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ia in Gallery

정채은展 / JUNGCHAEEUN / 鄭採垠 / video.installation   2015_0604 ▶ 2015_0621 / 월요일 휴관

정채은_It's your position-To move_오브제, 자전거 부품_25×70×25cm_201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이연주갤러리_부산문화재단 기획 / 박은지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이연주 갤러리 LEEYEONJU GALLERY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170-5번지 끌레22 4층 Tel. +82.51.723.4826 cafe.naver.com/gallery2yeonju

상품의 심미화, 그 병리적 소비 현장에 대한 진술(陳述) A astheticization of goods, The statement working for pathologic scene of consumption 나는 잘 산다-는 의미의 혼탁함에 관하여 On the corruption of signification of living with buying ● 정채은의 『Galleria in Gallery』展은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진부한 표현으로 자리 잡은-라 불리는 물신(物神)에 대한 부정성이 이미 제거되고 그에 대한 긍정적 의미가 더욱 부각되다 못해 우리 삶을 잠식해 나가는 현대의 소비지향, 소비행위,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상품에 대한 진술이다. ● 소비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잠시 한 소셜커머스(social commerce)의 광고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내가 잘 사는 이유"를 끊임없이 외치는 이 광고는 살다(live, life)와 구매하다(purchase, buy)를 등치시켜 놓았다. 소비가 삶을, 삶이 소비를 규정짓는다는 말이다. "예뻐지기 위해, 더 건강해지기 위해,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을 위해" 사며 심지어 "살수록(buy) 행복해진다"라고 말하는 이 광고는 우리 삶이 안고 있는 인간관계 혹은 삶의 질 그리고 여타의 모든 문제들을 소비의 행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인상을 풍긴다. 삶을 살다=물건을 사다의 등식처럼 소비가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방식은 이미 사회현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한 현상 가운데 정채은은 특히 명품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명품 소비 현상을 읽어내기 위한 두 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취양의 문제와 과시적 소비가 바로 그것인데 나는 여기서 정채은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과시적 소비의 맥락에서 이 혼탁함의 의미를 기술하고자 한다.

정채은_It's your position_단채널 영상_00:02:40_2015
정채은_There is Mademoiselle_단채널 영상_00:02:40_2015

삼품의 심미화와 역전된 공간 ● 길거리에 떠도는 말로 열광적인 명품소비 현상은 동양권 특히 한,중,일에 국한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2000년대의 된장녀, 2010년대 김치녀 등의 용어의 형성과 사용을 보면 명품 열광현상은 실로 한국이라는 특정 지형 안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우선 명품이라는 용어에 집중에 보자면 한국에서 명품은 흔히 알려져 있듯 샤넬(Chanel)이나 에르메스(Hermes) 등 고급 브랜드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는 1990년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이 설립된 것과 역사를 같이하는데 갤러리아(Galleria) 백화점은 소비 공간을 미술품 혹은 예술품이 놓이는 장소인 갤러리(Gallery)와 동일한 공간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상품을 예술품의 지위로 올려놓고자 했다.(해당 홈페이지를 보라 "백화점에 명품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여 프리미엄 마켓을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을 당당히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상품의 심미화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비판하고 있는 정치의 심미화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 상품을 심미화 시키면서 여타의 백화점들은 그러한 소비를 더욱 조장하며 고급화시키기 위해 미술관을 백화점 내부로 끌어들였고 종종 예술작품들은 명품이라 불리는 상품들을 돋우기 위해 그 주변에 위치지어진다. 정채은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Galleria를 갤러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갤러리라는 미술제도 안에서 그 의미들을 '뜯고 찢어' 낱낱이 파헤친다. 상품에 교묘하게 녹아있는 예술의 의미를 떼어 놓으면서 그 해체의 장면을 갤러리라는 공간에 배치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에서의 매체의 사용, 작품표제에 있어서 단어의 선택, 공간에서의 배치까지 보다 엄밀히 그 의미를 관철해야만 한다. 공간의 의미를 끌어들이는 것에 이미 이 모두를 아우르는 정채은의 치밀한 전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정채은_There is Mademoiselle_real soap_CoCo Mademoiselle soap_6×8.5×3.5cm_2015
정채은_All free_M.D.F, 비누_50×350cm 이내 설치_2015
정채은_Nail_아크릴, 못_11×25×5cm_2015

제거된 기호와 반환된 의미 ● 우리는 왜 그토록 명품에 열광하는가. 베블런이 『유한계급론』(1899)에서 제기한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의 논의에 따르면 상품은 부와 계층의 표식으로써 나를 차별화 시키고자 하는 전략으로 힘들게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에 소속됨을 표시하는 것이다. 즉, 명품은 나의 신분을 상징한다. 그것도 그러한 물건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소수의 상위계층의 신분이라는 상징으로써 말이다. 또한 왜 그것을 사는가의 물음은 소비하는 상품에 어떠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가의 물음과 직결되는데,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상품은 그 물질적 효용성 보다 부여된 상징적 의미에 의해 소비된다.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를 가방이 대체하게 된지 벌써 오래이지 않는가. ● 「There is Mademoiselle」은 명품의 상징적 의미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반추(反芻)하게 하는 작업이다. Mademoiselle은 정채은이 작품에 사용한 실제 샤넬에서 판매되고 있는 비누의 상품명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있음을 지칭하는 There is의 사용에 있다. 작가의 손에 의해 비누는 녹아 일상의 빨래비누로 형태를 달리함을 보여주는 영상작업, 동일한 성분과 동일한 질량, 여기서 변화한 것은 비누의 단순 형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샤넬 로고의 사라짐이 있을 뿐이다. 작품의 표제는 마드모아젤이 여기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 여전히 마드모아젤이 있다. 그러나 로고의 사라짐은 현대 소비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인 기호, 즉 상징적의 의미의 상실을 가져오며 결국 소비라는 행동에 변화를 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써 작용한다. 상징적 가치가 사라지고 물질적 효용가치만 남은 비누. 당신은 동일한 금액으로 이것을 구입하겠는가. 샤넬 클래식 가방을 뜯어 가죽과 체인을 각각 일상의 도구의 자리에 돌려놓은 과정을 보여주는 「It's your position」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이 작업들은 모두 광고의 형식을 취하는데 영상미디어 광고는 물질적 효용에 따른 사용가치 보다 상징적 가치를 더 중요시 하는 소비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정채은은 광고의 형식을 통해 상품을 본래적 사용가치에 집중하도록 만들며 이러한 변화의 시도를 통해서 명품을 구입함으로써 신분을 획득하고자 하는 태도를 재고하도록 한다.

정채은_Stamp_gobo light_100×100cm 이내 설치_2015

의미의 재조직화 ● 상징적 가치에 의한 명품의 소비는 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사들이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내가 산 명품은 나의 신분을 보증해주며 이는 지금 우리의 명품이라는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지금 당장 내가 산 물건 내가 걸친 물건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 보드리야르나 베블런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 곳곳에 아니 지금 거울 앞에 선 당신을 보아도 좋다. 당신이 만약 샤넬가방을 사서 들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명품의 의미는 이미 조건화(conditioning) 되어있는 것이다. 실제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까지 각각의 분야의 최고 브랜드를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의미를 배우고 또 스스로 그것을 강화해 나간다. 따라서 「Believing is seeing-이것은 샤넬이 아니다」작업은 Galleria in Gallery 展 전체를 아우른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계층이 소비할 것이라 믿는 그것을 소비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비가 조건화 되어 있다면 새로운 자극을 주어 다른 반응을 강화시키는 방법 즉, 구체적 물질의 사용가치를 부각시킴으로써 명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장의 조명에 의해 바닥에 비춰진 샤넬 마크가 전시의 관람객과 감상자에 의해 끊임없이 밟히는 「Stamp」작업은 그러한 조건화를 위한 최종 강화물이라 볼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채은이 겨냥하는 곳은 실제 소수의 계층이 아니다. 즉각적으로나마 그 계층으로 '보여지기 위해' 계산대 앞에서 돈으로 그것을 사는 우리들을 향해있다. ● 정채은이 갤러리아를 갤러리로 끌어들이는 시도는 상품의 심미화의 그 대척지점에 있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으로써 미술의 정치화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정채은은 심미화된 상품과 그 제도를 비판하면서 일상의 범주에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자전거 체인, 톱, 니퍼 등의 도구들을 미술의 제도 속에서 작품으로 변모시킨다. 이를 통해 상품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벤야민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피 흘리지 않는 혁명으로써,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는 것으로 보았던 것처럼 정채은의 작업들은 사다(buy)의 의미의 변화로부터 삶을 사는(live) 의미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정말로 삶을 산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 명품소비에 대한 비판은 된장녀 혹은 김치녀 논란에서와 같이 주로 여성 소비자들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묻고자 한다. 저 샤넬마크가 대학의 심벌이라면, 그리고 롤스로이스나 페라리 같은 고급 자동차의 마크라면, 그대들이 그대를 포장하기 위해서 찾는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비판은 그대들을 향해 있으며 「Believing is seeing」 이라는 작업에서 드러나듯 정채은의 작업이 단순히 특정 계층에, 혹은 특정한 성(性)에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찌해서 살다와 사다가 동의어가 되어버렸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것을 비판하기보다 수용하다 못해 맹신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까. 정채은의 작업들은 그러한 열광, 그러한 맹신에 대한 의미를 그리고 우리의 태도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보라. 당신은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잘 삽니까. ■ 박은지

Vol.20150614c | 정채은展 / JUNGCHAEEUN / 鄭採垠 / video.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