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 박수근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The Deeply Rooted Tree ; Park Soo-keun was not shaken by anything.

박수근展 / PARKSOOKEUN / 朴壽根 / painting   2015_0502 ▶ 2015_0830 / 월요일 휴관

박수근_철쭉_종이에 수채_35.5×45cm_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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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박수근 작고 50주기 추모 특별展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Park Soo Keun Museum in Yanggu County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정림리 131-1번지) Tel. +82.33.480.2655 www.parksookeun.or.kr

박수근 선생 1914-1965 ● 흔히 예술은 인간성의 총합이라 일컬어진다. 이는 예술작품이란 곧 창작자의 인성의 결정체라는 의미인 듯싶다. 인본 자체에 연관된 이런 식의 비교 해석은 현대 미술이라는 급류에 쓸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1965년 5월 6일 서울에서 간암으로 별세한 박수근 선생은 인간으로서 인본적인 시각을 결코 잃지 않았던 분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시초부터 위선이 전혀 없는 순수한 인성을 담고 있다. 한국 미술계의 다양한 색을 가진 천 명 이상의 작가 중 박 선생은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가장 한국적인 작가였다. 신실함과 단순함은 그의 가장 위대한 덕목이었고 그라는 개인과 그림에 반영되어 있다. … ● 시골의 강인하고 꼿꼿한 성품을 지닌 그가 도시의 생활에 맞춰가야 했지만, 잘 살기 위해 남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리는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교수의 길로 들어서게끔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삶의 목적인 예술의 창조를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잘나가는 인생보다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유를 더 사랑했는데, 이것이 그의 작품이 비교적 작게 판매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내재된 예술적 탁월성은 이런 일로 훼손되지 않았다. …

박수근_고목과 아이들_하드보드에 유채_30×21cm_1964
박수근_새_보드에 유채_10×15cm_1960_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수근_시장의 여인들_하드보드에 유채_11.6×21.8cm_1963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단순성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예술창작을 하였는지를 떠나 그의 비숙련성에 기인한다. 그의 그림은 거의 원시적인 활기를 담고 있으며 병적인 스타일이나 기법에 오염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니며, 차라리 한 예술가가 특정한 시대에 노출되면서 맞닥뜨리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드문 현상이라 하겠다. … ● 박수근 선생에게는 천진함, 서민적 기질, 그리고 원시적 열정 등이 있다. 그가 바보처럼 꼿꼿하다고 하지만 이는 그를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게 한다. 그는 잘못되었다고 할 정도로 세련되지 못하고, 그의 표현은 가장 원시적이고 따라서 가장 원본적인 "프로토 표현"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는 보는 이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지혜가 있다. 그의 작품을 채우고 있는 어떠한 것도, 모조리 변하고 지겨움의 늪을 헤어나지 못해서 시대의 변화를 추구하는 세태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산 사람이었다. … (1965년 6월 1일. 「코리아 저널」 KOREA JOURNAL. June 1965) ■ 이경성

박수근_모자(젖먹이는 아내)_종이에 연필_73×51cm_1958

박수근, 선의 미학 시대를 긋다. ● 일반적으로 드로잉은 본격 작품을 위한 기초 작업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드로잉에 대한 독자성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세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드로잉처럼 매력적인 미술 장르도 많지 않다. 드로잉에 커다란 비중을 두는 작가들일수록 좋은 작품을 제작할 가능성이 많다. 나는 오지 여행 전문가로 많은 시간을 지구의 외진 곳에서 보낸 바 있다. 한동안 히말라야와 타크라마칸 사막 혹은 중앙아시아는 나의 '놀이터'였다. 실크로드 미술기행이라는 프로젝트를 운영하면서 참으로 많은 미술가들과 오지 여행을 동행한 바 있다. 오지 여행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정 관리의 차질이라는 점이다. 예고도 없이 스케쥴이 바뀌게 되는가 하면 대책도 없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생긴다. 문제는 이같은 짜투리 시간, 기다리는 시간에 미술가들은 무엇을 할까. 상당수의 작가들은 그냥 시간을 죽이면서 보낸다.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짜투리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활용한다. 그들은 스케치 북을 꺼내들고 드로잉을 하거나 메모를 한다. 역시 스케치 북을 꺼내든 화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라고 느끼게 한 작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그림 잘 그린다고 생각하게 한 작가들은 무엇인가 달라도 달랐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드로잉에 대한 중요성을 체득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드로잉을 열심히 하는 경우에 해당되었다. 화가들과 오지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드로잉의 중요성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드로잉은 절대로 유화 작업을 하기 위한 보조수단만은 아니었다. 드로잉 자체가 하나의 완결성을 갖는 훌륭한 장르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스케치 북이 두툼한 작가치고 그림이 시원찮은 작가를 보지 못했다. 드로잉은 하나의 수행이었고, 그 나름대로 완결성을 갖는 장르였다. ● 박수근의 드로잉 작품을 보면 작품성이 높다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즐겨 다룬 소재는 유화 작품에서 선 보인 원형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는 유화 작업을 위한 밑그림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화와의 관계는 별도의 문제로 치고, 박수근의 드로잉 작품은 독자성을 갖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믿고 싶다. 박수근의 드로잉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견고한 구도 그러면서도 선(線)이 갖고 있는 맛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박수근이 추구한 예술세계의 원형은 진선미의 세계이고 그것도 단순미라고 축약했다. 이같은 어록과 드로잉과 비교하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박수근 세계의 원형은 바로 드로잉에도 내재해 있는 것이다. ● 단순명료한 연필 드로잉은 박수근의 회화적 특징과 상통한다. 군더더기를 삭제하고 핵심적 부분만 부각시키는 묘법, 거기에 연필 드로잉의 맛과 멋이 있다. 그야말로 '시대를 긋다', 이같은 표현과 부합되는 작품들이다. 선의 미학을 음미할 수 있다. 선으로 시대를 그은 박수근의 드로잉, 거기에서 박수근 예술세계의 원형을 만끽하게 된다. 하기야 선으로 시대를 그을 수 있는 화가가 몇 명이나 될까. 박수근의 드로잉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자문(自問)이다. ■ 윤범모

박수근_창신동 기와집_종이에 연필, 크레용_23.1×29cm_1956

창신동, 그 곳 ● 당시, 기동차가 동대문에서 유원지 뚝섬까지 왕래했다. 기동차길 따라 판자집들은 용두동 징검다리까지 얼기설기 이어졌다. 추운 겨울이면 소방차가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왕왕거리기 일쑤였다. 불이 나곤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판자촌에서 떨어져있는 창신동 집은 아버지의 px 초상화부 시절의 소산으로 마련한 정남향집 한옥이었다.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700m쯤 가면 화강암으로 지은 동신교회가 있다. 내가 다니던 교회다. 근처 창녀촌은 없어졌지만 옛 모습을 달리한 채 동대문 시장은 아직도 그대로 정겹게 있다. 바로 시장 어귀가 버스 정류장이고 그 건너편이 서울의 사대문을 누비고 다녔던 향수 어린 전차 차고지였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이제나 저제나 그 곳에서 아버지 귀가를 기다렸다. 비가 올 때면 과일 파는 아주머니와 우리 가족은 과일 몇 알에 하나가 되곤 했다. ● 월남 후 당고개로부터 이어진 창신동 정경은 아버지 그림에 빼곡히 채워졌다. 결국 마가렛 밀러 부인이 사는 샌프란시스코에 팔려간 숱한 그림들, 고향이 된 셈이다. 그래서 아버지 그림에는 그 시대가 이웃으로 그림마다 문뜩 문뜩 묻어있다. 그리움으로 선하게 그려져 있다. 종이 캔버스, 하드보드에 엠버씽이 되어있는 화판 보드에서다. 그 중에 연필과 종이는 아버지 손을 떠난 적이 없다. ● 안방 책장은 아버지의 지성소와도 같았다. 애지중지 그려 놓은 연필화는 큰 산처럼 정물화처럼 책장 안 하모니카 옆 그 자리에 항상 있었다. ■ 박성남

박수근_기름장수_목판화 원판, 나무에 조각_30×20cm_1950년대

박수근의 판화와 사후판화 ● 박수근은 순수 판화가가 아니었다. 박수근 판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작품세계, 이를테면 유화· 수채화· 드로잉· 삽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세계에 대한 공통점을 전반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수근 특유의 거칠거칠한 마티에르는 그의 작품세계에 전반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석물을 프로타쥬 하거나 탁본하는 등의 시도는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하기 위한 실험의 장이었다. ● 박수근의 판화는 일종의 모노프린트다. 1950년대 중반 당시만해도 이미지를 유추해 내기 위해 사용했던 판의 재료가 다양화되지 못했고 인쇄도구 역시 전문화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유족에 의하면 박수근이 목판화에 사용한 판재의 대부분은 포장박스 나무판, 건축재, 가구재 등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판재였다고 한다. 그조차 귀하여 한판에 앞뒤로 판각을 하거나 한 면에 여러 작품을 동시에 새기기도 하였다. 찍는 방법도 수건을 말아서 누르거나 방석을 덮고 손과 발로 눌러서 찍었다고 한다. 박수근은 같은 원판이라도 찍어낼 당시의 목적과 상황에 따라 물감, 종이, 누름의 표현기법에 각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1958년 제 1회 한국판화창립협회에 출품한 「노인과 여인」 작품은 수성 물감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독립된 작품으로 표현하였고, 지인에게 보내는 연하장, 책의 삽화 면에 사용했던 판화는 원판의 크기조차 천차만별이다. 그는 물감의 농도조절과 누름의 강도에 의해 찍혀져 나오는 판화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고 있다. ● 박수근은 목판화 외에도 리놀륨 판화, 은화지 판화, 프로타쥬, 탁본 등을 제작했다. 다양하게 확장된 판화의 양식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겹겹의 층과 층 사이가 만들어 내는 거친 질감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한 흔적이다. ● 박수근 판화의 특성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의 이미지와 질감이다. 결코 화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소박한 일상의 고단함과 수고스러움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이렇듯 유화와 드로잉, 수채화, 삽화 등에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일상의 소재들은 판화에서조차 일관되게 보여지고 있다....중략 ● 박수근의 경우 총 4차례에 걸쳐 사후 판화가 발행되었다. 첫 번째는 1974년 12월 당시 충무로에 있던 백록화랑에서 판화16점, 스케치 29점을 전시하면서 목판화 화집을 제작해 일부를 판매하고 일부는 기념품으로 홍보한 것이다. 목판 원판을 소장하고 있던 박성남(박수근의 장남)은 석도륜(전각가, 미술비평가, 불승)의 입회하에 박인숙(장녀)과 함께 목판화를 직접 제작했다. 제작 목적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박수근 판화의 대중화였다. 박수근이 생전에 제작했던 방법을 그대로 재현해 내기 위해 수성물감을 사용했고 바렌 대신 수건을 말아 문질러서 찍어냈다. 당시에 발행한 백록화랑 화집에 실린 작품은 박수근의 작품이 아닌 박성남과 박인숙의 작품이다. 일정량의 에디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두 번째 사후판화는 1975년 문헌화랑에서 기획한 작고 10주기를 기념하며 제작되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김종학(서양화가)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문헌화랑 도록에는 그가 제작한 판화 중 8점의 판화가 실려 있다. 이를 기획한 송향선(현 가람화랑 대표)에 의하면 도록에 실린 작품들은 박수근의 작품들이 아니라 김종학이 제작한 판화라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는 제작년도가 1957년께, 1958년께 등으로 표기 되어 있고 에디션과 낙관 부분도 편집 되어있다. 이 도록만 보면 박수근이 1957년께 제작한 판화로 오해 할 소지가 충분하다. 목판 원판의 제작시기로 표기했어야 마땅하다. 당시에도 제작 목적은 기념사업차원에서 박수근 판화의 홍보와 대중화를 위함이 지배적이었다. 박수근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 1975년 김종학 제작의 사후판화 에디션을 보면 한 작품당 10점 내외로 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역시 일부는 판매하고 일부는 홍보 기념품으로 증정하였다고 한다. 박수근 작품의 호당 가격이 5만원이었던 시절이었고 판화의 가격은 5천원정도로 거래되었음을 감안할 때 화랑이 수익을 얻고자 추진한 사업이라고는 볼 수 없다. ● 세 번째 사후판화는 2002년 박수근미술관 개관 기념사업을 추진하기위한 박수근선양사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서양화가 함섭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때는 총 8점의 목판화를 50부수로 제작하였으며 재발행 부수를 명료하게 표기하였다. 함섭은 수성잉크를 사용했으며 바렌으로 문질러 이미지 표현을 구체화시켰다. 원판의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판화제작에 매우 어려움이 있었다고 회고 한다. 유성물감을 사용한 흔적이 있어 기름때를 제거하느라 스팀을 쏘여가며 닦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종이는 원주한지(무형문화재 유희영)에 제작하였다. 박수근미술관 개관기념 전시 도록인 「박수근의 삶과 예술」 도록에 실린 이 판화들에는 판화의 원판크기가 아니라 종이크기가 적혀있다. 판화제작의 의의와 목적, 사후판화 제작자 등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자칫 박수근의 판화로 오해 할 소지가 충분해 보인다. ● 네 번째 사후판화는 2012년 박수근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실행위원회가 발행한 『박수근목판화 전작집』이다. 이 판화전작집은 판화가 박광열이 제작했으며 사후판화발간에 대한 의의와 목적, 내용, 기법과 발행 부수 등이 팩키지 안에 기록되어있다. 박광열은 원판상태가 고르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수지 틀로 복제하고 순수펄프를 이용하여 수제한지를 규격에 맞게 만들고 1판1색, 20종 150부수를 제작했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도록과 『박수근과 한국판화』 전시도록에는 목판화 전작집 발간의 의의와 발행개요, 작품제목, 재료 및 기법, 판화 원판 크기, 종이크기가 개별 기록되어있다. 총 150부의 판화가 제작 완료되면 c.p를 제작하고 회의를 거쳐 수지복제판의 파기 혹은 전시용으로서의 영구보존 여부를 결정지을 예정이다. ■ 엄선미

Vol.20150505g | 박수근展 / PARKSOOKEUN / 朴壽根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