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417_금요일_05:00pm
권현진 『Visual Poetry』展 장준석 『fantasiless』展
관람시간 / 09:30am~07:00pm / 토요일_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사우스 PYO GALLERY SOUTH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B112호 Tel. +82.2.511.5295 www.pyoart.com blog.naver.com/pyogallerys
□ 권현진 / Visual Poetry 추상미술 새롭게 보기 ● 오랫동안 논의 되었던 전통적인 추상화는 재사유가 필요하다. 20세기 현대미술에서 추상화란 형상을 제거하고 구상적이지 않은 것, 서술적이지 않은 것, 환영적이지 않은 것으로 오직 기존 회화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의 자연주의 제거를 통해 단순화한 작품이나 말레비치의 회화의 삭제와 제거를 통한 순수한 평면적 조건을 강조한 흰 사각 캔버스 작품이 그러한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부정과 삭제의 추상과 달리 현대의 추상은 이야기와 이미지의 부재라는 측면 보다는 추상적인 시•공간을 개입하여 구축하고 해체, 재구축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추상이란 어떠한 본질이나 형식에 도달하거나 분명한 원칙에 의해 통일 되어 있는 것이 아닌 비순수한 혼합의 형식이며 추상적인 혼합과 재배치를 수행하는 것이다. ● 본인의 추상작품 또한 어떠한 본질적인 형식들을 추출하고 구체적인 내용들을 비워가는 과정의 추상화가 아닌 비순수한 혼합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닌 내면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것은 추상적 사고로부터 시작되는 추상화를 의미한다. 끝없는 구축과 해체, 재구축을 통해 혼합되어 만들어지는 추상은 작업과정에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시각적 무의식이 존재하며 새로운 추상이 발견된다. 빛의 흐름, 색의 흐름, 물감의 흐름 등 새로운 배열을 혼합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캔버스 안의 그림만이 아닌 그 밖으로 움직이는 선들을 상상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가상성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의 상상과 무의식을 자극하고, 고정된 2차원의 회화작품이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추상적인 사고부터 출발하여 추상을 표현하고 작품에서 보여주는 추상은 여러 형식들로 존속하면서 형식의 변형과 다른 사물들과의 연결 등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재배치되고 이것은 여러 형태의 다원적 세계 속에 존속될 수 있다.
본인의 작품 「Visual Poetry」 시리즈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우리의 희망, 꿈, 비밀, 감정 등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색의 배열과 움직임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를 통해 현대를 살면서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적 흐름을 찾아내고 각자만의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기를 기대한다. 「Visual Poetry」는 자신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만을 보지 말고, 자신이 실제 보는 것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일차적 방식의 보는 방법이 아닌 감은 눈과 눈 표면으로 시각적 환상과 캔버스 밖의 가상까지 보여주기에 집중한 작품이다. 이러한 시각적 환상은 단지 시각적 지각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시각적 지각뿐만 아니라 촉각적 지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원근법으로 그려진 공간이 아니라 단일 시점으로 파악 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다양한 추상적 형태와 색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단순히 시각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다양한 시점으로 시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촉각적 지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 이러한 촉각적 시각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본인의 회화작업에서 유래된 추상성은 미디어아트로 이어져왔다. 영상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추상회화 작품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 한 환영을 만들고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관람객들의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 또한 자극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본인의 영상작품은 회화작업과의 연장선상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통 회화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고 디지털 환경 안에서 아날로그적 수작업이 새롭게 부활되고 있는 오늘날,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영상미학과 회화와의 연관성을 찾아보고자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전통회화에서 보여주는 매체적 물질성과 테크놀로지를 도구로 사용하는 작가의 창조적 개입이 단지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아닌 예술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재해석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회화에서 본다는 것은 원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발견했을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봤듯이 기존 학습되었던 시각이 아닌 시각적인 것의 붕괴를 통해서 새로운 형식의 변형과 재배치를 통해서 다양한 형태의 다원적 세계로 이해해야 한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추상에 관한 것이며 예술에서나 개념, 감각에서나 새로운 혼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무수한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권현진
□ 장준석 / fantasiless 인간이 가지는 의식의 본질은 사회가 형성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수동적 표피에 종속되어 있다. 즉 사회의 관습적이고 도덕적인 성문화된 틀은 우리의 관념을 묶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적 자유는 원칙적으로 반응하는 잘 짜인 수학적 연산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행동이나 사고의 이상적 방향을 알고 있으며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회가 요구하는 원칙적 결과에 근접하는 사람들, 그리고 본능적 자유를 추구하며 본질에 가까운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 알고 보면 그들 사이의 규정과 법칙의 틀에 갇혀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규정이자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이성적 판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한다. '과연 사회가 갖는 이성적 통념은 인간에게 진정한 관념적 자유를 부여할 수 있는가?' 나는 구성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룰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로써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로인해 이상적 자유를 표출시킨다. 그리고 나는 나의 작업을 통해 생성된 새로운 관점들이 사회가 잉태한 규범과 법칙 속에 포함되길 원한다. ● 나의 문자 작업의 발단은 두 가지 기억에서 찾을 수 있다. 아주 예전에 작업실을 장만하고 친구들을 초대한 적이 있다. 친구 중 한명이 화분에 심긴 꽃을 선물로 가져왔고, 무언가를 키우는 재주가 없었던 나는 화초를 시들게 하고 말았다. 생명과 우정을 너무 가볍게 여긴 것 같아 그 꽃한테도 친구한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화분이 있던 창에 글자 '꽃'을 프린트하여 붙여 놓고, 색도 칠해주고 종이가 구겨질까 신경도 써주며 자주 바라보면서 실제로 꽃을 가꿀 때 보다 더 아끼고 보살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이는 사실보다 보는 마음이 중요해서인지 '꽃' 글자가 생화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글은 상형문자가 아닌 표음문자인데도 불구하고 내 눈 앞에서는 글자 속에 꽃 이미지가 드러났다.
두 번째의 기억은 동네를 활보하던 개구쟁이 시절의 회상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허름한 꽃가게 하나가 있었다. 인도에 놓인 입간판은 언제나 보행을 방해하여 가게로 눈길을 이끌었는데, 주인이 붓으로 직접 썼을 법한 창호의 커다란 '꽃' 글자는 나에게 알 수없는 공포감을 불러왔다. 그 글씨는 붉은 페인트가 흘러내린 자국을 그대로 놔두어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창 너머 보이는 짙은 녹색의 화초들은 깊고 어두운 숲이나 무서운 괴물들이 사는 비밀의 화원을 연상시켰다. 이 이미지는 성인이 된 나를 가끔 사로잡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 문자는 우리가 소통하기 위한 기호이다. 그런데 기표와 의미는 1:1이 아니다. 타인도 아닌 내 안에서 조차 '꽃'이라는 글자는 상반되는 의미들로 통한다. 아름다움과 추함, 생명과 죽음, 애틋함과 두려움, 긍정과 부정, 이러한 의미들은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기호에서 공존한다. 일상에서 꽃은 아름다움과 좋은 것의 대명사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경직된 사회가 부여하는 권고 사항이거나 가이드라인일 뿐, 사실 꽃에 대한 개개인의 의미는 각양각색인 것이다. 더군다나 꽃이라는 실체보다 한 단계 멀어진 기호화된 '꽃'은 우리의 자의적인 해석을 더욱 가능하게 한다. ● 나의 작업은 중립적 입장에서 흑백을 양분하여 그로 인해 일어나는 충돌이나 융합을 실험한다. 형상보다 소리와 관계있는 한글은 상상의 여지를 넓히며 새로운 추상으로 이끄는 조형적 힘으로 귀결된다. 살아 있는 꽃은 인공적인 고무와 폴리로 만들어지고 거기에 입혀진 색은 다시 생명력을 전하며 역설의 역설을 반복한다. 때로는 도식화된 이미지가 다소 감성적인 단어와 충돌하여 새로운 상황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작품 제목 fantasiless는 fantasy와 less의 임의적인 합성어이다. 누구나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그 세계는 다르게 펼쳐질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긍정과 부정이 나누어지는 경계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긍정과 부정의 선을 긋고 있으나 상극인 이 합성어처럼 모두 중성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적 통념이라는 경계는 나의 작업에서 허물어질 것이라 희망한다. ■ 장준석
표 갤러리 사우스에서는 4월 17일(Fri)부터 5월 8일(Fri)까지 추상미술의 다양체로서 잠재적 가능성을 확장 시키고 있는 작가 권현진과 장준석의 2인전을 선보인다. ● 현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 질 들뢰즈는 세상의 모든 주체를 "다양체"로 규정한다. 여기서 다양체란 존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존재를 하나의 주체로 규정하고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그 대상이 지닌 나머지 잠재성을 차단하는 것이 된다. 자유분방한 발상을 통해 새로운 명제를 도출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삶을 개선해 나간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추상미술이 갖는 자율성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예술의 확장된 개념으로 재해석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권현진 작가는 영상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닌 내면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대상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확장시켜 나간다. 이것은 추상적 사고로부터 시작되는 추상화를 의미한다. 이렇게 작품들은 지금까지의 규정과 결정된 것들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상태로 관객을 맞이한다. 이로써 작품 앞에 선 관람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소재를 이용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고 만들어 내는 창작자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는다. 이처럼 권현진 작가의 작품은 기존 학습되었던 시각이 아닌 새로운 형식의 변형과 재배치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다원적 세계로 이해해야 한다. ● 장준석 작가는 고정된 2차원의 회화작품이지만 자유로운 접촉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일상에서 꽃은 아름다움과 좋은 것의 대명사로 인식되지만 그것은 경직된 사회가 부여하는 권고 사항이거나 가이드라인일 뿐, 사실 꽃에 대한 개개인의 의미는 각양각색이다. 장준석 작가의 기호화된 '꽃'은 우리의 자의적인 해석을 더욱 가능하게 한다. 문자라는 기호가 작품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자유롭게 생성해 내는 역할이 관람자에게 요구된다. 동시에 추상적인 사고부터 출발하여 추상을 표현하고, 작품에서 보여주는 추상은 관람자 역시 다양체를 실천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 최미미
Vol.20150417k | 권현진_장준석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