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25-13번지 102호 Tel. 070.8830.0616 space15th.org
실존적 선택의 이콘(Icon)화 ● 현대사회에서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와 미술,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그 어느 시대보다 진지한 작가들의 접근은 커뮤니티 아트의 확산, 행동주의예술의 다양한 양상을 이루어냈으며 이들이 우리 시대 주요한 미술의 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한다. 최우진의 커뮤니티 아트 작업인 황학동에서 상인들과 함께한 프로젝트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었다. ● 그는 각 상점에 화분을 나누어 주고 그것을 키우는 이들은 화분에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고 소원을 적어두기도 하였다. 각기 다른 물건을 팔고 다른 사람이 주인인 가게는 화분의 존재를 통해 공동의 이야깃거리가 생기고 공동체임을 재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화분과 함께 시장에서 이방인인 작가는 그들에게 공동의 일, 화분을 키우고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작품 "「꽃길 프로젝트」는 김정남이라는 75세 노인의 인생에 있어서 취미인 글쓰기와 이미지를 꼴라쥬하는 것을 발견한 데서 시작한" 것이었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좁은 가게에서 화분을 키우던 '민속골동품'점 주인은 시간이 지난 물건들이 얼기설기 전시된 가게 안에서 진지한 태도로 식물들을 키우고 있었으며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참, 좋은 가족", "서로 사랑으로 희생과 봉사로"와 같은 문구를 화분에 적어 놓고 있었다. ● 오래된 물건, 용도를 다한 물건들 사이에서 생명의 상징인 식물들이 '문자의 힘'으로 자라나는 낯선 풍경을 경험한 작가는 '김정남의 행위'를 재현하였다. 식물이 담긴 화분을 시장상인의 가게에 배달하고 그 화분이 자라거나 버려지는 과정을 함께함으로써 대화와 공통의 관심사를 이끌어낸 작가는 '김정남의 행위'를 선(善)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자본이 강력한 힘을 갖고 예술이 소비되는 지금, 최우진은 예술가의 책무와 순환되는 선한 의지에 대해 논의한다. ● 작가 스스로 지은 전시명 『빛나는 돌』은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켈 리가 서양의 고전과 현대인의 삶을 은유하여 쓴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 『모든 것은 빛난다』를 상기시킨다. 영적이며 관계지향적인 책의 논리와 사실 작가의 생각이 만난 적은 없다.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서의 관계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빛나는 돌은 상대가 있어야 비추는 세상을 의미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최우진은, 세상의 타자와의 관계가 결국 형태가 없으나 존재를 드러내는 '빛'을 통해 관계지어진다는 사색의 지점을 직시하고 있다. 그런데 '비춘다'는 것은 상대를 빛나게 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위기의 순간 행동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기찻길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전동차 앞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불타오르는 건물에 아이를 구하러 뛰어 들어가는 행동을 하는, 흔히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그 순간 이성적 선택의 과정을 거쳐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영웅들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라는 선택을 하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실존적 선택이라 하였다. 이 실존적 선택은 자기확신에서 시작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두 눈 이외 모든 것이 빛나는 돌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자신의 작품들은 그의 눈에 비친 세상에 대한 기록, 그 자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스펙타클한 근대 이후 사회의 플라뇌르(flâneurs)적인 '기록'이 아닌 '빛나는 돌'이라는 중세의 연금술적 언어를 사용한다. ● 이 특별한 성격은 또한 '현자의 돌'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이든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연금술사의 돌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공유한 제1원소(materia prima)이다. 물질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뒤 남은 제1원소는 신의 '하나'를 포함하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의미한다. 카오스를 형성하는 이 형언할 수 없는 물질인 현자의 돌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시각적 법칙에 의해 규정할 수 없다. ● 작가의 눈이 비추는 대로 빛나는 것들, 그것은 임의적 선택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상대방에 빛을 주려면 당연히 스스로 발광(發光)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빛나는 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며 그 모든 것에는 가장 기본적인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신의 요소가 존재한다. ● 「빛이 지나가는 곳」, 「돌 피사체」 등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방식에 주목하게 한다. 그림에 드러나는 손의 일부는 빛을 받은 손을 표현한 것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돌은 빛을 받은 돌이다. 그리고 그림 속 산은 돌 피사체이자 세잔느의 「생트빅투아르산」의 일부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풍경, 지나가는 순간의 어떤 장면들…. 작가에 의해 선택된 이미지들은 그냥 그곳에 있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것은 대개 풍경화로 위치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풍경화의 어떤 속성을 좋아하여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특히 최우진이 세잔느의 풍경을 선택한 점에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원통, 원추, 구와 같은 가장 기초적인 도형에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들을 투사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 일찍이 K.해리스는 세잔느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하여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세잔느의 「생트빅투아르산」과 같은 풍경화는 작가와 자연간의 대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대화는 "타자에 귀기울이는 능력, 타자로 하여금 기꺼이 그 자체이게끔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한 것으로 작품은 타자를 드러내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들은 자연의 형태이며 그곳에 투사된 영상의 이미지들은 타자를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하게 작동하여, 타자의 존재성에 집중하게 한다. 길을 지나가다 본 도로를 파헤치는 노동자, 지나가는 중년의 부인, 자전거를 탄 청년과 같은 영상 속 이미지들은 세상의 하나의 구조로서 이 단순한 기하적 도형에 투사되어 세상의 일부임을 드러낸다. 작가의 눈 밖에 있는 존재들은 작가의 발광하는 눈으로 인해 빛난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 선택되지 않은 존재 자체로서 빛을 받아 빛나는 것들이며, 그리하여 구분법인 타자에 대한 관념은 해체된다. 영상이라는 방식을 통해 빛으로 존재하는 그들은 물질적 요소가 제거된 형태로서, 제1원소로서 존재한다.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성 자체인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와 윤리, 정의의 개념은 그리하여 작가에게 '참된 것을 찾는 과정'의 도구로 작동한다.
'예쁘다'라는 말이 갖는 힘, 그것은 "나빠"나 "싫어"와는 다른 주술적 맥락을 갖는다. 화분에 예쁜 말을 적어놓고 키우는 것과 나쁜 말을 적어 놓고 키우는 것은 정말 다른 행위이다. 선한 유감주술과 다른 저주의 주술은 대상을 타자화한다. "예쁘다"라는 말이 적힌 모니터는 돌의 특성인 부정형성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 빛나는 글자들은 작가 최우진이 관객에게 보내는 텔레파시이다. 그것은 "당신 예쁘다"로 읽히며, 동시에 눈을 반짝여 세상을 밝게 하는 허공을 가르는 주파수이다. 또한 거듭, 동시에 빛을 읽어내는 나의 눈이 빛나는 지점을 인지하는 그 순간 이 세상 모두가 빛나는 돌임을 인지하게 한이다. 현자의 돌이란 우리 모두가 지닌 선한 의지의 순환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어지럽고 공포스러웠던 시대 다른 세계로 떠났던 스위프트는 『걸리버여행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지독한 사변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발성기관이나 청각기관에 외적인 자극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가 아닌 경우 이외에, 그들은 말조차 할 수 없으며 타자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없어서" 아름다움을 표현할 때 마름모, 원, 타원형 등 기하학적인 개념들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최우진 작품을 관통하는 정형적 형태는 중첩되는 드로잉마저 흡수하여 그 형언할 수 없는 가치 혹은 관념이나 의식을 단순함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단순한 형태야말로 상황을 인지하게 하는 공동의 언어구조, 신성과 인성이 합일되는 순간의 환희, 이콘이 갖는 힘의 원리인 것이다. ■ 조은정
Vol.20150414f | 최우진展 / CHOIWOOJIN / 崔瑀眞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