물과 썰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재삼의 작품을 통해 그 세계 너머의 풍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현[玄:검다] ● 현(玄)의 개념은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왔습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천지현황은 천자문(千字文)의 첫 구절이죠. 천자문을 두고 한자 공부를 위한 초등학교 교재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사실 천자문은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이뤄진 우주 자연 인간의 이치를 밝힌 시이며 철학입니다. 옛 사람들은 요즘의 초등학교처럼 철이와 영희와 누렁이와 개똥이 그리고 하나 둘 셋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하늘과 땅과 우주의 이치를 먼저 이해하고 그 다음을 배웠습니다. 우주 자연의 이치를 알아야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배움에 관한 근본적인 철학적 바탕이 깔려 있었던 것이죠. ● 첫 4구 16자의 뜻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은 그 빛이 검고 땅은 그 빛이 누르다(天地玄黃), 하늘과 땅 사이가 넓고 커서 끝이 없다(宇宙洪荒),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이지러진다(日月盈昃), 별들이 해와 달처럼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다(辰宿列張). 하늘과 땅의 빛이 첫이요, 하늘과 땅의 크기가 둘이요, 해와 달의 기움과 참이 셋이요, 별과 해와 달의 조화가 넷이죠.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해와 달과 별의 이치를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공부의 첫 화두였던 것입니다. ● 천지현황에서 '현(玄)'은 하늘빛을 상징하는 개념적 문자입니다. '검을 현'이라고 했을 때의 '검다'는 검은빛으로서의 하늘빛이니까요. 그러므로 '검다'의 '검'은 하늘 어둠의 빛(玄)이요, 하늘 어둠의 색(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검다'를 '까맣다'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현의 빛은 오묘하고 심오하며 신묘한 빛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깊고 고요하고 멀어서 아득하고 아찔한 것이 바로 그 빛이니까요. 이러한 현의 개념이 이재삼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첫 번째 뜻과 상징입니다. ● 오묘하고 심오하고 신묘한, 깊고 고요하고 멀어서 아득하고 아찔한 그의 '현(玄)'은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가 달빛과 이루어 뿜어내는 향취에서 비롯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가 그린 회화의 향취가 현의 그런 멋과 맛과 흥의 아찔하고 신묘한 그것들을 풀어 놓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의 향기는 그윽이 풍기는 암향(暗香)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흑의 색은 거멓고 어두워서 고약합니다. 거메지고 거메져서 오직 검을 뿐이니 먹먹합니다. 앞뒤가 탁 막혀서 먹먹하게 검은빛은 그러므로 이재삼 작가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빛의 색과 색들이 뭉쳐서 흰 빛이 되듯 그의 '흑(黑)'은 그가 '검묵[검墨]'이라고 부르는, 투명한 어둠의 색이 색으로 뭉쳐서 하나가 된 온갖 색들의 명징한 더하기일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하늘빛으로서의 검은빛 말예요.
목탄[木炭:나무 사리] ● '먹먹하다'의 '먹'은 그을음을 아교로 굳혀서 만든 먹의 어둠에서 비롯하고, 목탄은 불의 사리로 남은 나무의 시커먼 뼈에서 비롯합니다. 그을음과 나무의 뼈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은 그것이 회화의 세계를 드러내는 색의 질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색의 질료'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의 색은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회화에서도 그런 채색의 미학적 풍토는 깊고 오래되었습니다만, 먹 하나에서도 충분히 색의 질료를 보았다는 점이 다른 점입니다. ● 어떻게 옛 사람들은 먹 하나에서 우주 자연과 인간의 삶을 그리는 회화적 세계의 질료를 엿보았던 것일까요? 수백 수천 년을 이어 온 먹의 회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맛과 깊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도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약해지지 않을 수 없었죠. 가장 큰 변화는 먹을 채색의 한 색처럼 단순히 '검은색(黑)'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서구 화풍의 영향이 큰 탓일 수도 있고, 먹의 미학 따위는 잊고서 화면 위의 기교에만 치중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현대 한국화라 불리는 문방사우의 수많은 그림들조차도 까맣게만 보일 뿐 먹의 깊이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 옛 사람들은 먹을 벼루에 갈아서 그렸고, 이재삼 작가는 버드나무나 포도나무를 태운 검은 사리의 목탄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검은 숯 사리 목탄. 그렇습니다.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얻은 투명한 검은 사리입니다. 먹으로 탄생한 그을음이 소나무의 눈물방울 같은 투명한 송진을 태워서 얻은 것이듯, 이재삼 작가의 목탄은 등신불 같은 나무의 진신사리인 것입니다. 이미 태워서 가루가 되었거나 사리가 된 것들로 탄생하는 회화는 그러므로 '저 너머'에서 건너 온 생(生)의 씨앗일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뜻과 상징입니다. ● 부처[佛] 사리의 집이 탑이라면, 이재삼 작가의 나무 사리 집은 회화일 것입니다. 스투파(stūpa)에서 비롯된 탑[塔婆]의 구조 미학은 동아시아에서 다양한 양식으로 창조되었고 그것은 온전히 진신사리를 위한 집으로 완성되었죠. 이재삼 작가의 회화도 마찬가지가 아닐는지요. 그의 회화는 온전히 이 나무 사리의 집으로서 완성되니까요. 그러니까 목탄은 그의 회화미학을 이루는 가장 낮은 곳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목탄이 그 신묘한 현의 빛과 색을 이루는 질료이기 때문입니다. ● 불의 죽음에 이른 뒤, 다시 회화의 빛과 색으로 부활하는 나무 사리. 그러니 그것이 생의 씨앗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후경[後景:저 너머] ● 전경(前景)이 삶의 현실로서 보이는 풍경이라면 후경(後景)은 삶과 맞닿아 있으나 삶의 이면에 존재하기에 보이지 않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풍경은 육안(肉眼)의 이미지요, 보이지 않는 풍경은 심안(心眼)의 이미지죠. 또한 전경이 스물네 시간의 하루와 스물네 개의 절기, 그리고 삼백 예순 다섯 날의 한 해가 조화를 이룬 세계라면 후경은 그런 시간의 조화가 카오스모스로 뒤섞인 세계죠. ● 예컨대 그것은 우물면의 위와 아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 비친 우물 밖의 세계가 전경인 것이요, 우물 아래의 심연(深淵)이 곧 후경인 것입니다. 우물의 진실은 우물 밖의 세계와 심연으로부터 표상되어 올라 온 것이 우물면이라는 하나의 면에서 만나 풍경을 이룬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우물 밖의 세계가 거울처럼 우물에 비추인 것만을 진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 옛 초상화는 형(形)과 영(影)의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형은 형상으로서 그려야 할 대상의 실체입니다. 영은 그 대상이 그려진 회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영이라는 것이 단순히 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정신의 본질까지를 담아낸 것이라 할 때, 그 영은 후경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옛 초상화는 지극한 재현으로서의 그림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깊이를 담아낸 그림입니다. ● 이재삼 작가의 작품도 그런 형과 영의 미학적 뜻과 상징을 그대로 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가 그려야 할 대상을 찾아 전국을 누볐습니다. 설령 그가 찾고자 한 나무를 찾았다 하더라도 그 나무의 품새와 정신의 꼴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이 아니면 어렵게 찾은 나무여도 결코 그리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나무만이 뿜어내는 그 독특한 몸꼴과 그 몸꼴의 자태, 그러니까 매혹(魅惑)의 느낌이 있어야만 작품으로 재탄생 되는 것입니다. ● 그의 소나무, 대나무, 매화, 달빛, 폭포는 그렇게 모두 이승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매혹의 실체들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국토의 곳곳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오래된 나무들과 풍경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의 그림들이 때때로 처처한 것은 그 나무들이 홀로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회화는 그런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상징의 구체성으로 나아가는 곳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두고 단순히 극사실적 재현의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 대상이 되는 나무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그 나무를 드러내고 있는 달빛이고 그 달빛의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 사이에서 은은한 숲의 향취이기 때문이죠. ● 그러므로 그의 회화를 '후경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 번째 뜻과 상징입니다. 그는 그의 회화를 두고 '저 너머'의 풍경이라고까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의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풍경을 보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너머는 아마도 풍경의 심연으로서의 '비경(秘境)'이 아닐까요?
생생화화[生生化化:풍경의 미학] ● 순우리말 '생생하다'의 어근 '생생'은 쌩쌩하고 싱싱하다로 통합니다. 그 생생의 한자말 '生生'은 생기가 왕성할 뿐만 아니라 생동감이 있어서 실물이나 실제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죠. 원래 '생(生)'이 나고 낳고 살고 기르고 싱싱한 것을 뜻하니 생생(生生)은 그 생의 의미가 더 커진 것이 아닐는지요. 이 '홀로' 생(生)과 '서로' 생생(生生)이 동아시아 미학의 척추를 이루고 있습니다. ● 중국 북송대의 유학자 정호(程顥, 1032~1085)는 "우주만물의 근원은 천지생생(天地生生)한 음양의 기(氣)로서, 생생(生生)은 생의(生意)이며, 윤리적으로는 인(仁)"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주역』「계사(繫辭)」에는 "대 자연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한다(天地之大德曰生)."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생의(生意)는 어떤 의미일까요? 생의는 만물을 낳는 이치를 뜻합니다. 다분히 생철학적인 의미의 이 말은 다시 생생지리(生生之理)로 이어집니다. 생생지리는 만물이 서로 낳고 번식하는 자연의 이치를 뜻하죠. ● '생의'와 '생생지리'의 생철학적 개념이 생생화화(生生化化), 즉 늘 변화하고 볼수록 새로워지는 한 몸 우주의 살아있는 기운이요 변화입니다. 김항배 선생은 『불교와 도가사』(동국대학교출판부, 1999, 304쪽)에서 "'무위'라는 것은 유심(有心)으로 물(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고, '무불위(無不爲)'라는 것은 생생화화(生生化化)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을 말함"이라고 했습니다. 시인 김지하 선생은 『사이버 시대와 시의 운명』(북하우스, 2003, 72쪽)에서 "기화, 기운의 변화란 바로 관계하고 순환하는 일체의 생생화화(生生化化), 동양의 고전적인 철학에서, 유학에서 말하는 일체 우주는 생생화화한다는 것입니다. 낳고낳고 변화하고 또 변화한다. 또 죽고 또 태어난다."고 했고요. ● 그런 생생화화의 정신이 투영된 것이 이재삼 작가의 목탄화입니다. 그의 회화가 현묘한 것은 '저 너머'의 비경을 생생화화로 채우고 있기 때문이죠. 바로 이것이 네 번째 뜻과 상징입니다. ● 사람들은 그저 그의 회화가 시커먼 바탕에 그려진 사물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물들은 어딘가에서 오래 살면서 여전히 생의 씨앗을 틔우는 생명들입니다. 낳고낳고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그것들이 바로 풍경의 미학인 것이죠. 가까이, 그의 그림 속으로 다가가면 보일 거예요. 숲에 깃들어 있는 바람과 곤충들과 양서류가.
생동[生動:풍경의 몸] ● 생생화화의 기운과 변화를 생각하면서 떠올린 마지막 뜻과 상징은 생동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운생동(氣運生動)이라고 말하는 그 기운과 생동이죠. 기운이 생동하다는 것은 곧 기운이 가득차서 넘치는 '충일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운과 생동이 무엇으로 표출되는 것일까요? 문학비평사전에 따르면 "기운은 정운(情韻)․신기(神氣) 등의 용어와 유사하여 대상의 풍정(風情)․개성․생명과 같은 뜻이 있고, 기운생동이란 묘사할 대상의 기질․성격이 화면에 생생하게 표현되는 것을 뜻"하죠. ● 결과적으로 대상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당나라 화가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기운생동을 골기(骨氣)라고 바꿔 불렀습니다. "옛날의 그림은 간혹 그 형사를 옮기고 그 골기(骨氣)를 숭상하였는데 형사의 밖에서 그 그림을 찾는 것은 속인들과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던 것이죠. 그의 골기는 풍골(風骨)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골기니 풍골이니 하는 말들이 인물을 품평할 때 쓰는 말이지만 이재삼 작가의 회화에서는 회화적 대상이 되는 나무들과 풍경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 풍골의 본디 뜻은 "인물의 정신과 기질, 의태(儀態)․풍도(風度)가 청준상랑(淸俊爽朗)하여 비루한 세속 풍정에 물들지 아니한 기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풍골의 의미를 이재삼 작가의 소나무와 대나무와 매화, 그리고 여타의 풍경에 대입해서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야 그의 작품이 잘 보입니다. 또한 그 뜻과 상징이 명확해 지지요. ● 그의 회화는 풍경의 리얼리티로 가득합니다. 사물 하나하나의 표정과 그 표정의 군집이 생동에 차 있습니다. 나무든 숲이든 영혼의 육체 없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의 기억이 손의 기억으로 쏟아져 나와야 가능한 그림이죠. 그는 풍경의 세목을 그리면서 풍경의 정신과 조우했습니다. 몸은 풍경의 심장이요, 풍경은 몸의 육체가 됩니다. 그렇게 서로 숨통을 트자 바람이 일고 오래된 신화적 서사가 풍경으로 잠입합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 어둠이 밝게 터집니다. 숲이 토해내는 생명들. 그 순간, 니르바나에 이른 목탄의 투명한 소멸! ■ 김종길
Vol.20150714e | 이재삼展 / LEEJAESAM / 李在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