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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20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29-4(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정상현이 작품에서 보여준 크고 작은 변화의 기저에는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있다. 2000년 시작된 모형 세트 작품, 2006년 『스스로 생존하는 공간』展에서의 과장된 자연 풍경, 2008년 『자기 자신이 극장인 사람』展의 예기치 못한 개입이나, 『모호한 복종』展에서의 반복된 상황들의 상이성, 그리고 이전 작품과 달리 평면 이미지를 회전시켜 입체적 잔상을 만드는 『무게와 두께』展까지도, 사실 시뮬라크르를 배경으로 한 맥락 하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상현의 시뮬라크르는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지적한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hyperréel)를 모델들로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번역, 민음사, 2001년, 12쪽)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결정적인 차이점은 첫째, 정상현의 작품이 결국 이원성(duality)이라는 어떠한 체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그의 시뮬라크르는 스스로 시뮬라크르임을 고발함으로, 부재를 노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우선 첫 번째 차이를 설명하자면, 정상현의 작품이 지시하는 이원성은 두 핵, 구체적으로 2차원/3차원, 실재(physicality)/환영(illusion), 실제(real)/가상(simulation),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처럼 이전의 미술 패러다임과 그것에 도전하는 새로운 가치관이라는 두 축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처럼 작가에게는 상반된 양극이 짝을 이루고 있으며, 이 이원의 양극은 명확히 상반되지만, 한 쪽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다른 하나 없이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상호 의지적 특징을 띠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형성된 이중성의 양상이 꽤 넓고 복잡하다는 사실에서 볼 때, 각각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회의도 상당히 심화되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2003년의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서의 기본 구조, 즉 실재로서의 조각과 환영으로서의 영상이라는 틀은 유지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물질, 실재, 실제, 주체, 모더니즘이라는 항과 비물질(非物質), 허구, 가상, 타자, 포스트모더니즘이 속한 또 다른 항, 이 둘의 다층적 결합은 항상 달리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양쪽의 혼합과 상충이 혼재되어 있는 시뮬라크르로 제시되었다. 이 때문에 정상현의 작품은 양극이 절충되는 어느 지점이기 보다는 양극을 모두 보여줌으로 그것들을 상기시켜주는 역할로 해석된다.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창문과 액자(frame)의 역할이 바로 그 예일 것이다.
이번 『반복과 깊이』展의 「방」연작뿐 아니라, 대부분의 작품에는 창문 이미지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 창문은 모형 세트를 더욱 실제처럼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인 동시에, 모형 세트 자체가 창 너머로 보이는 영상의 프레임이 되어 모형 세트의 실제성을 약화시키는 역할 모두가 부여되었다. 이로써 창문은 덜 실제 같은 모형 세트와 더 실제 같은 영상 사이에서 실제성의 문제뿐 아니라, 픽쳐레스크(picturesque)식의 과장(hyperbolic) 때문에 오히려 더 가상현실 같아 보이는 영상과 그것에 비해 덜 가상현실 같은 모형 세트 사이에서 가상성의 개념, 모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창문과 마찬가지로 액자에도 역시 이러한 역할이 그대로 옮겨졌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구현하기 위한 환영주의(illusionism)가 고도화된 르네상스 시기, 이를 대표하는 「모나리자」의 액자 이미지를 출력하고 반복 중첩시켜, 입체로 만든 정상현의 「모나리자」에서, 이 액자는 곧 관람객의 세계인 실제 현실과 모나리자의 세계인 그림 속 환영 모두를 가리키는 지시물이다.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삭제한 채, 입체인 액자의 이미지를 평면으로 출력(복제)하고 이를 중첩(반복)시켜 입체(깊이)로 전환한 정상현의 「모나리자」 역시, 실제와 환영, 그리고 데카르트적 주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타자와 관련된 담론을 상기시켜 주는 매개로서 기능한다. ●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양극을 상기시켜주는 동시에, 이것을 지지하고 있는 체계 혹은 원칙들에 대한 부재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이점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제기는 시뮬라크르와 그것의 고발로 시각화되었다. 2008년 『자기 자신이 극장인 사람』展에 전시된 「조각적인 습격」이나 「톰의 분노」는 조각적 실재로 볼 수 있는 모형 세트에, 비물질적이고 과장된 실제(hyper-real)라 할 수 있는 영상을 함께 배치한 것으로, 실제와 허구, 실재와 가상 간의 상충된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결합은 의도된 시뮬라크르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멈추지 않고, 이러한 시뮬라크르를 고발하는 물리적 개입, 즉 찌르거나 불을 가하는 등의 침입을 통해 일종의 소격 효과, 또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방해(distraction)' 형식을 보여준다. 벤야민의 정신분산(distraction)과 정신집중(concentration)의 비교는 아래 글을 참고할 것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9년, 90쪽)
위와 같은 소격 효과 또는 방해에 관한 실험은 2010년의 『동전의 양면』展에서 한층 더 심화되었는데, 「야만과 문명」, 「60분」과 같은 작품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위의 작품들은 입체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회전하며, 90도 각도에서는 이것이 실처럼 가늘어져, 처음에 은폐되었던 '입체처럼 보이는 이미지의 평면성'을 드러내 주는, 곧 환영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한다. 한편 이 '이미지-오브제(image-object)'들은 또한 다른 대상들로-저택에서 바위로, 서로 다른 숫자들로- 전환되며 예기치 못한 또 한 번의 소격 효과-방해를 보여준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대상에서 대상으로 일어나는 두 번의 소격 효과는 몰입(concentration)을 방해하는 한편, 역설적으로 몰입의 상실을 강조하게 된다. 벤야민이 편집에 의한 몽타쥬(montage) 형식의 '새로운 예술(영화)'이 몰입과 관조를 요구했던 이전 미술 전통과 대조적인 것으로 설명하였듯, 정상현의 영상 또한 외적으로는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새로운 예술'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의도적이고 반복적인 '잘림(cut)'의 연속은 이전의 예술이 요구하였던 것들, 즉 몰입이나 정통성(legitimacy)이 상실됨을 상기시킴으로, 모더니즘의 강령을 탈피하고 있음은 물론, 시뮬라크르임을 스스로 고발함으로써,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지시 대상도 테두리도 없는 끝없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순환"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번역, 민음사, 2001년, 25쪽) ● 위와 같이 정상현의 작품은 여러 질문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답 없는 열린 질문처럼 자유로워 보이지만, 사실 비판의 촉을 피해간 정교한 풍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서 어떠한 정통성(legitimacy)의 뒷면과 함께 시뮬라크르에서 비롯된 상실감, 곧 실제 미술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치의 전환을 흥미로운 시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위기로부터 기인된 것인지, 혹은 향수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유보적인 입장은 우리에게서 판단보다는 공유를 우선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이상윤
Vol.20150204j | 정상현展 / JUNGSANGHYUN / 鄭相鉉 / photography.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