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라._랄라라 랄라

추유선展 / CHOOYOOSUN / 秋有宣 / video.installation   2015_0505 ▶ 2015_0511

추유선_440&493.883_파이프, 깔대기, sound_설치_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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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505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_02:00pm~07:00pm

사이아트 스페이스 CYART SPACE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Tel. +82.2.3141.8842 www.cyartgallery.com

사물의 경계와 사이 공간에서의 감각의 기록 그리고 시선 ● 추유선 작가가 지금까지 해 온 작업은 주로 작가로서 자신이 세계와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의 기록들을 하나 하나 보여주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어느 특정한 주제나 소재에 몰입하기 보다는 낯선 세계의 다양한 양태에 대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다각적으로 접근해 가려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는 작업의 결과물 자체 보다는 보는 것, 듣는 것 등 몸이 직접 감각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고자 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추유선 작가의 관찰 행위는 어떤 일정한 목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단지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었다.

추유선_440&493.883_파이프, 깔대기, sound_설치_ 2015

작가는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비로소 인식된 사물이 그가 있는 공간과 함께 진동하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세계의 깨어남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추유선 작가에게 있어서 본다는 것은 발화(發話) 행위와 같은 것 이었기에 인식의 근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의미의 시작이기도 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발화(發話)하는 행위' 혹은 '본다라는 행위'에 있어서 그 행위의 경계적 위치가 갖는 함의에 주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 사이에서 소리가 진동을 통해 연결되는 과정에서 그 연결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시점, 다시 말해 입 안에 머금음으로 유보된 발화(發話)의 잠재태(潛在態)를 작가는 가능성이 함축된 공간이라는 차원으로 바라보면서 이곳의 다층적 구조와 그 경계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미작용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추유선(with 한미혜)_Call&Response II_전경_종이에 연필, 트레싱 방안지, Mp3 player_78×107cm
추유선(with 한미혜)_Call&Response Ⅱ_종이에 연필, 트레싱 방안지_78×107cm_2014

전시 작업 중 영상작업으로 선보이는 "라.라.라._랄라라 랄라"라는 명제의 작업은 이러한 의도가 잘 나타나 있는 작업이다. 작가는 의성어로 표현된 작업 명제에 대해 아이들이 기분 좋을 때 부르는 콧노래이며 뜻 없는 소리임을 전제 하였다. 그리고 '라'는 음악에서 기준음이 되는 소리라는 점에도 고려하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가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지점은 이 소리가 아무 의미가 없으면서 동시에 본능적 느낌을 표현하는 원초적인 소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상에서는 작가는 이 콧노래와 함께 일상적 공간에서 원을 그려가며 달려가는 모습을 화면 안에 담았다.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양쪽 다리에 각각 두 개의 카메라를 원 안쪽과 원 밖을 향하게 하여 찍고 나서 이 두 영상이 한 화면에서 겹쳐지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겉과 속이 섞이면서 중층화되어 나타난 화면은 낯선 모습의 초현실적 공간과 같은 구조로 다가와 일종의 현기증마저 느껴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추유선_라.라.라.랄라라 랄라_영상_00:03:07_2014_부분
추유선_라.라.라.랄라라 랄라_영상_00:03:07_2014_부분
추유선_라.라.라.랄라라 랄라_영상_00:03:07_2014_부분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하여 단순히 소리나 영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양가성 그 자체만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혹은 이성과 감성의 양자적(兩者的) 간극의 그 규정하기 어려운 경계면 사이 공간을 극대화 하고 그곳에서 경험하는 미묘한 감각에 대해 그 위치를 묻는 질문을 가시화하여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감각과 경험이라는 것이 결국 개인마다 차이와 간극이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일방적으로 정의하기 어렵고 극히 모호할 수 밖에 없기에 작가는 이로부터 인식과 의미 과정에서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작가가 시각과 청각 등 여러 감각의 범주를 넘나드는 가운데 그 경계 에서 작가의 스스로의 행위를 매개로 하여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기록화하고 이를 다시 텍스트화 하여 그 인식과정과 의미작용 점검해 나가는 방식은 주목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또한 여기서 단순히 어떠한 사실이나 행위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사물과 상호작용을 통하여 개입한 사건화된 사물의 기록을 대상으로 하여 이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담론의 차원으로 이끌어내서 이를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 이승훈

추유선_소리의 우물_파이프, 깔대기_가변크기_2014

어느날 친구가 내게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던 책은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었다. 책은 그 형식에 있어서 내게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어디까지 에세이고 어디부터 소설인지를 알 수 없게 짜여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을 끝까지 읽었는데 그것은 경계의 모호함에서 오는 매력때문이었다. 미카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 깊이 빠졌던 것이 중심과 주변의 경계없음이 이야기의 속성임을 깨닫게해주었던 것 때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 계기였다. ● 경계는 두 존재를 구별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두 존재에는 사이가 있다. 규정될 수 없는 가능성들이 웅크리고 있는 여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백을 이익을 위해, 또는 편의를 위해, 혹은 아름다움을 위해… 눈감는다. 발화되지않음으로서 진동될 수 있는 공간이 '경계'라는 이름으로 탄성을 잃어 버린다. 간극이 세밀하고 섬세한 공간들은 하나의 평균치로 묶이고 간극과 사이는 무시된다.

추유선_소리의 우물_건물 내부_파이프, 깔대기_가변크기_2014
추유선_소리의 우물_건물 내부 화장실_파이프, 깔대기_가변크기_2014

이름은 발화되면서 그 존재를 찬란하게 드러내기도 하지만, 입안에 머금으면서 더 많은 의미를 갖기도 한다. 나는 이미 발화된 것 보다는 머금어진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발화됨으로 찬란해진 존재 안에는 발화되기 전까지의 머금음의 시간과 다층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머금음은 침묵으로 흐르고 공유되는 공간으로 타인이 아닌 타자의 공간으로 경계가 없다. 그러나 발화된 이름은 그 자체의 강한 존재성으로 타인을 드러낸다. ● 머금음의 공간은 육체를 통해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경계는 육체의 수축과 이완, 진동과 멈춤 등의 끊임없는 운동으로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얼핏 드러난 이 공간은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진동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파괴... 이것이 결코 경계지을 수 없는, 포획할 수 없는 우리 세계가 아닐까한다. 아무것도 아닌 관념적이고 육체적인 진동의 공간... ■ 추유선

Vol.20150505c | 추유선展 / CHOOYOOSUN / 秋有宣 / video.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