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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식_사윤택_이건영展   2015_0130 ▶ 2015_0330 / 주말 휴관

민성식_없어진 물고기(A missing fish)_캔버스에 유채_97×145c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 휴관

갤러리 모던플러스 GALLERY MODERN PLUS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869번지 SK엠시티 오피스타워 섹션동 1010호 Tel. +82.31.926.3337 www.modernplus.kr

갤러리 모던플러스에서는 공간 안의 공간의 모습을 작가들 저마다의 관점에서 표현한 작품 들의 진중한 조형언어를 느껴보고자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동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힘찬 이 세 작가의 밀도 높은 평면작업들을 통해 그들의 소신과 진지함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 모던플러스

민성식_없어진 물고기(A missing fish)_캔버스에 유채_97×145cm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상상의 공간 ● 미술이 종교와 세속의 절대세력에 봉사하던 시대가 지나면서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 역사적, 사회적 문제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각과 감정을 주입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이렇게 사적 사유 공간으로 전환된 화면 안에서 작가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와 상상을 만끽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자유와 상상이 지배하는 장에서는 규범이나 원리와 같은 거추장스런 기준이 별로 잘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서양미술사에서 일어났던 근대 유럽의 아카데미적 회화의 규범에 대한 저항은 결국 이러한 작가들의 상상력과 자유의 신장에 따른 자연스런 반작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성식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하며 신선한 조형 어법으로 우리에게 현대사회의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보통의 작가들과 좀 다른 경로로 작가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미술대학 진학과 휴학, 미국으로의 이주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낯선 곳에서의 직업생활, 그리고 그로부터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리움이라는 향수병, 다시 귀국해서 학업을 마치고 시작한 국내에서의 사회활동과 대학원 진학 등은 보통의 작가들의 이력과는 다른 다양한 경험과 소회를 자신의 작품 속에 풀어놓을 기회를 제공해주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사회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작가의 인생철학은 한마디로 '조화와 균형'이었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이러한 조화와 균형은 물질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며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균형이 상실됨으로써 우리의 정신 건강을 해치며 공허감이나 스트레스가 유발되고, 사회적으로는 집단간의 분쟁과 공격성이 증가한다. 또 이러한 조화와 균형은 도시와 자연 사이에서도 그 필요성이 절감되는데 특히 도시 생활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 자연은 치열한 도시생활에서 축적되는 스트레스와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피난처이자 동경의 대상이 된다. ● 민성식의 작품은 이러한 조화와 균형을 염두에 두고 자연을 동경하는 도시생활 공간의 상징으로서의 집을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도시인들이 꿈꾸는 공간으로서의 집이 그려지거나 타워크레인을 이용하여 높게 솟아오르는 고층건물의 공간을 표현하기도 하며, 오늘날 주거의 공간이 투자 혹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집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착안한 종이로 만든 집처럼 단순하게 조립된 집모양의 도형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모티브로서 작가가 선택하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난감 무기에 의해 길들여진 공격성에 대한 반성적 감회와 그 시절의 친구들에 대한 회상 등을 소재로 하여 화면 속에 이러한 것들을 풀어내고 있다. ● 민성식의 작품은 선명한 색감과 대담하게 구획된 분할된 화면의 전개,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내려다보는 부감법적인 구도로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마치 보안 카메라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감시하는 시선 혹은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 관람자가 위쪽으로부터 내려다보는 시선은 원근법적 원칙에서 벗어나 있어서 사실적인 느낌보다는 몽환적이고 신비스럽기까지 한 어떤 공간을 체험하게 해준다. 자세히 보면 민성식이 고안해낸 화면 속의 공간은 좀 이상스럽다. 작가 자신의 생활공간인 듯한 주택과 잔디가 깔린 마당이 바다나 강을 연상시키는 푸른색의 면과 인접해있기도 하고 크레인으로 옮겨지는 집모양의 입체에는 문이나 창이 하나도 없다. 그 뿐 아니라 주택의 내부에 배치된 가구와 생활 집기의 크기나 위치가 우리의 경험적 인식 속에서 요구하는 모습과 위치를 벗어나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자는 이러한 민성식의 작품에서 형이상학적 회화를 구사하던 이탈리아의 형이상학파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를 떠올리기도 한다. 데 키리코가 초현실주의에 선행하는 화가로도 여겨지는 것처럼 민성식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표현기법으로서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즐겨 사용하였던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택의 차고로 생각되는 공간에 정박된 배나 타워크레인이 돌아가는 높은 건물의 끄트머리에 새처럼 앉아있는 작은 조각배, 지붕 처마 끝에 얹혀있는 물고기 한 마리, 허공에 떠있는 집과 테이블 위를 부유하는 육면체나 공 모양의 오브제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정해놓은 사물의 위치와는 사뭇 다른 위치에 이들이 자리 잡음으로써 시각적 충격과 모호함을 자아내준다.

민성식_휴가(A vacation)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3

민성식의 작품은 멀리서 한 눈에 바라볼 때와 가까이 다가서서 세부를 자세히 바라 볼 때 서로 다른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의 화면은 색면 추상과 같은 화면의 분할이 읽혀지며 이러한 색면 분할에 따른 색채의 균형과 대비를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적인 색채와 비사실적인 색채를 화면 속에 함께 주입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한 화면 안에서 현실성과 환상적인 느낌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어 준다. 화면에 담긴 색채 감각에 비하여 민성식이 그려내는 사물과 건축 구조의 형태는 불안정하고 비현실적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사선들은 원근법적 소실점과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건물이나 주택의 실내 공간을 비뚤어지고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각 부분의 스케일 면에서도 비례나 균형이 정확하게 맞지 않음으로써 관람객들이 이 공간이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 비현실과 환상을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으로 인식하게 해준다. 2008년에 제작한 「개집」의 경우에는 화면 앞부분에 부분적으로 붉은 색 벽과 지붕의 일부가 보이는 집의 구조가 마당에 놓인 개집의 구조에서 그 기울기나 지붕의 각도 면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됨으로써 두 개의 집이 결국 동일한 구조를 가진 공간일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동물들이 자신들의 집을 재산으로 인식하지 않는데 비하여 인간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을 재산 증식과 투자 혹은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풍자적 시각이 이 그림에 반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진지한 주제를 희석시키는 것은 작가가 화면에 도입하는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붉은 벽과 인접한 녹색 잔디밭의 대비, 그리고 전면을 가로지르는 비스듬한 십자 형태의 굵고 검은 색 창틀을 통해 이러한 광경을 내다보는 듯한 시선, 이러한 요소들이 민성식의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 민성식의 화면을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색면 분할 형식의 추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주제 면에서도 현실과 환상의 공존, 도시와 자연의 공존 등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민성식은 오래 전부터 극단적인 원근을 적용하여 모서리를 드러내는 건물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타워크레인이 건축 자재를 옮기면서 높은 건물을 세워 나아가는 화면 속에서 우리는 도시공간의 기능주의적이고 비인간적 건조함을 느끼면서 이러한 환경에 대응하는 균형추로서 자연을 희구하게 된다.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고층 건물의 한 귀퉁이에서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걷는 인물은 건물의 규모에 압도되어 더욱 왜소해 보이지만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도시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의 꺼지지 않은 꿈과 희망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도 있다. ● 민성식이 관심을 두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어린 시절의 장난감에서 영감을 얻은 목총이다.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게 설정된 허공을 배경으로 둥둥 떠 있는 듯한 커다란 나무총은 어린 시절의 민성식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할 때 즐겨 사용했던 장난감이었을 것이다. 「훈련무기」라고 이름을 붙인 일련의 작품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장난감 무기에 의해 길들여진 공격성에 대한 반성적 감회와 그 시절의 친구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회고적 감성을 넘어서서 민성식의 「훈련무기」 연작에서는 작가가 앞서 즐겨 그려왔던 건축물들의 장면들과 공유되는 선들의 교차가 감지된다. 다만 이러한 그림에서는 보다 정교하게 선들의 교차와 평행이 이루어지고 그 교차로 형성된 면에 채색이 가해짐으로써 보다 추상적인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건축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 민성석이 작품을 통해서 구성해내는 공간은 작가 본인의 경험과 희망을 담아내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상과 상상 속의 일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인식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감각과 조형 어법을 벗어남으로써 더욱 신선하다. 낯선 듯하지만 결국 그것은 오늘날 도시와 자연 사이에서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우리의 의식 속의 공간이며 그 속에서 생활하고 꿈꾸고 희망하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 하계훈

사윤택_야속한 계절이여! 가을에서 겨울로_캔버스에 유채_62.8×72.7cm_2015

사윤택의 '움직임'이 의미하는 것 ● 현재까지 사윤택의 그림 속 주인공은 '움직임'이다. 그것이 시간의 움직임이건, 시공간의 움직임이건, 또한 몇 초간의 짧은 움직임에 관한 것이건, 끝없이 계속되는 움직임이건, 대상의 움직임이건, 주체의 움직임이건, 그의 회화는 움직이는 것에 주목한다. ● 시간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자주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재는 공이다. 공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그의 그림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작은 공의 예기치 않은 움직임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 그것은 작은 변수들이 큰 각도의 변화를 결과적으로 일으키기도 하는 세계의 우연성과 필연성에 대한 은유이다. 공이 솟았다가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것은 필연이지만, 최초에 주어진 힘의 방향을 좌우하는 공기의 움직임이나 낙하지점에서 공의 타격에 영향을 받을 대상의 존재는 우연이다. 사윤택이 공의 움직임으로 화면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최초의 방식은, 다소간의 유머 감각이 개입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산뜻하고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 정지된 화면에 움직임을 부여한다는 어찌 보면 심각하게 보일 수도 있는 도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실험들을 어렵지 않게 데려다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형식적 논의를 피해 내용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19세기 말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가 연속 촬영 기법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대상들, 이를테면 달리는 말이나 펜싱선수 등의 움직임의 순간들을 이차원 평면에 고착시키고자 했던 실험에 영향을 받아, 현대의 본질을 속도로 보았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이 한 화면에 대상의 움직임을 중첩되는 선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개발했는데, 사윤택이 화면 속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형식면에서 이들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사윤택은 미래주의자들의 겹치기 방식에 과장된 원근법을 부여하여 날아오는 공이 화면 밖에 있는 관객에게 육박하는 듯이 보이게 하는 등의 박진감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 움직임의 '의미'에 대해서라면 사윤택의 화면과 백년전 미래주의자들의 동세가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윤택은 자신의 화면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움직임을 '일시적 발작', '순간적 일탈' 등의 언어로 묘사한다. 실상 움직임은 세계의 필연으로, 지구의 공전과 자전 속에서 인간은 세계의 거대한 움직임에 따라 일상의 속도를 계획하고 조절한다. 그런데 사윤택이 주목하는 것은,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발작적이고 일시적이며 예기치 않은 움직임들인 것이다. 그는 움직임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궤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유약하여 깨지기 쉬운 개인들에게 관심이 있는 듯이 보인다. 지나치는 한마디 말을 곱씹고 우연하게 본 한 순간의 이미지에 매혹되는 개인, 나와 우리의 말해지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관심 말이다. ● 그가 더 복잡하게 그려내는 화면들에서는 시간의 움직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공간의 움직임이 함께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 눈에 들어올 수 없는 공간들이 한 화면에 구성되고 그 안에서 기물들이나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는 표현들이 복잡하게 생성되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과거 동서양의 작품 속에서 따 온 풍경과 인물들이 맥락 없이 차용되기도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혹스럽게 하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에서, 화면의 구심점은 대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풍경 속 어느 구석에 이젤을 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화면 속에 그려진 기물들을 동시적으로 그림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초현실적 이중 구성으로 나타난다. 그림을 그리는 나를 그리는 그림을 그리는 나...식의 액자 속의 액자 구조를 가진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습은, 안경을 쓰고 체구가 작은, 그러나 길게 뻗은 팔을 유연하게 휘저으며 그림을 완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윤택_별 헤는 밤_캔버스에 유채_132×162cm_2013

학습에 몰두하는 소년처럼 열중해 있는 모습으로, 어딘지 앞뒤가 꽉 막힌 너드(nerd)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인물은 의외로 사윤택의 자화상으로 의도된 것이다. 실제 사윤택 작가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가가 사윤택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여기기는 쉽지 않다. 사윤택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달리, 키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에 곱슬머리를 가진 강한 인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여성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남성 화가보다 더 활발하고 생기 있어 보이는 이 여성화가 역시 사윤택은 자신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바, 이 인물들은 '자화상'이라기보다는 '자아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적합할 듯 싶다. 물론 여성과 남성을 오가는 이러한 자아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보는 이의 다층적 해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면 작가의 내면과 연관된 표현이든, 정신분석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일차적인 접근법이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소년이든 여성형이든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에 집중해서 보았을 때 쉽게 발견되는 지점은 그들의 전능함이다. ● 화면 속 전능함, 그것은 붓을 든 팔이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표현에서 뿐 아니라 실제로는 만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만나게 하는 내용의 그림들에서 주로 화가의 모습이 함께 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가의 손에서 펼쳐지는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 그러한 시공간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세계의 필연적 법칙들이, 장난감 마을을 만들었다 부수고 그 속에서 개연성 없이도 인물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처럼 쉽게 경계가 사라지고 변형되고 전치되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러한 전능함이 화면 안에서의 이야기임을 그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화가의 그림은 프레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현시하며, 프레임 밖에서 전능함을 발휘하는 화가의 모습조차 프레임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가는 프레임의 트랩에 갇혀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화면 밖으로 빠른 속도로 질주하지만 그는 다시 반대편 화면으로 돌아 나온다. 이것은 그림의 한계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림 안의 무한성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사윤택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물들은, 죽을 때까지 춤을 추어야 하는 분홍신의 주인공처럼 화면 속에서 계속 움직여야 한다. 날아오는 공을 뒤통수에 맞는 사람도, 하늘을 가르며 다이빙을 하는 사람도, 전력을 다해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그림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제 운명을 산다. ● 이러한 지점에서, 사윤택의 그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 효과를 끌어내게 한다. 그의 화면 속 기물이나 인물들이 가지는 한계는,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술에 걸린 듯 이유를 모른 채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닌 현실의 인간들은, 사실상 자신의 근원이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혹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산다. 효율성의 미망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에너지를 소진하여 자신의 사용가능성을 극대화시키려 매진하는 가운데 한 생애가 흘러간다. 사윤택이 그리는 트랩에 갇힌 인물들은, 좀처럼 오지 않는 약속된 미래를 기다리며 제자리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우리를 닮았다. 그러나 그의 화면 속 주인공인 '움직임'은, 현재를 계속 활동시키는 움직임,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 움직임이다. 그의 화면에 담긴 아주 짧은 순간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어느 것도 멈추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이 세계 속에서, 순간의 움직임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이루는 시간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심리적 출발선에 선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 이윤희

이건영_PL.a.net.#09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10cm_2012
이건영_The white shaded backyard_Jeju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5×131.25cm_2013

The white shade in backyard ● '흰 그늘진 마당'에서 보여 지는 공간은 인간이 어떤 목적에 의해 사용하다 버려진 공간이다. 본래 자연이었던 이 공간은 그렇게 폐기 처분되어 이름 지을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이 공간은 과거와 현재가 뒤엉키는 공간이 되었으며, 버려졌으나 본래의 자연이 다시 교접하고 생성하는 공간인 것이다. 본인은 '흰 그늘'이라는 시적표현으로서 작업에 대해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첫째로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 밝은 어둠인 그늘에 '흰'이 붙음으로써 사진 속 공간들에 단순히 인간에 의해 버려지고 폐기처분되어진 공간, 혹은 혼돈의 공간이 아닌 다시 소생하고 생성하는 공간임을 의미하고 있다. 둘째로 '마당'의 의미는 지척에 있는 빈 공간을 의미하며 동시에 탈춤에서 사용하는 한 마당, 한 마당처럼 파편화된 시간성에 대해 중첩적 의미로 마당이라는 시공간적 단어를 사용하였다. ● 본인은 이러한 공간을 마주하는 행위를 통해 상처 입은 자연의 얼굴들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폐허 위로 다시 회귀하는 자연이 함께 존재하는 이중의 공간을 보여줌으로 자연의 멈추지 않는 생명력, 즉 문명으로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다시 생명을 일깨우는 자연의 자기 순환적 생성력을 드러내는 생성의 공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 이건영

Vol.20150130f | 다른관찰-민성식_사윤택_이건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