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417_금요일_06:00pm
기획 / 신지현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당대(Contemporary)는 새롭지 않다. 엄밀히 이야기 하자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점점 더 새로운 것과 강렬한 자극을 탐하지만, 그것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현재(대)의 삶이 권태롭다는 것, 새롭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이 새롭지 않은/않을 시대는 언제나 '예측 가능'에서 비롯되는 피곤을 야기한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시대 안에서 예술은 과연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 전시를 설명하기에 앞서, 지금-여기의 시간에 대해 '인용된 현재'라 명명하고자 한다. ● 이 전시는 '새로울 것이 없는 당대'에 어떤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 199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은 기존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생산 방식을 참조한 '미디엄의 재창조'라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동시대 미술 역시 이를 취해 나름의 생존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인용된 현재'란 의미 그대로 각주달린 현재, 즉 이미 기존에 존재해오던 것을 차용해 재편집된 결과물로 구성된 현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각주'에 대한 원문이 되는 레퍼런스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말 그대로 '이-전의 것' 이다. 그것은 미술사 속에서 도출되기도 하고 대중문화 속에서 차용되기도, 웹 상의 데이터로부터 건져 올려지기도 한다. 심지어 스스로를 분(分)한 자기참조의 변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부자연스럽지 않은, 너무나도 익숙한 (인용된) 현재를 구성하게 되었다. ●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미술은 왜 '참조'라는 방법론을 취하기 시작한 것일까? 1960년대 등장한 미니멀리즘 이후 개념미술을 지나오며 현대미술은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던 권위와 신비성을 하나 둘 지워나갔다. 바야흐로 저자는 죽고 원본성은 사라졌으며 영원성 역시 제거된,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혼성, 모방, 다원, 파편 등의 키워드를 앞세워 화려하게 등장한 이 시대는 그 의미 조차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못한 채 막을 내려버렸다. 모든 것이 해체된 상황 속에서 (그 정의조차 명확히 하지 못하고) 폐허처럼 시대가 끝나버린 현 시점에서, 남아있는 조각들을 가지고 이어 붙여 나가는 행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새로움을 발견해 나가는 것은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새로운 방법론' 일지 모른다. 본 전시를 통해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파편화된 방법론'을 통해 재창안된 '새로움'이 될 것이며, 이를 'Post-pictures'라 명명해보고자 한다. ● 김대환, 박진아, 배윤환, 윤향로, 인세인 박까지 지금-여기 모인 5명의 작가들이 구사하는 작업 방식은 결코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로(워보이게)이 재창안 해낸다. ● 이 전시는 '새로운-방법론'에 대한 것이다.
김대환의 작업은 연출된 감정과 그것의 실체 사이에 개입되는 수많은 장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이 입을 통해 의미 함축적인 단어로 내뱉어지고(발화), 이것이 상대방의 귀로 들어가는(청취) 일련의 소통과정 안에 '이입되기 쉬운' 수많은 장치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장치로써 조명, 촬영장의 분위기, 감독의 지시 등을 활용하여 촬영현장이라는 상황(또 다른 장치)을 만들어내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재단된 유행가의 가사(김건모의 (잘못된 만남))를 재료삼아 '어떤 감정 연출해내기'를 시도한다. ● 작가는 배우를 주어진 감정선을 해석하고 소화해내는, 스스로를 재료화시켜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고, 그를 촬영현장이라는 장치('영상'이라는 아웃풋을 위해 수많은 기자재와 도구가 동원되는 물리적인 상황 그 자체)에 투입해 각종 디렉션을 주며 (과장된 연기라는) 결과물을 끌어낼 수밖에 없게 하는 상황을 매개해 나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연출된 최적의 현장 안에서, 배우의 연기는 농도가 짙어질수록 (대중가요의 가사가 담고 있는) 얕고도 극적인 감정의 극치만을 보여주게 될 뿐이다. 이는 감정의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더욱더 많은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최선을 시도하지만) 점점 더 얕아지기만 하는 상황 그리고 이 엇나감이 희극적으로 연출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 작가는 '감정'이란 그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단어 안에 그 의미를 한정 지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럼에도 여전히 '발생된 감정'이 오롯이 전달되길 희망하는 마음, 그러나 장치의 과잉으로 인해 결국엔 실체에 다가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빗나가버리게 되는 (작은) 지점들을 끄집어낸다. ● 김대환은 영상 매체가 구사하는 방법론을 차용해 상황을 연출해내고, 배우라는 미디어를 통해, 유행가의 얕고도 극적으로 재단된 문법을 재료로 삼는 조형언어를 형성해 나간다. 서로 다른 맥락에 존재하던 장치들을 끌어모아 재매개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프로토콜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그가 구사하는 방법론이라면, 이는 동시대 안에서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창작물의 한 형태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배윤환의 작업은 크고 작은 단상들을 체화(體化)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Brushes loaded for bear」는 작가가 평소에 즐겨보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본 캄차카반도에 대한 관심, 그중에서도 동면을 위한 에너지 보충과 종족의 보존이라는 사명을 안고 각자의 생존을 위해 강으로 모여드는 곰과 연어의 관계성에 집중한 작업이다. 곰은 8m에 이르는 긴 캔버스 천 도처에 즐비해 있다. 곰은 반어반수(半魚半手)가 된 연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도 하고,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낚아챌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강물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도, 놀란 눈으로 엎어져 있기도 하다. 반면 곰에게 잡힌 연어는 급박하게 작업노트의 일부를 토해내기도 하고, 붓이나 가위 따위의 도구를 움켜쥔 채 사투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그 모양새도 각양각색인 채 뒤엉켜있는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살육의 현장을 보는 듯 하기도 하고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는 캄차카반도의 곰과 연어의 생존에 대한 몸짓을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작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열망으로 체화시켜 그려낸 회화이다. 여기에서 캄차카반도는 작업실로, 곰은 캔버스로, 연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 즉 작가의 분신이자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진정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2011년도에 그려진 「곰과 연어의 관계를 비유해 만든 배윤환 뇌전개도」의 자기참조 버전이라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캄차카반도의 곰과 연어에 대한 이야기를 회화로 옮긴 것이지만, 그 방법론에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틀에 짜인 캔버스에 그려진 전작에 비해 롤 작업으로 이루어진 후작은 보다 파편적이고 지속가능성을 내포한 회화로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2014년 시작된 롤 작업은 작가의 프레임 안에 갇힌 캔버스로부터의 탈피선언이자 제도에서 벗어나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려는 욕망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모호함을 내포한 시대의 도처에 떠도는 이야기, 이미지, 단상들은 작가에 의해 두서없이, 빠른 속도로 집어삼켜지듯 캔버스 위로 빨아들여졌다. 대형 캔버스 천 위를 오일파스텔과 크레파스를 이용해 채워나가는 과정은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완성된(혹은 완성되지 않을) 이야기와도 같은 그림은 갤러리 벽에 기대어지거나 혹은 바닥에 늘어 놓이며, 심지어 온전히 펼쳐지지 않기도 한다. 이렇듯 프레임에서 벗어난 그의 회화는 온전한 평면의 영역인 벽에서도 벗어나 3차원 공간과의 경계점에 모호하게 위치지어진다. 정리되지 않은, 정렬될 수 없는 비선형적 시퀀스의 모음이 그의 롤 회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라면, 그것을 2차원의 영역 안에 가두지 않고 경계에 위치시키려는 것이 그가 회화라는 매체를 대하는 변화된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윤환은 일상에서 비롯된 작은 관심사를 단발성의 소재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방법론을 발전시켜 나가며 함께 지속해 나간다. 배윤환의 대형회화가 가지는 새로움이란, 자신의 전작으로부터 재매개해 나간다는 점에 있다. 그의 대형 회화는 발전하는 방법론과 함께 메타버전으로 재탄생한다. 시대의 도처에 떠도는 단상을 체화하고 스스로를 숙주 삼아 참조하고 분(分)하며, 작업을 매개해 나가는 그의 행보는 끊임없이 새로움의 경계에 자리하려는 파수꾼을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박진아는 일상 속에서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 수많은 스냅사진 중에서 작업이 될 것들을 선별해낸다. 작가는 '스냅사진'이라는 용어를 연출 사진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며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즉 피사체도 모르게 찍힌 사진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골라내어 그림으로 옮기는 방법론을 구사한다. 박진아의 회화는 이 스냅사진들을 재구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 기록용으로 사진을 찍고 이를 참조하여 회화로 옮겨 그리는 방식은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은 방법론이다. 그러나 작가에게서 포착되는 새로운 점은 하나의 사진이 하나의 그림(1Photo by 1Picture)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닌, 여러 장의 사진들을 그러모아 마침내 한 폭의 그림 안에서 자연스럽게 재현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이중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2004년경 로모 카메라를 통해 의도하지 않게 찍힌 연속 사진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물을 정확하게 담아낸다는 것이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가장 큰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로모 카메라는 감(感)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인화되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결과물이 담겨있는지에 대해 감히 확신을 내릴 수 없다. 이렇듯 확실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동시에 불확실성을 함의하는 로모 카메라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작가는 의도와는 무관한 것들이 담긴 사진을 그려낸다. 그것은 오브제에 대한 관심에서 풍경에 대한 관심 그리고 종국에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후 로모 카메라를 매체 삼아 그려진 '분할된 회화'는 하나의 화면 위에 합치되어나타나는 방법으로 나아간다. ●「남색소파」의 한 화면에는 동일한 남성이 2번 등장한다. 그리고 연이어 「더블」에서는 2명의 남성이 각각 2번씩 그려져 총 4명의 남성이 캔버스에 드러난다. 관람자는 4개의 각기 다른 사진이 한 화면에 합치된 것임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감을 더듬어 담아내듯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녀의 회화는 디테일 역시 간결하게 묘사한다. 박진아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을 그대로 옮겨내는 것이 아닌, 사진이라는 사실성을 담보로 하는 매체가 함의하고 있는 불확실성,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감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끄집어내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콜라주처럼 진행되는 그녀의 작업은 동일인물이 복제되어 연속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같은 장소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시점이 한 캔버스에 담기기도 하며, 여전히 회화라는 영역 안에서 보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에 대한 탐구를 지속한다. 박진아의 회화는 다시점의 파편들을 캔버스의 영역 안으로 들여오는 과정에서 파생된 '제3의 시각'이며, 이는 동시대에 회화라는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새로움의 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향로는 '대중문화'를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그녀가 창조해내는 새로움은 '그리는' 것이 아닌, '지워나가는' 데에서 비롯된다. 한 컷에서 보이는 이미지들은 지워진 것들의 파편/조각들이다. 이것의 실체는 미국의 만화책 출판사인 DC코믹스의 표지 이미지다. 표지 이미지란 늘 그렇듯, 외부에 노출되는 한 장의 이미지를 통해 코믹스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서사를 예고해야 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만들어야 하는 모종의 의무를 지닌다. 단순히 장식적인 역할 이상으로 생각보다 꽤 복잡하고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역할의 중요 지점에는 영웅으로 점철되는 '주인공'이 자랑스레 위치한다. 그러나 작가는 히어로물에서부터 로맨스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사와 주인공으로 장식된 표지 이미지 안에서 인물과 제목 등의 요소를 차례로 제거해 나간다. 제거되는 요소들과 함께 코믹스가 가지고 있는 서사 역시 함몰된다. 그리고 오로지 풍경만이 남게 되는 순간, 작가의 소거행위는 멈춘다. 이 풍경이 로맨스물에서 기인한 것인지, 히어로물의 잔해인지 관람자는 알아차릴 수 없다. 숫자로 이루어진 제목에서 역시 우리는 그 어떤 이야기나 분위기에 대한 예고도 읽을 수 없다. 무미건조한 풍경만이 코믹스의 극적 서사가 자리했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비로소 관람자는 영웅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 작가는 기존의 이미지들을 차용해 전체와 부분을 재구성해내고 그리기와 지우기라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또다른 '새로움'을 모색해 나간다. 극적 서사가 제거된 자리에는 부유물로 남아있는 동선이나 스파크들만이 이 자리에 영웅이 존재했었음을 희미하게 암시할 뿐이다. 그녀는 만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다층의 레이어로 이루어진 구조'에 집중하며 이를 해체/분열시켜 나간다. 윤향로는 극적 서스펜스 뒤에 있던 요소-풍경-들을 전면으로 끄집어내고, 다양한 이미지 안에 섞이고 충돌하던 것들을 수정/재배열함으로써 단편적으로 소비되어온 이미지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녀는 이미지도 서사도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 안에서 그것을 차례로 지워나가며, 소거된 자리에 남아있는 잔해와 조각을 재조합해 새로운 이미지와 서사를 암시한다. 윤향로의 이미지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을 동시대에 제시 가능한 미적 탐구의 결과물일 것이며, 그녀가 취하는 태도는 오늘날 유효할 수 있는 창작자의 면모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세인 박의 작업은 일정 기간 동안 미디어를 통해 보았던 이미지들을 수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구글이나 플리커, 유튜브, 영화, TV 상에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재조합, 재편집하는 과정 안에서 새로운 시각을 탐구해 나간다. 그의 작업은 매스미디어라는 매체가 작가라는 필터를 거쳐 배출되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작가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2006)의 연출방식을 작업방식으로 끌어온다. 작가에게 린치 감독의 영화가 보여줬던 뒤죽박죽 섞여 있는 내러티브는 (스토리는 물론 장면의 의미까지도) 이해하기 힘든 무엇으로 다가왔고, 결과적으로 그에게 이 영화는 '단편적인 이미지'만으로 기억되는 영화였다고 한다. ● 그는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출처를 알 수 없는 혹은 의미가 없는 이미지들을 '모아-변형시켜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는 그저 미디어가 송출해내는 무한 이미지들에서 건져 올린 것일 뿐이다. 건진 이미지가 작업의 재료로 선별되는 순간, 작가는 이것이 이전에 함의하고 있던 맥락을 소거시켜 버린다. 즉 인세인 박의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은 (린치 감독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이미지나 소스가 가지고 있던 맥락보단 그것을 보여주는 연출, 툴 등의 '방식'인 것이다. 그는 (내러티브가 제거된) 오로지 '보여지는'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복제, 분산, 확대, 변형 등의 방법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유도한다. 인세인 박의 작업은 파편적이고 결이 없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이미지 범람의 시대 안에서 창작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용이하고도 유연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 이미지 과잉의 시대 안에서 그가 구사하는 방법론은 창작 행위라기보다는 편집에 가깝다. 그는 소급해낸 이미지를 해체함으로써 관람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언급처럼) "이미 모든 것이 인용된" 오늘날, 인세인 박이 창안해내는 새로움은 이미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를 소거해 나가며 외피만을 소비하는 행위,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이루어지는 기계적이고 파편적인 변주를 통해 발견될 것이다. ■ 신지현
The contemporary era is not original. To be more accurate, the contemporary era is a period when there is nothing that can be original. People still desire more originality and strong stimulation, yet in reverse it shows how tedious and unoriginal our current life is. This unoriginal age brings fatigue from its predictability. In a time when everything is predictable, will art be able to show something new? Before explaining this exhibition, I would like to name the here and now as 'cited present'. ● This exhibition started from questioning the kind of originality we should strive for in a period that has no originality. ● Art after the 1990s has reached a situation of 'reinventing medium' in which it refers to the pre-existing form, content and production method. Contemporary art has also started to find survival strategies in this way. 'Cited present' means the present that has a footnote, namely the present that consists of borrowing and re-editing from the pre-existing. Then, where is the reference of the original that the problematic 'footnote' came from? Literally, it is from the 'pre-existing'. It is emerged from art history, borrowed from pop culture and drawn from online data. It even appears transformed from one's own disassembled pieces. One reason or another, they are both 'pre-existences'. They have come together and formed an utterly familiar (cited) present that is very natural. ● Then why did contemporary art start to adopt such methodology of 'reference'? After going through conceptual art after 1960s' minimalism, contemporary art has gradually erased modernism's authority and mystique. Finally the era of postmodernism when originality and perpetuity is gone, has officially begun; however, the era of hybridism, imitation, pluralism and fragments has come to an end without (either due to lack of willingness or capability) clearly defining its meaning. In the present when everything is dismantled and left as ruins without any clear definition, maybe sticking the remaining pieces together and finding originality inside it is the 'newest methodology' that can be realized in today's situation (after postmodernism). Through this exhibition I would like to share the 'originality' reinvented according to the 'fragmentation methodology'. I would like to call this 'post-pictures'. ● Da hwan Ghim, Yoon hwan Bae, Jina Park, Hyang ro Yoon, Insane Park The five artists here today reinvent something original (or make something look original) from the unoriginal. ● This exhibition is about a 'new methodology'. ■ shinjihyun
Vol.20150418d | Post-picture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