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장落張-두 번째 장 Missing pages-second page

박현욱展 / PARKHYUNWOOK / 朴玄煜 / painting   2015_0303 ▶ 2015_0314 / 월요일 휴관

박현욱_피로_한지에 수묵_130×193.5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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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욱 페이스북_www.facebook.com/painterhyunwook 인스타그램_@hyunwookartwork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25-13번지 102호 Tel. 070.8830.0616 www.space15th.blogspot.kr

소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기 ● 우리가 '무엇을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통상 어떤 대상이 자신에게 속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처분할 수도 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소유라 함은 대상에 대해 무제한의 통제권을 가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유 대상의 처분에까지 이를 경우 조금 더 문제가 복잡해지기도 한다. 대상의 가치(특히 교환가치)를 유지시킨 상태로 타인에게 양도함으로써 소유권을 포기하는 방법은 완전한 처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 대상을 완전히 파괴시킴으로써 가치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궁극적이고 극단적인 소유권 행사, 즉 소유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현욱_어느새 가고 없구나_한지에 수묵_260×193.5cm_2015
박현욱_61301 겨울_한지에 수묵_69.5×40cm_2014

물리적 대상을 파괴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단순히 힘을 가하기만 해도 대상은 파괴되어 그 용도를 잃는다. 그렇지만, 그 대상을 소유해 옴으로써 얻어진 심리적 표상은 어떠한가? 대상은 제쳐 두고라도, 심리적 표상은 동일시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것을 처분함은 곧 자기 자신마저 처분함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용해 온 물건을 간단히 파괴하지 못하고 어물거릴 수 밖에 없음은, 하나의 대상이 가진 두 가지 성질 – 즉 물리적 성질과 심리적 성질 – 둘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 두 가지 가능성 정도는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상을 망각함으로써, 또는 대상에 대한 기억을 재배치함으로써 '대상을 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신적 소유상태를 해제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애도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현욱_시간기록 - 61301_한지에 수묵_130×193.9cm_2014
박현욱_베이스기타와 비닐우산_한지에 수묵_100×72.7cm_2013

이렇게 전제를 두었을 때 박현욱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버림"을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절정을 달하는 사건"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진술은 위에서 말한 '소유의 극단적 형태로서의 처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처분이라는 행위가 물리적 현실과 심리적 현실간의 괴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면, 이러한 괴리의 해소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요청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상실된 대상을 그림이라는 형태로 재생함으로써, 사라질 것이고 사라지고 있으며 이미 사라진 물건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묘비를 만든다. 다만, 다시금 태어난 대상은 과거의 물건 그대로가 아니라 표상의 편린(즉, 묘비)에 지나지 않으며, 상실의 경험을 구체화한다기 보다는 단축시키고 추상화시킨다. 즉 표상 자체는 박현욱의 표현과 양식 안에서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에 따르는 정동은 완전히 재해석되고 변형되어, 결과적으로 원래 대상과의 관계는 망각의 준비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박현욱_일상의 기억_한지에 수묵_57×41cm×4_2014
박현욱_운동화_한지에 수묵_72.7×100cm×2_2014

책의 인기와 더불어 '무소유'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애도행위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소유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를 소유하려고 하는, 일종의 불가능한 욕망이라는 점에 주목해 본다면, 박현욱의 작품은 훨씬 인간적이고 솔직해 보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유한자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지점을 작품의 형식으로 간접적이나마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점을 애써 가능성의 영역으로 포섭하려 하지 않고 불가능한 것으로 내버려 둠은 박현욱의 작품의 또 하나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정민

박현욱 이메일[email protected]

Vol.20150303g | 박현욱展 / PARKHYUNWOOK / 朴玄煜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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