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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21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 휴관
피아룩스 PIALUX ART SPHERE 서울 종로구 효자로 7길 22-13 한옥쇼룸 Tel. +82.2.732.9905 pialux.co.kr www.facebook.com/pialuxartsphere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 과열된 '광장 휴머니즘'을 식히는 미적 기제 ● "진실하면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더욱이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면 나는 더 힘찬 박수를 보낸다." (에밀 졸라 Emile Zola) ● 1. 허보리는 더 이상 광장으로 가지 않는다. 그의 회화는 광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마음의 방'으로의 방향선회가 있은 후부터, 선동이나 소란스러운 웅변의 범주 밖으로 벗어난 때부터, 그의 붓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들은 그래서 광장의 부산물이거나 교차로에서 가져온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시선의 뒤 안으로의 물러섬과 더 가깝게 결부된 것들이고, 살아있음의 흐름이 더 잘 감지되는 것들이다.
마음의 방은 어떤 곳인가? 작가는 말한다. "어둠 속의 백열등 빛"이나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점진적이며 은은하게 흐르는 흐름이 있는 곳이라고, "연기나 향기" 알갱이들처럼 대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존재의 기운들과 대면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그곳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풍경을, 잉크처럼 번지는 흐름과 실존입자들의 부유를 그리고 또 그린다. 작가는 처음부터 이 보이지 않는 풍경만을 취급해 왔다. 그에게 마음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마음을 담겨있지 않은 풍경은 신앙심이 결여된 종교 회화, 충성심이 결여된 군주의 초상화와 같은 것이다. 코로(J.-B. Camille Corot)의 회화에 대한 테오필 토레(Theophile Thore)의 비평이 떠오르는 게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 "코로는 언제나 단 하나의 똑같은 풍경밖에 그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화가다.?? 허보리의 세계에서는 마음을 다룰 때에만 진정한 풍경화가 된다. 마음이 배제된 풍경, 그 안으로 몸을 숨기고 싶은 마음의 방이 부재하는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멋진 가로수 길과 황혼의 강렬한 색조만을 앞세우는 풍경화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작가가 자신이 그리는 풍경의 밖에 위치해 있는 풍경은 감상용 눈요깃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풍경으로 나아갈 수 없다.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은 "한 개인의 침범당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새삼 부각시킨다. 마음이 침범당해 타인들과의 간격과 거리가 허용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스위스의 데이비드 시그너(David Signer)가 "열대성 휴머니즘"으로 명명한 덫, 보드리야르가 '소통의 황홀경'으로 짚은 상황, 곧 사람들의 관계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 사이의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못해 구성원들이 모방욕망, 경쟁, 열정, 질투심, 원망 등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전체성과 폭력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거리의 폐지와 그로 인한 과열된 관계와 과잉 소통이야말로 포스트모던적 자아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런 자의식은 피로감의 엔트로피와 폭력성의 증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허보리가 부단히 탈주를 기획하지 않을 수 없는 '과열된 휴머니즘'이요 '광장의 선동'인 것이다. 작가는 숨고, 도망치고, 달아난다. 작은 나무인형에 문을 달고, 그 안으로 들어가 한 동안 틀어박혀 있는 것을 꿈꾼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나무 숲으로 숨어버릴까 궁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폰을 버리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고 다짐한다. 작가는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곳들을 그려왔다. 때로 그것은 버려진 종이박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회화는 단지 숨을 곳을 그려넣는 공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회화 자체가 숨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마음의 풍경은, 그리고 회화는 과열된 휴머니즘을 냉각해 그 체제의 전복을 꾀하는 미학적 기제인 것이다.
마음은 비록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전체성의 체계에 공포를 야기시킨다. 미메시스적 욕망을 넘어 진정한 '한 사람 성(性)', 깊이 있는 개인성을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혁명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마음의 풍경을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자신을 유배지화 하는, 베이컨적 의미의 동굴의 우상에 매몰되는 것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광장의 우상, 모방욕망과 질투심으로 뜨거워진 포스트모던적 파토스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필연적인 시도다. ● 화가가 도시의 군주나 수행원이 아니라 "마음의 포수(捕手)"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화는 도시를 우회하고 광장을 가로질러 마음으로 가는 미적 여정이어야 한다. 도시를 건설하고 광장을 정복하는 것은 폭력과 약탈을 동반하며, 따라서 군주나 정치가의 관심사일 순 있어도 예술가의 길일 수는 없다. '마음으로 난 길'이 예술가가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허보리의 회화론은 "타자와의 폭력적인 근접성과 무차별화"에 매몰되는 이 시대의 위험을 우회적으로 폭로하고 전복시킨다. 지체없이 마음을 향해 선회함으로써, 과열된 '광장 휴머니즘'과 '도시의 전체성(Totality of the city)'에 대한 안티테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2. 테크닉의 면에서 보자면 20세기 미술은 거칠고 동물적인 미술이다. 묘사와 해석이 아니라, 곧바로 행동으로 돌입한다. 화가들은 묘사되는 대상을 배제하는 유행에 대거 가담했다. 마네는 재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회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앙드레 말로도 모델이 아니라 재료에 몰입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허보리는 그 데카당한 충고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에게 매체로서 회화, 재료로서 안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대상이나 모델, 내용을 희생양으로 내몰 필요는 없었다. 회화든 재료든 기법이든, 마음의 방을 담는 그릇이거나 그 자체가 될 때에만 의미를 지닐 뿐,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허보리에게 대상이나 모델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사물의 외적 특성을 파악하고 재현하는 것이 최우선하는 고려사항은 아니더라도, 사물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대상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인 회화'를 입증하는데 목적이 있는 모더니즘 미학으로 포괄될 수 없다. 작가는 오히려 사물에 심리극적인 역할을 부여해 의인화한다.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일종의 배우(俳優)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매개체다. 그에게 사물들은 세잔느적 의미의 정물(靜物)이나 뒤샹적 의미의 개념-오브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들은 연출자가 할당한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 그 역할이 활성화되는 동안 사물들은 사물 자체이기를 중단한다. 바닥에 어질러진 약병은 쇠약해진 심신을 의미한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스마트폰은 과도한 소통으로부터의 탈주라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성해낸다. 닫힌 문이 달린 상자, 사다리 없는 높은 집, 집무성한 수풀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은 지친 영혼을 비유해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우거진 숲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길 잃은 막막한 마음"을 소개한다. 한 때 그렸던 소시지 더미는 존재를 탈진시키는 폭력적이고 부담스러운 일과를 의미했었다.
최근작들에선 "두툼하고 볼륨있는 수채 붓"이 등장하고, 상황들은 자주 "닫혀있는 방"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우거진 숲"에서 전개된다. 그것들은 여전히 의인화된 작가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마음의 풍경이다. "탐스러운 머리칼과 든든한 몸통, 쭉 뻗은 다리"를 지닌 수채 붓은 작가의 욕망과 꿈과 고통을 대변한다. 그의 분신인 붓은 분홍빛 연기를 내뿜으며 초현실적인 풍경을 만든다. 그렇듯 마음은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도피된 일상, 실존과 상상된 탈실존의 경계를 분주히 넘나든다. 그 각각의 경험은 그것을 통해 획득된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매개한다. 사방이 밀폐된 하얀 방도 두툼하고 볼륨있는 수채 붓과 같이 의인화된 공간이다. 흰색은 때 묻기 쉬운 색이요, 흰 방은 "침범당하기 쉬운" 장소다. 그림들은 각각의 창백한 불안을 품은 채 아직 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정작 바닥의 흰 카펫에는 큰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다. 『마음의 점』은 회화라는 고통스러운 침묵에 대한 도상학적 해석을 내포한다. 회화는 해결책을 내놓지 않는다. 질문을 더 극단으로 몰아갈 뿐이다. 그 통증에 의해 마음은 쉽게 얼룩진다. 그리고 화가는 그렇게 생긴 얼룩들에 의해서만 마음의 풍경을 그릴 준비를 마칠 수 있다. ● 마음의 포수는 마음이 거하는 곳, 인간이 피어나고 시드는 존재성의 내밀한 산실(産室)을 향해 매순간 방향을 선회한다. 허보리의 마음의 풍경은 충분히 초현실적이지만 위협적일만큼 낯설지는 않다. 데자 뷔(deja vu), 또는 언젠가 적어도 한번은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곳의 어떤 특성이 우리 모두의 보편적 욕망과 더 보편적인 불안, 그리고 모호한 희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허보리가 그의 마음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틀림없이 더욱 낯설어 보일 그곳을 스케치해내는 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심상용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왔다. 이것은 연극 같은 것인데 나는 마음의 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가시(可視)적인 사물을 주물럭거려 최대한 비유적으로 그것에 가까워지도록 연기하도록 도와주는 연출자이다. 그러니까 나의 배우들은 주변의 사물들이고 내가 그리는 배경이나 소품들은 연극의 무대가 된다. 나는 이런 떠다니는 공허한 이미지를 잡아내는 포수(捕手) 이다. ● 내 주변의 사물들 중에서 어떤 용도나 모양에 있어서 가장 인간다운 주체에 대해 고민해 봤다. 그것은 정말 너무나 가까이 있는 붓이었는데(사실 모든 사물이 인간에 비유될 수 있다. 또 모든 사물로 인간의 인생을 사유할 수 있는 것 같다) 두툼하고 볼륨 있는 수채 붓은 탐스러운 머리칼, 든든한 몸통, 쭉 뻗은 다리 등으로 비유될 수 있는 신체를 갖고 있는 듯 보였다. ● 또한 붓은 일꾼이고 노동자이다. 그리고 그림을 만드는 도구로서 창조, 생산의 임무를 하고 있다. 나는 이 붓에 내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 붓은 자아를 상징하고 고난 중의 꿈을 꾼다. 그래서 그(그녀)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른 무대에 서게 되는데 각각의 곳에서 그 공간이 가지는 각각의 감정에 충실한 채 존재한다. 이 주체는 감정의 주인이 되어 공간을 소유한다. ● 마음을 만질 수 있다면 그 질감은 어떤 것일까. 어둠 속에 연약하게 일렁이는 빛이나 향기를 가진 연기, 혹은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가는 털, 바닥부터 조용히 천천히 차오르는 물, 미끌거리고 질척이는 액체는 아닐까. 그것은 공간 안에 당당히 존재하는 무겁고 딱딱한 육면체의 대리석이 아니고, 그 반대의 어떤 것이며 존재하다가도 쉬이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 마음을 표현했지만 내 그림 속에 마음은 없다. 그냥 상황, 설정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마음의 안이라서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또 내가 고정시킨 상황이지만 그것은 1대1로 대상과 일치할 수 없다. 그 감정을 어찌 말로, 글로, 이미지로, 음악으로 춤으로 100% 재현할 수 있을까. 단지 가까이 가서 다시 느끼고 영원히 기록하고 싶은 소망이 있을 뿐이다. ■ 허보리
Vol.20141218d | 허보리展 / HURBOREE / 許보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