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레스빠스71 L'ESPACE71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71길 5(청담동 141-11번지) 중인빌딩 B1 Tel. +82.2.511.7101 www.lespace71.com
사고와 경험의 수집, 공존으로써의 언어 ● 1. 타인의 개입을 통한 예술의 원본성, 고유성, 오리지널리티란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은 함의하는 의도와 메시지 등이 어떤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드러나느냐에 따라 그 귀착의 결도 달리한다. 원본에 대한 의회(疑懷)를 제시하기 위해 원본 그대로의 습속을 선택할 수 있듯, 고유성을 또 다른 고유성으로 치환하여 재구성하는 것 역시 부당성을 획득하지 않는다. ● 이는 칸트와 헤겔의 절대주의 철학과 합리적 판단에 따라 예술에도 영원한 형이상학적 실재 혹은 진실이 존재하고,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거나 얻기 위해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만 만족시키면 예술의 진실이 시공간을 초월해 항상 성립하거나 존재하게 된다고 주장한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 이후의 미술'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미술제작방법으로, 오히려 인접성에 의한 환유를 따를 뿐만 아니라 기법의 차원을 넘어 작가에 의한 새로운 미학을 생성시킨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 특히 암묵적 동일성을 지향하는 에토스(ethos)적인 예술세계에서 환유로서의 조각성(일종의 세편(細片))은 무경계의 미학, 병존의 미학, 해체의 미학 등을 완성시키는 주요 명사로까지 기능한다. 물론 작가로서의 예술적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시그널로 작동되고 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정하눅의 "(내 작업은)어린아이의 시각과 시선으로 공존하는 세상을 보는 것이며, 어린아이의 시선에 눈높이를 맞춘 채 공존되고 있는 나의시각도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거나 "학습되어진 성인으로서 인식되는 존재론이 아이들 시점에서 출발 되어지는 것으로 순화되기를 희망한다."는 스테이트먼트는 이해불가하지 않다. 즉, "한 작품 안에 여러 사람들의 세계관이 함께 존재할 수 있으며 함께 변주 되어질 수 있다."는 작가의 말에 담겨 있는 건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해 직렬관계를 희석시키고, 주체에 밸런스를 맞추며 평범하고 소박한 아이들의 시선과 발상이 시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예술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되레 '뜻밖의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2. 주체와 권력을 매개하고 상호주관적인 이해관계의 통로역할을 하는 병렬식 관계에 방점을 두고 있는 정하눅의 작업에 시각예술에 관한 원형적 태도인 '보다'라는 조사를 대입해도 흥미롭다. 일단 그의 그림 속 내용과 형식은 다른 시점, 다른 시각을 취함에 따라 변경되고 달라지는데, 쉽게 말해 지각적 완성도만 높은 예술 아래 기술할 경우 아이들이 제공한 스토리는 다양한 색깔로 파생된다. 또한 예술표현의 균형 잡힌 주체(작가는 이를 공존이라 칭한다)로 부상한 아이들로부터 얻은 이야기들은 곧 작가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남는다. ●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어린이나 보는 어른은 단순히 '그리거나 보다'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체를 건넌 상호주체화는 다시 탈 맥락화를 이끌고, 이것은 곧 새로운 의미의 지각과 인식의 문제를 넘어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포박하는 양상을 띤다. 이는 결국 다소 이질적인 여운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단순히 재현하기보다는 구성의 문제로 귀착해 별도의 맥락화를 유도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의 미술은 오브제가 아닌 감상의 방법으로의 진화로 이어짐을, 무엇을 그렸느냐 혹은 어떻게 그렸느냐가 아니라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공유되며 얼마만큼 해석의 여백이 있는가로 변화하고 있음을 증거 한다. ● 그렇다면 작가가 아이들의 생각/사고/경험을 작업의 거푸집으로 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제한 없는 자유가 행해지고 있는 상태에서 직접 경험해본 작가의 서로 다른 두 문화권 내 괴리를 바탕에 둔다. 유학시절 당시의 문화와 가치관, 세계관에 대한 경험과 한국에서의 경험이 어느 순간 그리드(grid)되면서 발생하는 간극이 화두로 자리 잡은 셈이다. ● 하지만 그 '괴리' 자체는 크게 흥미로운 게 아니다. 동시대미술 작가 가운데서도 문화간격이라든가 이방인적 체험, 소외, 노마딕한 상황들은 곧잘 표현의 주제로 상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하눅의 그림에는 작가 외, 제3자의 언어가 개입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도출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간의 틈이 발생한다. 특히 아이들의 스토리가 작가에 의해 '선택'되고 '제시'되며 관계의 항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눈에 띈다.
3. 실제로 작가는 이 두 개의 조형방식을 통해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간다. 예술이 특별한 것이라는 낭만주의적 발상에서 이탈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인식대상의 구조와 그 항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둠으로써 나름의 값진 형상성을 개간한다. 특히 대립항으로 인식되어 온 대상과 주체의 이분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 관계 개념에 주목하며,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들 간의 동질성이 전제된 '교환'이라는 사고방식에 미학적 근거를 찾고 있음은 정하눅 작업의 특징으로 부족함이 없다. ● 정하눅의 이러한 방법론은 기호학적 표시체계를 비롯하여, 기존에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종류의 관습적인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사고의 전환을 드러내며, 예술의 구조와 체제, 의미론 등까지 포괄한다. 따라서 작가 정하눅이 아이들의 발상과 사고에 천착해 그들의 사고유형을 자신의 것으로 차용하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은 별도의 예술성을 잉태하고 있음이며, 인지된 물질과 모든 예술 작품의 의미는 작품이 창조 되어졌을 때의 예술가의 상황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의 관점과 의도와 상황에 달려 있다는 명제를 옹립시킨다. ● 더불어 아이들의 세계관을 끌어와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 그 과정이 하나의 태도가 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이는 아이들이 생각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를 수용하고 작가 자신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작업의 영역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확장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젊은 작가다운, 새로움에 대한 나름의 도전으로 풀이할 수 있다. ●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아직까진 개념과는 달리 일단의 시각체가 일부 독일 작가들의 영향을 엿보게 한다는 점이며, 미술사적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마라톤 같은 예술가의 길에 있어 아직 넉넉한 시간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서둘러 넘어야할 산이 아닐까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선택과 이야기를 통한 실험의지, 타자의 정신과 세계관을 모아 자신만의 언어로 펼쳐놓는 수집가로서의 면모, 그 구체적 제시의 근거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아쉬움이 적다. ■ 홍경한
Vol.20150704g | 정하눅展 / JUNGHANUK / 鄭桓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