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5_0131_토요일_03: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0:00am~6: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공간 양 CULTURE SPACE YANG 제주 제주시 거로남6길 13 Tel. +82.64.755.2018 www.culturespaceyang.com
기억, 기록 그리고 매체 ● 네덜란드인 핸드릭 하멜이 쓴 『하멜의 표류기』라는 책에는 저자의 10개월 동안에 제주 생활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제주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그 지방에는 많은 주민이 거주하고, 가축들이 살기에 비옥했다. 많은 말과 소들이 있다. 매년 그들은 왕에게 상당한 공물을 진상한다. 주민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 본토인들에 의해 천대당해 높게 존중되지 못했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은 그 시대의 생생한 체험들에 대한 필사를 통해 기록되고 전수된다.
기억이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단지 의식 속에 저장하거나 다시 꺼내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현재의 삶에서 과거를 소환하면서 사람들의 깨달음이 상호 교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완벽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은 의도적으로 기억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그것들이 저장되어 있다가 특정한 계기와 시점에서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이때 기억은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자이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기억을 기록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억과 기록을 연결하는 매개물이 매체이다. 이처럼 기억과 기록 그리고 매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매체 형식이 바뀌면, 그 매체 형식에 맞게 사진과 영상 등의 새로운 예술 형식이 등장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예술 형식에 맞게 변화된 수용방식을 요구받는다"고 설명한다.
기억은 그 대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한에서 보존되지만, 사진은 주어진 것을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연속체로 포착한다. 즉, 사진이 말하는 대상은 '지금'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인 것이다. 조은장 작가의 작품 속에 「화북천」과 「고봉례의 분묘」는 단순한 풍경이 아닌 마을 사람들의 오랜 경험이 축적된 기억의 의미층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작가의 사진 작업 과정은 마을 세계와 관계가 중지된 순간의 표현이며, 고독한 관조자의 입장으로 한 혼잣말이다. 그런 이유로 카메라는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진도 회화처럼 이 세계를 해석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행위의 수동성이야 말로 우리에게 건네주는 '메시지'다. 거로 마을 단합대회의 사진 속 사람들은 저명인사들이 아닌 이름 없는 무명 인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 속 인물의 이름에 대한 관심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런 사진들 속에서 현재적인 우연의 순간을 찾고 싶어 하고, 갑자기 잊고 있었던 과거 기억을 떠올리면서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진들 속에서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소소한 것들을 찾고 싶어 하는 '충동'을 느낀다.
이안 작가는 「거로에 살다」 작품을 프레임이라는 단위를 통해 서사를 유지하는 출판만화(comics) 형태로 작업했다. 프레임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다가 각각 프레임들의 크기가 서로 달라지기도 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이는 작품이 고정된 프레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형태들이 임의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한태식, "다중프레임과 탈공간화", 『영상예술연구』 4호, 영상예술학회, 2004, p.150-151.) 최소한으로 표현된 말풍선과 내레이션만을 가지고 실재적 시간의 흐름에서 빠져 나와, 멈춤과 흐름이 반복되는 심리적 시간들을 나열하고 있다. 프레임 안에서는 선의 궤적들을 통해 운동성을 획득하였다. 다양한 형태의 프레임을 통해 탈공간화하고 프레임 안에 언어와 선의 형태들을 통해 내밀한 시간을 표현한다. 이는 거울에 투사된 투명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파편적인 경험이 뒤섞이면서 침투된 기억은 분할되고 재구성되면서 '현재성'을 획득한다.
모든 이미지의 자료는 역사다. 어쩌면 그 어떠한 도큐먼트(document) 자료보다도 더 중요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거로 마을에 대한 기록은 개인의 단순한 기억에 대한 기록 작업이 아니다. 마을에서 숨어버리고 지워져 버린 곳과 층층이 쌓인 경험의 흔적들을 꼼꼼하게 따라가다 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과거의 문화 지형과 조우하기도 하고 당대 문화의 길들이 어렴풋하게 보이기도 한다. 거로 마을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거로 마을 안과 밖에서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단서들이 있는 보물 창고이기도 하다. 창고 속에 들어 있는 문화적 흔적의 보물들은 그 어떤 하나도 사사로운 것이 없다. 마을이 단순히 삶을 영위하는 공간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읽는 또 하나의 텍스트다. 거로 마을과 우리의 삶이 상호 침투되어 그 속에서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그 의미들을 읽어 내는 것이 거로 마을의 '산보자'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 김범진
Vol.20150131e | 거로에 살다-이안_조은장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