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이, 이에는 눈 An eye for a tooth, a tooth for an eye

유창창_이윤호_정찬일展   2015_0528 ▶ 2015_0628 / 월요일 휴관

유창창_Animals(How come we are this childish)_비닐에 혼합재료_180×275cm_2010~5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 기획 / 이정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풀 ART SPACE POOL 서울 종로구 세검정로 9길 91-5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성기고 연약하며 빈번한 질문들 ● 이 전시는 몇 가지 질문을 만들기 위해 기획되었다. 가장 큰 질문은 이렇다. '미술작품의 가치는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상정하는가?' 잘 만든 질문은 '나'의 존재를 밝혀주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사유와 행동으로부터 새로운 의미지평을 열어준다. 질문은 구체적이고 견고할수록 제 역할을 다한다. 허나 대부분은 기본 꼴을 갖추기조차 힘겹다. 우선 위의 질문을 성립시키려면, 질문 안에 들어간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정립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미술이란?'과 '미술작품이란?', '가치란?', '언제/누구에게(홑개인인가, 집단인가, 공동체인가)', '설정이 아니라 상정인 이유는?' 등 부수적 질문에 우선 답해야 하는 것이다. 질문을 위한 첫 질문부터 막힌다. 적어도 한반도 안에선 '미술'에 대해 여럿이 동의할 만한 개념 정립을 하지 않았다(미술은 19세기 일본에서 만든 개념을 '수입'한 것). 작품은 "예술 창작의 결과물"이란 사전적 지시문이 전부일 따름이다. 개념과 현상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게 바보짓처럼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바탕 없는 질문(본질을 묻는 질문)은 아예 생성되지 않는다. 질문 없는 우리네 현실은 더욱 암담한 나락으로 빠져 들어간다. 가장 큰 문제는 질문하는 이와 답해야 하는 이, 즉 '언제의 누구에게'이다. 단순히 '지금의 나'라는 말을 대입했을 때와 '유신시대에 사는 아무개'에게 저 질문이 갖는 역할과 목적은 다르다. 아예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은, '지금 살아있는 시각예술작가'라 설정해보자. 그리고 둘째로 큰 문제를 보자. '설정'이 아니라 왜 '상정'인가? 상정은 "정황을 가정적으로 생각하여 단정함"을 뜻한다. 상정은 과연 주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인가? "가정적으로 단정짓기"란,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며, 윤리적으로도 무책임하다. 질문을 구성하는 개념의 본질에 대해 물은 경험이 없으므로, 기획자는 설정이 아닌 상정을 썼다. 이렇듯 '미술작품의 가치는 무엇으로 어떻게 상정할 수 있을까?'란 질문은 여러 문제를 담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나'에게 별로 와닿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위의 '말놀음'을 제외했을 땐 어떠한가? ● 자본주의 시대, 자본의 논리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마치 외계생명체가 있다면, 그들의 사회 또한 취하고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우리네 인식 뿌리 깊이 자본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미술이라 불리는 것이 본디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 영원할 것만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서 미술작품의 가치란, 유용성(value)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고, 그 본성(worth)은 형체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예술가는 돈이 있어야 작품을 만들 수 있고, 작품은 돈에 의해 거래된다. 작품이라 불리는 것 중에 어떤 건 1,500억을 훌쩍 넘어가고, 어떤 건 아예 화폐로 거래가 불가능하거나 가격 자체가 없다. 작품에 화폐적 가치를 대입하여 '사유재산' 혹은 '공유재산'처럼 가치평가하는 상황은, 맑스가 내린 화폐의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에 따르면 화폐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증폭을 이루어낸다. 미술작품은 그렇지 않은가? 다른 내용을 차치하고 가치면에서 화폐와 작품, 상품과 작품의 차이점을 시원하게 풀어 설명할 방법이 요원하다.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당장 물어야만 하는, 미술작품의 가치는 무엇으로 어떻게 상정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왜 유효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야 타당한 것이 아닐까? ● 예술은 사회상과 시대상에 영향을 받는다. 예술행위를 해나가는 예술가는 그 영향으로부터 공통감각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작품을 창작하며, 시대를 아우르는 무언가를 사회에 돌려준다. 돌려주는 것이 무엇이다, 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기획자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어떤 '질문'인 것 같다. 그들은 아름다운 대상을 만드는 일에 그치지 않고, 아름다움 자체가 무엇인지 묻는다. 시각예술가라면, 보이는 대상뿐 아니라 보는 일과 보이는 대상 자체를 묻는 것일 터이고, 이 질문은 다시 '오늘을 무엇으로 어떻게 이름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탈바꿈한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때때로 질문의 구조나 바탕이 비이성적이기에 질문을 완성짓는 논리적 구조가 왜곡되어보인다. 허나 그 질문에 대해 작가가 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 답하는 건 작가의 작품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작품에서 상품가치와 교환가치를 뺀다면? ● 4월 4일부터 5월 17일까지 이어진 '눈에는 이, 이에는 눈' 워크숍은 다음의 규칙을 가지고 진행됐다. 첫째, 참여자들은 작가와 친분을 맺고, 그들의 작업을 살펴본 후, 작가의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선물을 의무적으로 준다. 둘째, 선물은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상관 없되, 돈은 안 된다. 셋째, 작가는 선물에 상응하는 작품을 제작하거나 워크숍 기간에 제작한 작품을 참여자들에게 답례한다. 넷째, 주고받은 물질적 비물질적 대상은 수증자의 몫이 된다. 워크숍 내용은, 자본주의를 이루는 기본 양식인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의도적으로 제거했다. 그렇게 드러난 현상에 의미를 붙이고, 과연 그 의미가 질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요소를 제공할 수 있을까? 워크숍은 마르셀 모스(Marcel Moss)가 주창한 '증여론'에서 대안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지도 살폈다. 그에 따르면 증여는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 동시에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또한 받는 데에는 위험을 수반한다. 이것은 주어진 물건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쌍무적인 유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수증자는 증여자의 노여움에 좌우되고, 또 각자는 상대방에게 지배된다. 이 점은 경제학자 홍기빈의 말처럼(4월 10일 '눈에는 이, 이에는 눈' 강연), "예술가가 자신이 속한 사회로 주는 '선물(호혜)' 만큼 사회가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와 사회의 상호연관관계에 대한 불균형 또한 심각해보인다. 작가와 사회의 의무이행이 되지 않는 이상, 시각예술가는 세월호 참사란 비극에 대응해 '침몰하는 배' 정도를 그리는 수준에 그친다.

유창창_Animals(the night)_종이에 혼합재료_29.6×21cm_2015

유창창은 제정신인가? ● 유창창은 워크숍 참여자(곽혜은 이희경 심미량)들과의 첫 만남에서 매주 선물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매주 선물을 받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작품을 내어주겠노라고 약속하는 동시에, "정확한 등가관계를 이룰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2011년 부터 계속해 온 「산」 시리즈와 「애니멀」 시리즈 가운데 최신작을 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등가관계, 즉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말은, 받은 선물에 상응하는 가치를 작가 스스로 작품에 투사시키겠다는 말이었다. 대표적으로 그가 심미량에게 받은 선물들을 보자. 애완견 화장실에 쓰이던 돌멩이 하나, 캔뚜껑, 마른 꽃…. 심미량은 선물을 줄 때마다 "아끼는", "예쁜"이란 형용사를 붙이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말인즉, 별 것 아닌 사물이 아니라 자신에겐 많은 의미가 있는 사물이란 것이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의 복판에 있으니, 이에 걸맞게 생각해보자. 한때 캔뚜껑을 5,000개 정도 모아가면 휠체어를 준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그게 사실이었다고 해도, 유창창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와 휠체어 가격 또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돌멩이는 아예 제작비도 들어가지 않는 자연물. 과연 작품과 교환될 수 있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유창창은 '그렇다'고 한다. 그는 제정신인가? 미대륙을 '정복'한 이들 중 일부는 맨해튼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비즈(beads) 몇 알을 주었다. 그리고 정복자들은 원주민에게 토지소유권을 가져왔다. 아마도 원주민들에겐 토지의 사유화, 재산화란 인식 자체가 없었을 테고, 그 사기꾼들은 소유권이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생각했을 것이다. 심미량이 덧붙인 수사는 이를테면 별 것 아닌 사물에 담긴 주술적 의미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즈는 빛을 투과해 영롱하기라도 해서 원주민들이 나름의 상징적 의미나 성스러움을 부여했겠지만, 심미량이 선물한 공산품과 별다른 특성 없는 자연물은 누가 봐도 형태적 특수성을 제외하고는 별다를 게 없다. 이것들은 사용가치나 교환가치가 일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종교적 의미가 없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유창창은 그 선물을 받고 잠시 머뭇거렸다. 작가가 돌멩이, 그것도 애완견 화장실에 쓰였던 돌멩이에 가치를 상정하고, 이걸 제 작품에 투사하기란 그야말로 난제다. 그런데, 유창창의 작품은 어떤가. 미술시장에서 수백만 원이 한다고는 해도, 이것 역시 사용가치는 없는 사물이지 않은가. 돌멩이나 캔뚜껑보다 그의 그림이 보다 강한 물신성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창창은 심미량에게 전부터 계속해오던 연작의 일부를 주었다. 작품가로 따지자면 00만원에서 000만 원이며, 들어간 시간과 노력, 재료비 등을 미술계 바깥의 일반적 보수 기준으로 따진다면 측정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자연물도 공산품도 아니며, 팔리기는 하지만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가 애초에 심미량과 선물과 작품의 교환을 '약속'했기에 그 과정을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그대로 이행했다. 작품과 돌멩이에 등가교환이 이루어지는 일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윤호_Mushroom_잉크젯 프린트_42×59.4cm_2015
이윤호_Tailor shop_잉크젯 프린트_59.4×42cm_2015

작가이자 사업가에게 최고의 선물이란? ● 이윤호는 그의 바지춤에 자동 필름카메라를 차고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스냅샷을 찍는다. 그는 사진을 보정 없이 싸구려 종이에 출력하곤 하는데, 이러한 촬영 태도가 작품의 미학적 위치 태도을 설명한다 해도 무방하다. 도시공학을 전공한 탓인지, 벤야민이 말한 "도시산책자"의 자세를 취하는 그는 일종의 땅따먹기를 진행하며 일상의 여러 면모를 촬영한다. 이윤호는 4대 보험이 보장된 직장에 다니고 있고, 을지로에 만물상회엔 '우주만물'과 술집겸 문화공간인 '신도시'의 공동운영자로 일한다. 직장인이자 개인사업자이기도 한 작가는 경제활동에 꽤나 능동적 면모를 보이며, 비교적 수월하게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워크숍 참여자인 이강준, 이수림, 한석경은 작가에게 신도시의 개장을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증여론은 일차적으로 가치에 상응하는 물질을 교환한다는 데 의의가 있는데, 이윤호와 그의 그룹은 따지자면 노동력(비물질)과 작품을 교환한 셈이다. 기획자는 치과치료비로 의사에게 작품을 건넨 작가의 일화를 들어본 바 있는데, 마치 그와 같다. 노동력을 화폐로 환산하는 방법과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워크숍 참여자 이강준의 사례를 보자. 인테리어업과 작업 활동을 병행하는 그는, 공사 현장에서 하루 일당으로 받는 적정한 기준이 있다. 일당은 시간대비 육체노동 강도, 전문성 등에 의해 정해지는데, 이강준은 신도시의 전기 배선 작업과 벽면 도색, 간판 작업을 해주었다. 그는 두 차례나 12시간가량, 밤 11시까지 일을 도왔다. 일한 시간과 그가 지닌 전문성으로 따지면 공사 현장에서 받는 임금의 두 배는 받아야 될 것 같았다. 이윤호도 이강준을 보며 그저 편하지만은 않았을 테다. 한편 한석경은, 신도시에서 판매할 안주와 담금주 등 자신의 요리 비법을 이윤호에게 전수해주는 동시에 상당한 양의 절임음식과 손수 만든 국화주를 건넸다. 5월 22일 신도시 개장 행사에서 제공된 이 음식은 반응이 좋았다. 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고 있는 이수림 역시 준비 공사를 함께 했고, 신도시의 개장 행사에서 단기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사업가가 공짜 노동력, 재능기부, 지적재산권(기획자는 이 개념에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만)을 대가 없이 취할 수 있다면 신바람날 것이다. 이로써 창출되고 누적되는 자산이 모조리 자신의 몫으로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윤호는 기본적으로 사진작가이고, 그가 취하고 있는 경제활동이 곧 그의 작품활동과 끈끈하게 연계된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창작활동에 필요한 건 두말 할 것 없이 돈인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목적과 수단 사이에서 많은 갈등과 혼동을 겪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만들어 보자. 전시에는 워크숍 기간인 4월과 5월 중 촬영한 작품이 걸려 있다. 이 기간에 작가는 분명 참여자들의 '선물'과 '도움'을 받았다. 과연 그들의 의미와 가치가 이윤호의 사진에 드러나고 있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작가가 사회에 증여하는 가치란 게 과연 있는 것인가? 혹은 이윤호가 작가로서, 수증자로서 의무이행을 져버린 것인가?

정찬일_사물의용도捨物懿庸圖-서너명이애기하며차마시는탁자_디지털 프린트_2015
정찬일_키177cm,산만한스물여덟살남자가허리를펴고앉는의자_디지털 프린트_2015

욕망이라는 속편한 개념으로 환원시키지 못 하는 것엔 무엇이 있는가? ● 정찬일은 워크숍 참여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할 뿐이었다. 시각예술에서 모델이 지니는 지위에 대해 설명하려면 초대형 전시가 필요할 것이다. 사진과 영상 작업을 선보이며 주로 공공예술 프로젝트에서 활동했던 작가가 2012년부터 「키000cm, 000한사람이앉는의자」 시리즈를 제작했다. 모델의 신체에 딱 맞는 의자를 만들어주는 작업인데, 전 과정이 수공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히 한 개인에게 헌정되는 의자와 모델의 사진 작품이 한 세트를 이룬다. 가면을 쓰고 있는 모델에겐 익명성이 부여되며, 의자 또한 크기와 형태가 익명화 되는데, 실제로 의자는 단 한 명을 위한 것이다. 서로 다른 체형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이들을 모델로 하여 200여 세트를 만드는 것이 정찬일의 목표다. 모델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작업을 진행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고, 참여자들에게 모델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 조금 소박한 바람을 더 보탠다. 작가는 그들이 연희동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와 말동무를 해주길 바랐다. 비 오는 날 도시락을 싸고 작업실에 왔던 안소현이나 노혜리는 워크숍 기간에 취업이 이루어져 불가피하게 하차했고, 남은 건 오윤명뿐이었다. 오윤명은 주말마다 정찬일의 작업실을 찾아 의자 제작을 거들었다. 이후에 워크숍에 참여한 LHL은 연작의 모델 역할만을 했다. 적어도 이번 정찬일의 작업은, 그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아니란 걸 말해주고 있다. 끝없는 욕망에 따라 경제 원칙을 추종하는 것이 정녕 인간의 본성일까? 이 속설은 무망한 것임을 이미 여러 시기를 지나며 증명되었다. 창작활동도 충분히 그 예에 들어갈 수가 있지 않은가? 작품 거래로 경제적 이득이나 재산을 축적한 바 없는 이들이 이어가는 창작활동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 이정헌

Vol.20150528g | 눈에는 이, 이에는 눈 An eye for a tooth, a tooth for an eye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