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cent state

장우석展 / JANGWOOSUK / 張祐碩 / painting   2015_0507 ▶ 2015_0602

장우석_Nascent state-The Birth of Venus_유채_120×90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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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석 인스타그램_@jangwoosukartist

초대일시 / 2015_0507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김리아갤러리 청담점 KIMREEAA GALLERY CHUNGDAM 서울 강남구 선릉로148길 48-1(청담동 19-20번지) Tel. +82.2.517.7713 www.kimreeaa.com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김리아갤러리 이태원점 KIMREEAA GALLERY ITAEWON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64(이태원동 210-29번지) 1-D 윈도우갤러리 Tel. +82.2.517.7713 www.kimreeaa.com

이미지 시대다. 문자의 시대라고 했던 것이 불과 반세기 전이다. 이제는 이미지가 다양한 매체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먹으면서 살아간다. 이미지는 소비되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 속의 이미지나 인터넷 속의 이미지, 심지어 뮤직 비디오나 드라마 영상 같은 이미지는 전부 소비된다.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를 완전히 물릴 때까지 먹는다. (소비한다.) 그런데 회화작품도 일종의 이미지다. 그러나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작품이나 렘브란트, 혹은 겸재 정선의 회화작품으로부터 물리거나 진력이 났다는 소리를 쉽게 듣지 못한다. ● 인간은 원래 외부대상(景)과 자기자신(情) 사이에 둘이 아니었다. 외부 모든 세상은 마술처럼 나와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외부대상에 상징, 기호를 새겨 넣었다. 그러다 안료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지 발생으로부터 나와 외부대상은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면 개념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미지로부터 형성된 개념은 정밀한 살이 아니다. 그것은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갑각류나 과실을 연상시킨다. 그 껍질 속의 살을 발라 먹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문자는 이미지를 깨서 고운 살로 발라낸 것이다. 문자가 생기고 역사가 생겼다. 이미지가 개념 전달의 주요 수단이었던 세계는 순환적이었다. 더 정교한 문자 세계는 역사의식의 형성과 함께 논리적 인과관계의 이해를 가능케 했다. 따라서 문자가 전달의 주요한 수단이었던 세계 사람들의 의식은 직선적이다. 논리의 인과관계의 이해는 수학이라는 문을 열고 과학이라는 세계까지 확장되었다. 그런데 과학적 세계 속에서 카메라 사진, 인터넷 이미지, 영화, 드라마와 같은 기묘한 이미지가 생성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실보다 더 사실 같다. 그러나 카메라가 만든 사진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방점이다. 영화나 드라마 역시 이미지 프레임의 촘촘한 배치에 불과하다. 이들을 만들어낸 것은 0과 1의 이진법의 세계이다. 즉, 문자의 세계다.

장우석_Nascent state-Flower 2_유채_90×120cm_2015
장우석_Nascent state-Zephyrus & Chloris_유채_90×60cm_2015

우리의 뇌는 1초에 4000억 개의 어마어마한 정보를 수용해서 2000개로 걸러낸 정보로 정리한다고 한다. 2000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촉각으로) 만져보는 감각으로 만든다. 불교에서 이를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불교는 그것을 색 〮 수 〮 상 〮 행 〮 식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맞춰진 형식이다. 쇼펜하우어는 그 오온을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명상적 세계를 그는 의지(will)라고 말했다. 오온이나 표상은 진실이 아니라 환각, 즉 마야(maya)에 불과하다. 이 마야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면 찾게 되는 아트만(atman)의 경지는 오온을 벗어 던지려는 의지 외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잃어버린 3999억 개의 정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가 그것까지 파악한다면 아마 미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 우리가 먹으며 소비해버린다고 단정하는 이미지는 사실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외부대상의 객관적 확실함의 실상이 우리가 만들어낸 환각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허무하고 무서운 일인가? 나머지 3999억여 개의 정보는 과연 어디로 갔을까? 단순히 무의식이라는 하수구로 흘러버린 것일까? 장우석의회화는이러한질문으로부터시작한다.

장우석_Stampainting-Spring_유채_33×53cm_1978
장우석_Nascent state-Flower 1_유채_90×60cm_2015

이번에 발생기나 발생상태 등으로 번역되는 『Nascent State』로 전시 제목을 잡은 것부터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런데 위의 어려운 영어 단어는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된다. 화학에서 사용하면 발생기로서 화학 원소의 어떠한 형태(form of a chemical element)를 지칭한다. 심리학에서는 이 용어를 '파괴하면서 얻는 재정립의 과정(process of destructuration-reorganization)'이라고 정의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지를 먹는다. 그것을 파괴하면서 소화한다. 이미지를 먹으면서 그것이 물릴 때(exhausted) 우리는 그것의 의미와 용도를 폐기한다. 그리고 다른 영역이나 새로운 이미지로 이동하려 한다. 즉 새로움에 대한 욕구가 발생한다. 대중음악, 영화, 이미지가 그 끝을 다 하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이러한 이동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문자의 세계는 직선적이다. 논리와 역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방향밖에 없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현대 이미지의 영역은 순환적이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양방향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요새의 분위기를 탈역사적(post-historical)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렘브란트의 회화나 다빈치의 회화는 다분히 역사적이었다. 전대의 옛 법도에 기초해서 다져진 한 개인의 세계에 대한 이상적 구현(ideal realization of world through accumulating canons)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소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회화 속에는 시대에 대한 정감과 논리적 의무감이 내재되어있었다. 그것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와 미디어 홍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던 강물의 흐름을 마비시켰다. 그것은 뮤직비디오를 마우스로 드래그시키면서 전후를 무시하여 보듯이 시간의식을 교란시켰다. 교란된 시간의식 속에서 마주하는 이미지는 영광기의 회화처럼 이상적 구현을 학습하고 훈련하며 본받는 태도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제 그것은 단순히 먹이에 불과하다.

장우석_Stampainting-Visible Wind_유채_지름 240m_2014

장우석은 철저한 회화주의자였다. 회화가로서의 한 개인이 세계를 마주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상적 구현을 이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가 2011년도 전시 『Technique of Viewing』에서 보이려는 이상도 바로 순수직관의 세계가 현대사회에서도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한 한계 실험이었다. 그는 바티칸, 콜로세움, 포로로마노와 같은 고대로마의 풍경들을 무채색으로 도입하면서 문화적 전범(典範)의 영원성에 대해 천착했다. 그런데 2013년부터는 그러한 전범을 완전히 버렸다. 회화의 본질이라고 여겨졌던 붓질(brushness)마저 넘어서려고 시도했다. 수많은 형상의 도장을 스스로 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미지 도장을 캔버스 화면에 찍어 누를 때 회화만의 안료가 갖는 물질에 대한 느낌과 즉물적인 도장 이미지가 곧바로 화면에 나타냈다. 도장 이미지는 그것을 만든 것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었기 때문에 탈역사적이었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말법적 분위기를 포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이번에 장우석은 산드로 보티첼리와 반 고흐의 이미지를 우선적으로 차용한다. 이 이미지들은 가장 보편적이고 사랑 받는 이미지들이다. 한 사람은 '우아한 선(線)의 대가'이며 다른 하나는 '열정적 면(面)의 화신'이다. 하나는 메디치라는 후원자를 등에 업은 성공한 화가였다. 하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외톨이 화가였다. 하나는 당대에 모든 인정을 받았지만, 나머지 하나는 후대에야 비로소 전설이 되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그 이유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회화세계를 보고 단순히 즐길 뿐이지 알 수가 없다. 진실에 대한 불가지론에 불을 지피는 것이 바로 회화세계이다. 세상 만사에 대한 설명 무용론에 대해 회화처럼 좋은 예시는 없다. 논리와 인과, 정의, 귀납, 전제, 조건 등의 용어가 무의미해진다. 그것은 소비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있어서 회화는 도리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 원인은 옛 전범에 자기의 창작동기와 능력을 보태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든다는 회화 패러다임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 패러다임을 깬 것은 0과 1이라는 이진법이 만들어낸 매체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매체 때문에 바뀐 우리의식 때문이다. 우리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배를 띄우고 있지 않다. 방향이 혼란스럽고 파고 높은 바다 위에 떠있는 뗏목 신세를 연상하면 된다. 더 이상 좌표나 목적지도 없다. 장우석 작가의 고뇌는 자신이 좌표를 잃은 붕괴된 자아로서의 현대 회화가라는 데 있다. 우선 최고의 상찬을 받는 상반되는 두 대가 작가들의 이미지를 디지털 사진으로 찍는다.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 투명 아크릴 판 뒷면에 전사한다. (플라스틱 판은 가장 값싸고 틀에 짜인 우리의식과 닮았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전사된 이미지 앞면에 미리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만든 수많은 도장 이미지를 찍어낸다. (소비된 이미지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함이다.) 여기까지 세가지 단계에 이르면 이미지와 회화의 관계에서 혼란이 야기되고 진저리처지는 경험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출구 찾기 욕망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작가는 마지막으로 붓질(brushness)을 다시 선택한다. 앞서 파괴와 재정립의 과정(process of destructuration-reorganization)에 대해서 말했다. 세 단계의 파괴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역으로 정교하고 정성 어린 붓질을 재개한다. 재정립의 과정이다. 장우석 작가는 회화의 복원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방향 없는 시대에서 아노미를 탐닉하려는 아나키스트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시대의 기괴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발화자이다. 그는 반드시 이 시대의 기괴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구유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장우석_Nascent state-Flora_유채_120×90cm_2015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순간에 이미 진실을 놓친다. 진실은 오히려 믿음(faith)과 같은 것이다. 최초의 믿음은 매우 진실되고 충만한(authentic) 상태이다. 그러나 보다 정밀하고 완전한 믿음의 상태로 가기 위해서 의심(doubt)이라는 기제가 동원된다. 의심은 믿음을 더욱 정교하고 그럴 듯하게 만든다. 의심에 의해 분해된 믿음은 정교한 믿음으로 재조립된다. 그러나 재정립된 정교한 믿음은 더 이상 이는 최초에 누렸던 진실하고 충만한 상태가 아니다. (inauthentic.)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정교함을 하나 얻고 진실함을 하나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역순은 성립되지 않는다. 장우석은 예술의 역사가 이러한 방향을 추구해서 예술이 스스로를 교살해가는 과정임을 잘 파악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스스로 자기 믿음을 버리고 서구를 수용하면서 더더욱 혼란한 괴물의 모습을 띠어갔다. 우리현대미술계는 의심의 의심(doubt of doubt)이 만들어낸 산물임을 그는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발생기(nascent state)'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터득하는 것이다. 하나를 파괴하고 재정립해서 새로운 미감과 일상의 감각을 누리는 길이다. 발생기는 굳건한 진실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변화과정이다. 그것은 주어와 술어의 (is)의 관계가 아니다. 형성되는 (becoming) 상태다. 굳건한 상태는 안정적이지만 에너지가 적다. 변화의 상태는 불안하더라도 에너지가 발산된다. 작가는 "그 에너지 속에서 고단한 우리 삶의 의미를 찾자."고 말하고 있다. ■ 이진명

Vol.20150504d | 장우석展 / JANGWOOSUK / 張祐碩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