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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팔레 드 서울 2014 신진작가 공모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 Tel. +82.2.730.7707 palaisdeseoul.com blog.naver.com/palaisdes
두려움 없는 삶이 있을까. 우리는 의외로 아주 사소한 것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누군가는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아는데도 곤충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낀다. 어떤 이는 비둘기가 모여 있는 공원이나 광장에 가지 못한다. 사방이 막혀있다는 이유로 엘리베이터를 못 타는 사람도 있다. 폐쇄공포, 고소공포, 대인공포, 광장공포 같은 단어는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쓰인다. 비합리적인 공포가 특정한 상황에서, 그것도 자신에게만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이겨낼 수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 권지은 작가는 공포증을 주제로 작품을 하고 있다. 공포증을 의미하는 포비아(phobia)의 어원은 같은 의미의 그리스어 포보스(phobos)에서 유래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보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공포의 신이다. 공포가 공격성과 잔인함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공포의 원형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예상 밖에 공포의 어머니가 미의 여신이라는 점에서 아름다움과도 관계가 깊다 할 수 있다. ● 작가는 어린 시절 말에 물린 트라우마로 부터 공포의 근원을 찾는다. 오늘날 미디어로 먼저 자연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사람 같은 이성과 감성을 가진 동물을 상상한다. 환상의 세계에서 동물들은 언제나 어린아이와 약자의 편이며, 아름다운 공주를 돕는다. 그러나 작가가 어린 시절 실제로 만난 말은 예상치 못하게 물어버렸다. 그리고 어렸던 그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조작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와 예측할 수 없는 실제 세계에 대한 괴리. 작가에게는 그것이 공포의 시작이었다. 작품에는 공포의 근원인 얼룩말을 통해 현실의 환상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담겨있다. 작품 속 공간은 얼룩말의 등으로 이루어진 사막이나 벌판, 혹은 동굴과 같은 형상이다.
얼룩무늬는 작가가 느끼는 두려움의 근원인 말에 대한 시각적 형상화이자, 공포를 대표하는 상징적 이미지이다. 고요해 보이지만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줄무늬로 싸인 공간은 작가 자신만이 느끼는 두려움의 세계다. 얼룩말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자유로이 풀을 뜯는 동물로서의 개체가 아니라, 환상 속 자연을 이루는 패턴일 뿐이다. 단순한 무늬가 된 얼룩말은 작품 속 공간을 어지러이 구성하면서 펼쳐지는 불안한 장애물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 공격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여 등만 드러난 말들은 서로를 구분할 수 없다. 겹쳐져 있는 말의 등이 언제 움직여 환상세계에 갇힌 존재들을 집어삼킬지 모른다. ● 권지은의 초기작에는 어둠의 장막과 같은 공포의 공간을 창조한다. 공포는 깊고 무거운 먹색과 힘과 권위의 금색으로 출렁이며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지옥같이 어둡고 사막처럼 끝없는 가상의 공간은 시간마저 멈춰버린 박제된 공간이다. 이러한 공포의 공간은 자궁과 같은 막힌 터널의 형상을 하기도 하고 화사한 색상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작품 속 공간은 하나의 세계이며, 작가가 느끼는 현실세계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어떤 면을 보는가에 따라 이 세상은 한없이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가 말의 상징으로 얼룩말의 줄무늬를 선택한 이유는 무얼까. 유독 얼룩말에게만 독특한 줄무늬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룩말의 줄무늬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속설에 의하면 얼룩말의 줄무늬는 천적의 시각을 교란시켜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게 한다고도 하고, 얼룩무늬를 싫어하는 쇠파리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던, 작품 속 공포의 상징인 말의 줄무늬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작가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말 역시 다른 존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얼룩 속에 몸을 감춘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권지은의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한다. 작가는 공포의 대상을 작품 속에 가두고 그 대상을 관조한다. 작품 밖에서 보면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을 바라볼 그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숨기고 서로의 몸을 밀착하여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보이게 하는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 이 단계에서 공포의 대상과 공포의 주체는 시점이 바뀌며 역전된다. 작가는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두려움의 대상을 통제가 가능한 공간 속에 가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음껏 가지고 놀며 대상을 객관화한다. 작가는 환상으로 퇴행하기 보다는,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그것과 대면하는 방법을 택했다. 예측할 수 없는 현실에서 느끼던 공포는 조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환상세계를 창조하여 극복하고자 한다. ●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공포를 담은 판도라의 상자들을 품고 산다. 혹은 공포의 실체를 마주하지 못한 채 환상의 세계 속에서 무심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무심함은 동화를 꿈꾸는 아이들처럼 현실을 대면하기 이전의 상태일 수도 있다. 환상에서 깨어 현실을 대면할 때 예측할 수 없이 밀려오는 세계에 공포를 느낀다. 권지은 작가는 공포를 이겨내는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대상에 대한 공포가 또 다른 환상이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 이수
꿈과 환상이 그렇게 깨어져 버리고 마는 순간, 이제 더는 환상에 빠질 수도, 꿈을 꿀 수도 없는 현실 만이 남아 버린다. 결국 나를 채워 주던 기대와 행복의 실체가 결국 그러지 않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두려움이 클수록, 공포가 클수록 더욱 더 환상과 꿈 속으로 빠져드는지도 모르겠다... 잠을 잘 수 없게 하고, 온 몸이 떨리게 하고, 울음이 나게 하고 엄마를 찾게 만드는 공포와 두려움은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나에게 스며든다. 어디에나 있는, 언제 나타날 지 모르는 공포가 끝도 없이 수도 없이 되풀이 된다. 시작도 끝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 권지은
Vol.20141122d | 권지은展 / KWONJEEEUN / 權智恩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