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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5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토,일요일 휴관
308 at 156 Project Art Space 156 Fifth Avenue, Suite 308, 10010 New York USA Tel. +1.212.271.0664
사랑의 얼굴 또는 밝게 채색된 시절 ● 1. 팝의 시대 정교하고 깔끔하게 구성된 이미지와 채색, 키스하는 연인, 미소 짓는 여인, 상쾌하고 경쾌한 일생이 눈앞에 펼쳐진다. 작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풍경화에서 전형적인 팝아트의 스타일로 작품경향을 변경한 후 2000년대 한국의 변화하는 시각문화의 풍경을 선명한 채색과 젊고 발랄한 인물들로 표현해왔다. 유난히 화사한 이미지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생하게 느끼는 것들이 화사하고 밝게 채색된다. 정교하게 채색된 면들이 크고 작고 또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조직되어 있다. ● 조강남의 작품을 포함해 많은 한국의 팝아트 풍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1970년대 수용된 팝아트의 정신과 양식적 특징들이 199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확대되던 시기를 지나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국경과 문화의 고유성보다는 전 지구적 도시문화의 보편성을 내재화하고 있다. 고도로 정교해진 서비스산업과 정보통신 환경, 순식간에 세계를 휩쓰는 유행. 물론 조형적이며 형식적인 유사성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작가들마다 생각하는 팝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 인간의 실체와 삶의 진면목 등이 팝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 일정한 수준의 산업화와 경제적 시스템을 갖춘 국가나 도시에서 팝아트가 나타나는 것은 마치 자연현상처럼 보인다. 대량생산과 유통과 소비, 대도시들, 대중과 대중문화, TV와 컴퓨터를 비롯한 스마트시대의 각종 미디어 환경에서 팝의 정서와 표현이 서식한다. 모든 것이 기호로 변환 가능하고 의사소통이 되는 시대, 개인주의가 득세하는 20세기는 역설적으로 철저한 개인으로 고립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개인의 사생활과 고독한 일생은 먼 옛적 전설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의 이미지 또한 독특한 개인성이 드러나기 보다는 점점 더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미와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을 굳이 미학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바로 팝이 될 것이다. ● 되돌아보면 20세기 중반 이후 몇 가닥의 화파(~ism)가 중심이 되었던 시절을 뒤로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는 보다 다원적이며 복잡한 양상으로 변화하여왔고 미술의 흐름 또한 이와 연동하며 전개되었다. 이제는 미술가 한명 한명이 모두 독자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연대하거나 공감할 수 있었던 과거의 공동체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는 깊은 고립감. 그리고 그러한 인식과 정반대로 화려하고 밝게 표현되는 인간과 세상. 고독과 고립과 그 그늘과 깊이만큼 역설적으로 밝고 화사한 이미지라는 이 이상한 양극성은 많은 팝아트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2. 여성 또는 캔디걸 ● 제 작업의 주제는 현대를 사는 젊은 여성들입니다. 저는 그녀들의 삶, 사랑, 욕망을 그립니다. 저는 그녀들의 이름을 candy girl이라 부릅니다. (조강남, 작업노트에서) 큰 화면 가득 매력적인 여성이 관객과 눈을 맞춘다. 눈을 맞추는 여인 주위로 달콤 쌉싸름한 사탕과 시럽이 배경 가득 떠다닌다. 마치 예쁜 선물 포장지를 배경으로 관객에게 자기 자신을 선물하듯 여인이 있다. 눈을 맞추면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녀는 단지 이미지일 뿐이지만 말이다. 평소 꿈꾸었던 이상적인 여성을 만난 것처럼 관계가 형성된다. 현실의 여러 골칫거리를 잊게 해주는 그녀는 현실 속 어느 여인보다 매력적이며 위로를 준다. 사랑과 위안으로 가득한 유쾌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경쾌한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난다. ● 최근 작품들을 보면 선남선녀가 서로 껴안고 키스하고 사랑의 감정을 나누고 있다. 바람도 분다. 오래전 유하의 바람이 불면 압구정동을 가자고 했던 시가 있었다. 압구정동으로 은유되는 도시의 남녀가 보내는 행복한 시절, 사랑의 계절을 떠올린다. 기법적으로는 여전히 밝은 팝의 이미지를 연출하지만, 조강남 작가는 이전의 매우 정교하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보이던 스트로크 대신에 점점 더 느슨하고 흐트러지며 작가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스트로크로 변화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어느 광고의 한 장면처럼 연출을 한다. 세련된 색 회색의 바탕에, 늘씬한 외모의 여성에게 유명한 디자이너의 옷을 입히고, 명품 브랜드의 백을 들게 하고, 섹시한 하이힐을 신긴다. 그리고 긴 머리를 날리며 연인에게 다가가 kiss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누구 디자인? 어디 브랜드? 모든 부정적 언어는 다 사라지고 멋지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 설렘이 있다.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는 없지만 아름답게 보이는 그 순간을 영원히 나의 canvas에 남기고 싶다. (조강남, 작업노트에서) 오늘날 브랜드는 '소유하고 싶다'와 같은 뜻이다. 소유의 주체이건 소유의 객체이건 소유는 미덕이다. 멋진 패션과 핫한 브랜드와 그것을 소유한 그녀는 동의어이며 현실과 환타지아가 융합된 정체성을 의미한다. ● 얼마 전 유행한 쇼퍼홀릭(Shopaholic)이란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상품과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여성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은 한 개인의 특별한 캐릭터라기 보다는 현대 시장경제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현대 여성의 심리를 잘 재현했다. ● 여성의 시선으로 본 세계와 인생은 성찰과 반성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둡고 고난한 일상일지라도 남자와 달리 여자는 삶을 이어가야한다. 본능적으로 여성은 자아를 확장하여 이타적 관계를 형성하곤 한다. 과장하자면 유난히 따듯하고 행복한 순간은 오직 여성의 것이다. 여성의 섬세하고 보다 정밀한 시선과 관계성이야말로 조강남의 이미지에 공감하는 전제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일 수 있지만 그 역은 그렇지 못하다. ● 작가가 앞선 작업노트에서 토로했듯 여성들은 상품과 브랜드로 포위된 사물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아주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여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구축하려 노력한다. 상품과 브랜드에 중독된 여성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성찰하고 반성한다. 쇼핑중독으로 완숙해진 소유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시장경제의 고도 자본주의를 견디고 선용하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3. 사랑의 얼굴 ● 모든 예술은 진지하다. 그 외연이 어떠하든 자기 자신의 심리에 대한 깊은 성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회적 현상과 자연변화에 대한 유별난 관심과 몰입 등은 예술가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종사하는 한 우리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성실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고독한 순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 작가는 일관되게 중력을 거부하듯 자본과 상품과 유희하며 무중력 상태로 떠오르는 여인들을 달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비록 사물화 된 에로티시즘일지라도, 또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달콤한 것이다. 결코 지루하지 않은 순간이 연속되는 현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의 주요한 경향이 '캔디걸'의 사생활로 표현된다. 조강남의 그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의 순간이자 환희이다. 그것은 '사랑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개인의 아니 일반 대중의 보편적인 환타지일지라도. ● 그림 속 인물은 작가나 관객 자신처럼 동일화되는 나르시스의 회복을 통해 사랑은 구체적인 얼굴을 회복한다. 모호하고 흐릿하던 얼굴은 점점 실체를 갖게 되고 그것은 작가이자 관객의 시선에 초점을 만들어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이미지이다. 어쩌면 기호로 살아남아 유통되는 가장 유력한 사랑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 조강남의 인물들은 미남이고 미녀이고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순수하게 몰입하고 공감한다. 어떤 갈등도 고통도 끼어들 틈이 없는 순간이다. 관객은 기분 좋게 그림 속 인물들을 질투할 수 있다. 질투하는 순간마저 유쾌하고 행복하다. 세상이 정말 저렇게만 되어간다면 모든 예술가는 고통의 예술로부터 해방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밝고 아름다운 순간은 사실 너무도 어두운 불안과 깊은 우울과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떠올리니 그게 우리 인생의 비극이다. ● 인생의 의미는 누구도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우디 앨런).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도 사랑이 넘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방향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충동이다. 사랑의 뒤 머리만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지나쳐 가버리는 사랑의 순간을 부여잡고 그 얼굴과 눈을 마주하고 싶은 것이다. ● 조강남 작가의 이미지는 아직까지는 무리 없이 작동하는 이미지의 세계, 자본주의의 건강함과 도시생활의 기쁨과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인 것이다. 관객은 현실의 희로애락과 사회관계의 좌충우돌 속에서 사랑과 평강이 넘치는 팝의 세계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사랑의 얼굴을 마주한다. ■ 김노암
Vol.20150520h | 조강남展 / CHOKANGNAM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