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203_화요일_05:30pm
곽아름 '환상통' 퍼포먼스 / 2015_0203_화요일_05:30pm_1층 전시장
참여작가 곽아름_김혜현_김효진_류일하_류현욱_신준민 심윤_윤동희_이향희_장보성_최윤경_추종완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설날 휴관
대구예술발전소 DAEGU ART FACTORY 대구시 중구 달성로 22길 31-12(수창동58-2번지) Tel. +82.53.803.6251~7 www.daeguartfactory.kr
그리고, 비행. ● 섬들의 연대. 이 명료한 메타포 안에서 섬들은 예술가들이고, 연대는 함께 펼치는 전시와 대화이다. 그렇다면 섬들을 떼어놓은 바다는 무엇일까? 지금 예술계는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모든 게 차고 넘친다. 그곳은 아름답지만 또한 위험을 품고 있다. 각자의 섬에 갇힌 작가들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봐야 되나? 그래서 나는 이 기획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여기에 모임 화가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들의 작업을 길게는 15년 쯤, 짧게는 2.3년 정도에 걸쳐서 염탐꾼처럼 관찰해왔다. 대구 예술발전소의 전시 공간에서 드러난 작가들의 연대는 본인들에게도 사적인 역사로 남겠지만, 내게도 이미 공감을 충분히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곽아름의 퍼포먼스는 전형적인 캐릭터의 겹침으로 이야기를 완성한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게마인샤프트적 관계는 이발사와 고객이라는 게젤샤프트의 관계로 전환된다. 부모 혹은 자식과 처음으로 술잔을 맞댄 자리를 다들 기억하는가. 이 퍼포먼스도 비슷한 상황의 재설정이다. 작가는 자신이 완성해 온 영상 작업 속 내러티브를 자신의 사건에 끼워 상징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상징이 조금 평면적이다. 화면의 쇼트 속 부감은 어떠한 알레고리나 상징도 보증하지 못한 채 떠돈다. 뭐, 이건 도구의 문제다. 출발 단계에 있는 작가가 영화 예술에 관해 더 숙련된 안목을 기르며 적절한 기기들을 선택하며 다룬다면 해결될 문제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혜현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곧잘 쓰이는 책과 도서관을 비판과 매혹이라는 양면성으로 바라본다. 지식을 담은 그릇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호가 될 수 있는지, 혹은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려는 강박이 사람들에게 퍼져있는지에 관해서는 시각디자인과 문헌정보학이 각자의 학술 언어로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미디어 아트로 발설한다. 김혜현은 여기서 도서관의 책에 숨겨져 있는 엄청난 내용이 다 드러나지 못한 채 그저 코드로 분류되는 상황을 주목한다. 질서 있게 분류된 책의 목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는 의미를 유령처럼 흔적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김효진의 회화에는 얼핏 보아 낯선 사람, 낯선 장소로 채워져 있다. 찬찬히 보니까 누군지 어딘지 알 법도 하다. 이 말은 작가가 익숙한 대상을 생경하게 바꾸는 법을 안다는 거다. 인물들은 굉장히 상투적인 패턴을 근거 삼아서 나온 표정과 구도는 그 선배들의 작업실에서 많이 봐온 이미지다. 작가는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산뜻한 개념이 고안되어야 된다. 나는 그게 그림 속에 있는 또 다른 공간이라고 본다. 하나의 공간이라기보다 면에 가까운 이 장치는 일종의 통로나 가림 막으로 해석해도 된다. 이건 작가로 하여금 구체적인 현실을 그림으로부터 파내어버리는 구실을 한다.
류일하의 설치 회화 작업은 이번 전시의 주제에 외형상 가장 근접해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연대의 중심에서 가장 고립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관제탑은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를 수만 있을 뿐이며 착륙을 못하게끔 한다. 출발만 있고, 도착을 보장 받지 못하는 비행의 여정은 예술가의 삶으로 대치된다. 이와 같은 성찰은 작가가 스스로 완성해야 할 것만 같은 거대한 기획처럼 펼쳐진다. 이것은 모순이다. 끝이 없는 예술가의 여정을 디오라마로 나타내려는 야심은 작가가 미술가이므로 형태를 구체화할 수 있는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류현욱의 최근작은 외적인 간결함을 잃었다. 이 그림을 보는 것은 작가의 머릿속을 헤집어보는 것과 같다. 작품은 과격하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섬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내게 매혹으로 다가온다.
나는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 혼자 남아 느끼는 적막감을 좋아한다. 신준민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그가 느꼈던 감정이 내 경험과 비슷할 것이라고 단정 내렸다(더구나 야구장이었다!). 물론 화가의 눈은 내 눈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인적이 끊어져 텅 빈 풍경을 조율하는 잔잔함은 그것을 화폭에 옮길 때 화가만이 온전한 시선의 담지자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의 전성기보다 훨씬 뒤늦게 태어난 이 비트족(Beat generation) 화가는 고요와 침묵이 깨지고 새로운 세속의 장이 열릴 그 공간들의 불안을 그림에 표현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심윤에게 있어 '빛과 어둠', '걸어본 길과 걸어보지 못한 길'은 결국 색이 배제된 그림을 자기 관찰한 결과다. 따라서 필체를 남긴 면과 여백으로 남은 곳이란 뜻의 대립 항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내 취향을 고백하자면, 지나치게 큰 그림은 미술가들의 허세를 담은 것 같아서 싫다. 화가 심윤의 대작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한데, 지도에 관한 비유는 작가 스스로의 생각을 진전시킬 요소를 품고 있다. 뭔가 하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지도는 지구를 1대1의 비율로 덮는 것일 테다. 불가능을 현실 속에 끊임없이 요청하는 게 낭만이라면, 작가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는 우리들의 얼굴이라는 현실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되돌릴 방법을 세웠다.
윤동희는 혈연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 영상 작업은 단순히 한 가족의 역사를 뛰어넘어 정치와 종교의 문제를 다룬다. 암, 그래야 작가 윤동희지. 그의 이번 작업에서 내가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관객이 보는 건 그가 펼쳐놓은,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인데 거기서 우리 모두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작가가 이걸 표현하는 데엔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여러 설치작업을 통하여 작가는 상징적인 오브제나 레퍼런스를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어떨 때 그것은 매우 조악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명료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는 여기에 자조와 애틋함, 가차 없음과 망설임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한다.
이향희가 택한 그림의 주제는 밤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익숙한 곳이 맞이하는 밤의 풍경을, 그리고 거기서 접하는 감정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어둠 속에 가려진 풍경이라는 표현과는 반대로, 빛 속에 가려진 본질이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성립된다. 그림에서 어둠을 표현하려 할수록 조명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나는 그동안 제대로 된 조명 아래에서 이향희의 작품을 감상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마치 어둠 속으로부터 숨어있던 작가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미처 다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얻는 기쁨이다.
장보성은 자기가 사는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한 품목씩 화폭에 옮겨 놓는다. '이건 화분이고, 저건 탁자네. 그래서 어쩌라고?' 집안 물건은 놓일 자리에 놓여있다. 이는 필연적인가? 그걸 그린 작품의 퍼즐 같은 배치도 필연인가? 일종의 낯설게 하기다. 왜, 물건이란 게 그렇지 않나. 집에서 쓰는 물건들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온기가 닿은 그것들은 집 바깥의 딱딱한 현실과 구분된다. 작가는 자기와 감정을 나눈 물건의 재현을 통해 다름 아닌 자신을 섬으로부터 바깥세상으로 내보낸다.
최윤경의 작품을 보면 다양한 작업에 자신의 열의를 쏟아 붓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작업은 신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정한 완성도를 보인다. 작가는 현대 미술이 시도할 수 있는 영역에 걸친 모든 것을 다 해보고픈 욕심을 품었다. 이게 좋은 점도 되고, 나쁜 점도 된다. 회화와 매체예술과 개념예술의 각 방면에서 정제된 작업을 뽑아내는 일은 결국 콘템포러리 아트의 장 속에서 앞서 간 작가들이 실험한 길을 순발력 있게 응용했다는 뜻이 된다. 작가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활력 있는 시기이자 사실은 가장 신중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슬기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관객들은 지금의 미술이 마치 예술이 사라진 이후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여기 최윤경의 시도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추종완이 완성한 자화상은 당연히 그다운 작품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그답지 않은 작품이다(물론, 이 도상이 새로운 전환이라면 말은 달라지겠지만). 시커멓고 거칠게 표현하는 그의 그림 속에서 작가의 얼굴은 올록볼록한 거울에 비친 것처럼 뒤틀어져 있다. 그 화면의 질감이나 주제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추종완의 과거 작품에서 이처럼 얼굴을 제대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작가가 새롭게 내보인 얼굴, 더구나 본인의 얼굴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 고백은 절실하다. 그는 여기서 원하는 자아를 찾았을까? 온전한 얼굴보다 왜곡된 반영에서 훨씬 진실한 모습을 찾으리란 역설의 기대는 오래된 예술의 주제다. 하지만 여전히 힘이 있다. 끝없이 요동치는 여러 명의 '나'들 속에서 한 발치 떨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건 예술가의 특권이다. ● 이처럼 『플라이 투 미』는 하나의 결과에 대한 보고가 아니다. 내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는 시작 단계에 있는 과정이다. 각자의 섬에 갇힌 그들은 과연 서로 만날 수 있을까? 회화라는 장르가 그 실마리는 되겠다. 이들 작가들이 그림이 아닌 다른 매체 실험을 펼쳐놓을 때조차도 결코 회화를 대범하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반대로, 그림만 그려온 작가들도 자심의 표현 기법을 다양하게 늘이고 싶어 하는 강박감에 쌓여있다. 이러한 자기준거성은 전공으로서의 회화라는 제도 때문에 더욱 번거로운 것이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불안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며, 사라져가는 회화의 마지막 자산이 된다. 그들의 불안을 연료로 삼은 예술의 광채 말이다. ■ 윤규홍
Vol.20150203d | FLY TO ME-Island's Solidarity Project 섬들의 연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