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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226_금요일_06:00pm
후원 / 한국현대조각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통의동 6번지) 이룸빌딩 Tel. +82.2.730.7707 palaisdeseoul.com blog.naver.com/palaisdes
도시. 그 거대한 생명체의 풍경 ● 1. 도시의 풍경은 활기를 가장한다. 하늘을 치받는 건물은 그 안의 사람들 모습이 상상이 힘들 정도로 매끈한 표면으로 덮혀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직선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며, 자동차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 위를 온갖 기호와 신호체계를 따라 움직인다. 도시 전체를 휘감는 기계소리들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소녀들의 수다도, 흥얼거리는 작은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거대한 표면과 기계의 소음 속에 인간의 삶이 묻혀버린 곳. 이것이 도시의 풍경이다. ● 대도시의 삶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교차한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서로 모순되는 꿈을 꾸고, 엇갈리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르다는 것에 관심도 없고, 타인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지나치게 확장된 다양성은 다른 차원에서 균질적인 것이 되었다. 도시의 동상이몽은 무한대로 증식하여 뭉게뭉게 공중에 떠오르고, 그러는 동안에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여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사라진다. 급변하는 도시에 영원불변하는 가치는 없으며,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가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도시는 숨쉬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무너지고 더 높이 서며, 점점 더 도시 내의 표면적과 밀도를 높이고 있다. 우리는 그 거대한 생명체 위에 기생하는 존재처럼 도시의 호흡에 이끌려간다.
2. 최형섭 작가는 도시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 그 이상의 기묘함을 작품에 담았다. 출렁거리는 도시 위에서 방위도 절대지표도 없이 함께 부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을 가늘고 높게 받치고 있는 받침대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도시의 삶에 대한 상징이다. 초현실주의 언어유희처럼 개연성 없이 모인 각자의 사람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며 하나의 내러티브가 생긴다.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여자의 어색한 자세 때문에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도 조금씩 어색한 상태로 멈춰있다. 연극적인 상황은 작품을 관객을 그 상황의 관조자로 남아있게 한다. ● 오늘날 사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소비의 수호가자 되었다. 여성의 사진은 온라인 쇼핑몰에 포토샵 수정을 거쳐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원래 모델의 모습보다는 모니터 속의 작은 얼굴, 잘록한 허리, 긴 다리의 그녀를 바라보며 장바구니에 옷 한 벌을 더 담게 될 것이다. 소위 '셀카'를 찍는 젊은 여성은 '얼짱 각도'가 나오는 위치에서 자신의 얼굴을 담고, 곧 그 사진은 SNS에 올라가 친구들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파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풍경이 또 다른 도시의 풍경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순간과 시간을 사는 사람은 없다. 이미지가 제공하는 세상을 살면서 편집, 수정된 이미지가 실제라고 믿는다.
3. 사진 속 어떤 남녀가 어떤 성곽의 벤치에 앉아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작가는 직접 영화의 그 장소에 가서 작품을 설치해 놓고 촬영하였다. 실제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사진 속 장면은 원근감을 교묘하게 조정한 눈속임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작품의 남녀는 생각보다 작고 작품의 벤치는 사진 속과 달리 위태로울 만치 높다. 이미지가 가짜라는 생각에 앞서 남녀의 표정이 심각하다. 남성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고, 여성은 걱정스러우면서도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남성의 고통은 과장되었고, 여성의 머뭇거림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 또 다른 작품에도 남녀가 등장한다. 유흥가로 통칭하는 홍대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건물 1층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에 나오는 남녀가 서 있다. 수원성 배경 속 현대의 연인에 이어 현대적 건물을 배경으로 한 조선의 연인의 시간이 묘하게 교차한다. 이 두 연인 영화와 그림이라는 허구 속에 등장한 인물이다. 허구가 재생산되고 그것이 다시 물질적으로 구현되는 프로세스. 이것은 도시의 외관, 심지어 도시인의 정신을 이루는 핵심적인 구조로 작용하고 있다. ● 한편으로는 도시의 붕괴된 시간성을 드러낸다. 조선시대라는 과거와 현재가 동일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과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기될 것과 떠오를 것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 한편으로는 다른 작품 속의 전형적인 연인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익숙한 이미지들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기법은 오늘날 흔하게 미디어가 조작하는 내러티브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4. 마지막으로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작가가 미국 유학시절에 살던 집은 바퀴가 달린 높은 받침대 위에 올라가 있다. 고향을 떠나 부유하던 유학시절은 도시에서의 소외를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집을 안식처로 삼고 있는 불안정한 마음은 지금 이 순간도 다를 바가 없다. 최형섭은 고향도 없이 떠도는 유목적인 도시인의 삶을 바퀴 달린 집으로 표현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도 서울이 고향일 수 없다. 태어나서 자란 곳도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였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때 그 사람들이 아니며, 오랜 시간 그 곳을 지칭하던 동과 번지마저 도로명 주소로 바뀌었다. 편리와 합리를 명목으로 추진한 개발은 고향을 사라지게 했고, 추억의 기원이 되는 장소와 사람을 기억 속에만 남도록 했다. 기억의 총합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면, 도시 속의 우리는 증명할 수 없는 기억들로 이루어진 떠도는 존재가 된다. ● 그러기에 도시의 활기는 진실과 거짓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이 가식이라거나 진실임을 증명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생각은 해롭다. 다양한 욕망의 기호체계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면 그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로 이끌려가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도시라는 거대한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위를 달리는 작은 일개미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 이수
Vol.20141222f | 최형섭展 / CHOIHYUNGSUP / 崔亨燮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