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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2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크리스마스 휴관
갤러리 세줄 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나는 미디어, 특히 영상이라는 매체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상현실이나 환영이라기보다 그것이나, 우리, 나를 대신하는 대상이라고 믿고 작업해왔다. ● 내가 생각하는 미디어라는 매체의 출발은 현실너머의 상상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에 가까웠다. 내가 겪고 있는 공간을 움직이게 하고 숨쉬게 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자아, 즉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대신 표현하고 싶었다. 가상으로서의 네러티브 구조의 영화가 아니라, 물리적인 공간을 움직여 인간이라는 본질을 대신하는 상징으로 들여다 보고 싶었던 것이다. ● 즉, 나의 비디오는 공간의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무대이거나 배경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있는 인간의 생명, 혹은 혼, 또 그 안의 이야기를 대신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그래서 나는 영상 이외의 타 매체와의 혼합을 시도하는 과정에 이 둘을 동일시하며 그 본질이 퍼포머, 혹은 오브제, 조각등과 비디오를 오가며 그 어느 것도 배경과 주인공으로 나누지 않고 하나가 되기를 열망한다. 또한 내가 표현하는 공간의 빛이나 그림자, 이 모든 것들 조차 나에게 가상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주체에 가깝다. 나는 비디오라는 빛의 매체를 가상으로 다루지 않고 우리의 정신을 보다 극명하게 표현해주는 보이지 안는 정신적인 영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기술로 테크닉으로 만드는 미디어의 영역일지라도 작가에 의한 작업과정을 통해, 미디어아트는 화가의 붓질과 같은 감정의 전달 수단이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미디어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전복시키고 해체하며 역사와 개인의 기억을 섞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간극, 혹은 수많은 상반된 감정의 교차지점에서 심리적인 혼동도 표현한다, 또한 일정한 속도와 흐름과 발달을 지향하는 과학과 달리 역사성이라는 시간의 축적 속에서 그 역사의 틀을 벗어나 잠시 우리를 돌아보고 상상하고 경험하게 한다. ● 한국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지난 여름 머물렀던 대만 단수이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 장소들은 나에게 지금 현 시점에서 과거의 흔적을 느끼고 공부하게 하였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아픈 근, 현대사일수도 있고, 이웃나라의 여러 역사적 사실들에 의한 문화의 혼재일수도 있다. 내가 이 장소들 속에 주목하는 것은 지나간 인간의 이야기와 관념화된 역사 (벽이나 건물들로 은유된) 의 관계이다. 그것이 사실적인 역사적 내용의 리서치를 넘어, 지나간 사람의 흔적과 혹은 건물의 벽과 바닥에 스민 옛사람의 흔적과 기억의 움직임으로 표현하여 나의 공간은 나의 숨과 함께 그 이미지에 물리적인 변형을 가하게 된다.
대만 단수이의 지리적 여건 안 (대만의 북쪽 항만) 의 특징적인 '무역상인들의 숙소-Tamsui Customs Officer's Residence'는 그 공간 안의 문화의 혼재, 역사적 사건들에 의한 장소 성격의 탈과꿈과, 그 것을 지켜내기 위한 고인들의 이야기가 나의 작업의 주된 모티브가 되었다. ● 한국의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장 앞의 미루나무,,,, 삶과 죽음의 교차지점에서 이 나무를 붙잡고 울었을 수많은 인간들과 그의 정령이 맺혀있을 법한 나무의 이야기는 또한 나의 모티브가 되어 다시 나의 비디오 결과물로 현 시대의 전자부적처럼 실재나무에 붙어 살아 숨쉬게 될 것이다. ● 또한 서대문 형무소 안에 복원되어있는 수감자들을 운동시키고 감시했던 '격벽장'의 구조와 그 과거의 흔적들의 움직임은 무용과 콜라보레이션으로 풀어내었다, 삶을 지탱해내기 위한 운동과 갇혀있고 감시 당하는 자의 심리적인 혼돈의 상황은 무용가의 영감에 다시 환치되어 새로운 안무의 시나리오를 쓰고, 그 시나리오는 나의 비디오에 환치되어 역사의 공간의 움직임으로 가시화 될 것이다, 나는 특히 이번 전시에서 '격벽장' 작업의 결과물의 완성과 개념을 '관계'와 '과정'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 내가 그 동안 하고 있는 나의 정신에 의한 공간변형을 공동작업자와의 관계 속에 확장시켜 그 과정자체를 작업의 결과물로 보여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언제나 무엇의 완성은 있기 마련인데, 지나가는 현재의 시간이나 과정의 소중함은 나이가 들었다거나, 죽음을 앞두었다거나, 무엇인가의 끝지점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되어진다.... 무엇인가의 끝지점이 있다고 가정해 볼 때, 나는 현재의 내가 살며 맺고 있는 관계를 보다 즐겁게 작업의 결과물로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이번 전시는 실제 공간의 환영을 제작하여 이중설치였던 그동안의 영상작업에서 주된 주제를 이루웠던 '숨'이라는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내어 작년에 이어 역사와 시간의 흐름이 가득 축적된 공간들의 스토리로, 조금은 말하기 힘든 한국 근 현대의 아픈 시간, 또 물 건너 대만이라는 나라에 레지던시 체험을 하면 서 느꼈던 지역의 특수성 등을 나의 '숨'이라는 것으로 다시 시나리오화 시켜 무용가의 몸의 움직임과 극 또는 실체와 같은 비디오 조각으로의 환치를 통해 '숨'의 본질을 보다 관계적인 호흡으로 견고하게 키워 나갈 것이다, ● 내가 공동작업자인 퍼포머에게 제시한 것은 이 '격벽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설명과 공간의 제공.짤막한 시나리오이다. 그리고 내가 요구한 것은 그 시나리오에 의한 움직임과 함께 그 움직임이 생성되는 과정의 관찰과 우리들의 소통이다. 미술가가 작품을 생산해 내기까지의 과정 안에 안무가의 몸을 통한 서사적 내러티브 구조를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안무가의 몸동작과 움직임을 녹화해 그 움직임에 의한 이 격벽장의 재배치와 공간 이미지의 반사,, 움직임으로 역사적 아픔과 수감자들의 슬픔이 스며든 공간을 다시 탄생한 우리의 새로운 시나리오에 의해 탈바꿈시킨다. ● 구체적으로 격벽장의 오묘한 벽들의 여러 신 중 몇 장면을 포착하여 각각 2채널로 구성한다, 한쪽은 안무가의 움직임의 시나리오 영상, 다른 한쪽은 같은 공간에 그 안무가의 움직임을 캡처하어 공간이 그 움직임으로 환치되는 영상을 시각적으로 배치한다. 나의 숨은 '흔적의 움직임'으로 안무가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환치된 시나리오의 결과물이 된다. ■ 금민정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금민정의 신작들을 보면서 이 작가가 원래 조각을 전공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단순히 「통곡의 미루나무」에 나무가 쓰이고, 「태엽 감는 새_여옥사」와 「다시 못 볼지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죠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 과 같은 작품에서 모니터들을 입체적으로 연결하였다는 조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현대조각보다 로댕이나 부르델 같은 근대의 조각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대리석 속에서 인체를 재현하려 했던 르네상스의 장인들이 연상되었다. 생명이 없는 돌 덩어리 속에서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는 모상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부단한 노력들 말이다. '숨쉬게 만드는 것', '살이 있는 그 무엇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전시 공간이나 문과 같은 환경이 마치 생물처럼 숨쉬는 환영을 만들었던 이전 작품들에서도 발견되었던 특질이라면, 이번에 그녀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고르게 내쉬는 호흡보다 더 강렬한 것, 숨이 턱까지 찬 짐승이 내뱉는 숨, 혹은 날숨과 들숨에 따라 진동하는 근육의 움직임처럼 좀더 진한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다.
과거의 영상 작품들이 장소특정적인 작품일 때조차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무형무취의 공간들을 대상으로 표현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해 문화역 284의 RTO에서 퍼포먼스와 함께 발표했던 「숨 쉬는 벽」(2013)에 이어서 구체적인 공간들, 특히 풍부한 역사적인 맥락을 가진 공간들을 소재로 한다. 하나는 지난 여름 레지던시에 참여했던 대만 북쪽의 단수이(Tamsui) 지역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작가가 2년째 입주해있는 홍은레지던시 인근에 위치한 서대문 형무소이다. 먼저 단수이는 17세기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등 서구의 침입을 받았던 역사적인 항구로, 베이징 조약에 따라 영국 영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상관들이 모이면서 19세기 후반 대만 최대의 항구로 번영했던 곳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인근 기룽항으로 무역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단수이는 쇠락의 길을 걷다 최근 식민지의 잔재였던 역사적 건물들이 오히려 관광자원이 되어 지금은 관광지로 탈바꿈한 곳이다. 「작은 하얀집을 구조하라」는 세관원들의 숙소로 현재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영국식 근대 건축물이다. 한때 'Little White House'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으니 문화계 인사들의 반발에 의해 지금은 역사 유적지로 변모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열강(먼저 근대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을 포함하여)에 의해 문호를 개방해야 했던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간직한 많은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작은 하얀집을 구조하라」는 대만에서 작가가 만난 현지의 안무가 Wei Ching-ju와 함께 건물의 이미지와 그림자를 움직여가며 만들어낸 퍼포먼스와 영상이다. 단수이에 대한 작품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 머물면서 외부인의 시선에서 관찰했던 만큼 대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기저에 깔려 있으며, 완성된 작품에서도 작가는 담담한 관찰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숨쉬는 문_대만, 단수이」, 「숨 그림자, 신념은 감옥이다_대만, 홍마오청」 등에서 대상과의 관조적 거리가 존재한다.
이에 비해 서대문형무소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은 대상과의 거리가 가깝고, 작가는 관찰자적 시선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 '참여자'로 서 있다. 가장 시선을 끄는 작품은 작가가 안무가 이선아와 촬영한 단연 「역사가 된 세트장을 위한 연출_격벽장」이다. 일제가 한국인 사상범들을 수감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근대적 감옥인 서대문형무소는 한 곳에서 전체를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파놉티콘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그 중, 2011년 복원된 격벽장은 부채꼴 모양의 시설 안에 죄수들을 한 명씩 밀어넣고 운동을 하도록 만든 시설이다. 수감되어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거나, 극단적인 경우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이 남은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관리'라는 명분 하에 운동을 시켰다. 건강한 생명체가 할 수 있는 행위이며, 또한 건강한 생명체가 되기 위해 하는 행위인 운동을 죄수들에게 시키는 일 자체도 아이러니인데,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없게 1인실에 각각 집어 넣고 운동을 시키는 '웃픈' 상황이 벌어졌던 공간이 바로 격벽장인 것이다. 벽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각자 운동에 집중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작가는 안무가 이선아에게 전달했다. 안무가는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격벽장을 찾았고, 그 벽 앞에 서 있었던 사람들, 그 땅 위를 밟고 뛰었던 사람들을 상상하고 느껴보려 했다. 또한 수감자들의 운동이라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안무를 만들어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몸을 매체로 하여 뛰고 걷고 느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영상으로 그 장면을 담고 편집했다. 완성된 결과물에는 그 공간에 대한 부연설명이 없지만, 독특한 공간의 구조와 그 공간을 누비는 안무가의 동작에 의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벽과 벽 너머를 소망했을 사람의 안타까운 감정이 전달되어 온다. 두 사람 모두 죄를 짓지 않았으면서도 죄인이 되었을 수많은 사람들, 설사 죄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기에 꿈꾸고 소망했을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 과거의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고,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너무나 말끔하게 복원되어 끔찍했던 흔적조차 이제는 사라져버린 듯한 공간에서. 「작은 하얀집을 구조하라」와 「역사가 된 세트장을 위한 연출_격벽장」 두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타 장르의 예술가와 협업을 진행한 방식이다. 여기서 작가는 전체 작품을 진행하는 감독이면서도, 안무가가 공동의 창작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적절히 조성해준다.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하려는 말을 잘 들어주고 말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듯, 성공적인 협업이 예술가와 예술가의 대화가 되려면 공동의 창작자가 표현하려는 것에 귀 기울이고, 표현하고 싶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금민정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참여를 제한함으로써 오히려 협업자가 공동의 프로젝트에 더 기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나간 셈이다. 앞으로 안무가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의 협업도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된다.
모니터와 모니터를 연결하는 조형적 실험을 시도한 「태엽 감는 새_여옥사」, 「다시 못 볼지 모르니까 이렇게 말하죠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의 경우에는 아직 작가 자신도 말했듯이 어쩌면 기술적인 발전이 좀더 이루어진다면 조형적으로 좀더 작가의 의도에 가까운 결과물이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니터와 모니터가 용접에 의해 결합된 하드웨어의 인상이 강해서, 서로 다른 시대를 가로지르거나 시간이 혼재되는 상황에 몰입하기가 오히려 어렵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을 영상이 만들어내는 환영으로, 비물질성의 극단에서 공간의 숨을 이야기하던 작가가, 손에 만져지는 것들(어쩌면 손으로 만질 수 없게 될 뻔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무 둥치와 모니터들처럼 시각과 촉각을 모두 자극하는 오브제들을 이용하는 것이 이상하게 반갑다. 50년 전, 영상 매체가 전통 예술의 '물질성'을 벗어나 '비물질성'의 매력으로 예술가들을 유인했다면, 금민정은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에서 거꾸로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들과 공간의 세계로 향해갔다. 살아 있는 것들을 향해, 더 뜨겁게 살아 있는 것들을 향해서. ■ 이수정
Vol.20141211g | 금민정展 / GUEMMINJEONG / 金珉廷 / installation.video.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