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1120_목요일_06:00pm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대구문화예술회관 DAEGU CULTURE AND ARTS CENTER 대구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Tel. +82.53.606.6114 artcenter.daegu.go.kr
대구문화예술회관(관장 박재환)은 고향을 지키며 작품 활동은 물론 대구 경북지역 예술행정을 통해 큰 발자취를 남기신 故서석규 선생의 유작, 사료 등 90여점을 11월 19일부터 12월 7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 1~3실에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우리 회관이 지속적으로 작고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기획한 시리즈로 대구는 물론 한국의 근현대 화단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해왔으며, 2006년 장석수, 2008년 박현기, 2011년 김수명, 2012년 박광호 선생의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올해는 1970년대 지역 예술행정에 투신했던 故 서석규 선생의 작품전을 개최한다. ● 故서석규 선생은 해방과 한국전쟁과 같은 근현대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기를 겪은 세대로 자립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았다. 1973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미협 경북지부장과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경북·대구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지방문화를 변혁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예총의 문예진흥금의 지방 환원을 위해 투쟁하였고, 대구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위해서 민간차원의 건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도전(경북도미술대전)을 만들어 지방인재 발굴에도 힘쓰는 등 문화계의 행정가라는 별칭으로 '문화도지사'로 불리기도 했다. ■ 대구문화예술회관
"2003년 지역의 한 원로화가는 당시 팔순을 맞아 개인전을 여는 서석규 선생의 팸플릿 서문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회고를 실었다. "1946년 해외에서 돌아와 ... 서석규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 그의 거실에서 내 관심을 끄는 자화상을 발견했으며 이 20호 가량의 반신상은 심상치 않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플랑드르의 화가 반 아이크나 홀바인의 인물화와 같은 참신한 존재감을 주는 묘사성에서 받는 존재감이다." 서석규 선생보다 5년 정도 더 연상인 이 노화가의 글은 몇 줄 안 되는 촌평일지라도 핵심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정점식 선생은 일제가 물러간 뒤 1946년경 멀리 북만에서 대구로 귀환했다. 그 무렵 15세기 북유럽회화를 실제로 대한 적은 없었겠지만 2003년 회고 시점에서 플랑드르 화가 반 아이크나 홀바인의 그림에 비유한 것은 정곡을 벗어나지 않은 예리한 통찰이다. 그것이 "중세 말에 나타나기 시작해 르네상스 사실주의로 발달해간 자연관조의 회화형식"임을 지적하려 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해하기에 비록 구시대적인 양식이었을망정 당시로서는 이만한 고전주의적 화풍의 단단한 묘사력을 보기 힘들었다는 말이다. "서석규 화백의 작품에서 받은 자극적인 관심은 이전 상식 밑에서의 놀라움이었다."는 회상은 그때 받은 작가의 강렬한 개성에 대한 인상을 고백한 것으로 들린다. ● 해방공간의 대구에서 서석규의 화풍과 화가로서의 위치는 이로써 어느 정도 짐작할만하다. 앞에서 언급된 자화상은 22세 때의 작품이다. 패망 직전에 몰린 일제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학업을 중단한 채 아마 1944년 어느 즈음 귀국하여 해방을 맞고 이제 막 화가로서 새 출발을 해야 할 앞날을 불안과 긴장 속에 주시하듯 그러나 동요함 없는 굳건한 의지로 서있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 서석규의 1949년 자화상을 보면 앞의 46년 그림과 큰 차이를 드러내 격동기의 사회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우선 고전주의적이었던 화풍이 명백하게 표현주의적인 양식으로 바뀌었다. 거친 붓질도 그렇고 두텁게 바른 물감의 층이 어딘지 모를 불안한 요소를 고조시키며 눈빛에서도 시름을 감추지 않아 마치 다가올 1950년 전쟁을 예감이라도 한 듯하다.
그 다음 작품이 바로 1950년 작 '귀로'였다. 그는 꽤 오랫동안 이와 동일한 주제를 이어나가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겪었을법한 황폐해진 삶의 현실을 그렸다. 여기서 그는 피란민의 귀향을 상징하기도 하고 가난하고 힘들던 삶의 현장으로부터 귀가(歸家)하는 데서 오는 안도감을 염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결국 그 시대의 시대상과 겹쳐진다. 이것이 점차 추상화된 표현주의 양식으로 추구된다. ● 1951년 작 '귀가(歸家)'를 보면 정신과 육체 모두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남루한 행색과 지친 몰골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여 가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전쟁의 상흔과 깊이 관련돼 보인다. 전쟁터의 난민으로, 혹은 생존의 극한에서 귀가하는 사람들 같다. 거칠고 혼란스러운 붓질로 그린 추상화된 화면이 현실의 참담함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얼굴이나 표정에서 분노와 슬픔, 절망 같은 기분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하나같이 분절되고 단속적인 윤곽선들과 윤기 없이 메마른 느낌의 색상, 제스처가 감정표현에 충실하지만 그 만큼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동시에 반영한다. ● 이 작품의 경우 대상의 추상화에 의해 형상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워 모든 요소가 전형적인 표현주의의 분위기다. 해방 전후의 시기까지 아카데믹한 자연주의에 머물렀던 우리 근대미술의 양식이 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추상과 표현주의로 나아가 50년대 말에 이르러 본격적인 앵포르멜의 수용이 이루어지는 그 궤적을 서석규의 개인 양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일치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이다. ● 불리한 제작여건과 전쟁을 겪고 있는 위기상황에서도 작가의 본분인 붓을 놓지 않은 예술가적 의식을 서석규는 50년대 초 이들 몇 작품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으며 작가의 숙명적인 기질마저 느끼게 한다. 많은 작가들이 종군작가로 가담해야 했던 때에 서석규의 이런 함축적인 추상화는 대구화단은 물론 한국근대미술사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한 신문지상에 삽화와 함께 실은 「回路」, 곧 '돌아오는 길'이란 뜻의 짧은 에세이가 있는데, "어린 시절 아빠 따라 거닐던 길들 가면은 올 수 있고 오면은 갈 수 있는 길 「回路」에의 정은 그립다." 라고 읊고 있다. 이 단문에서도 '귀로'라는 주제에 갖는 애련한 정서의 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한 주제를 그렇게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 만큼 체험에 깊게 아로새겨진 기억의 많은 내용을 함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제 '귀로' 주제는 더 이상 이전의 현실적 삶에 대한 동정의 투사가 아니라 이상적 관념으로 메아리 된다. 같은 제목의1960년 작과 65년의 두 작품은 커다란 생선이 화면의 중심에 등장한다. 물고기를 이고 가는 장면이 고통스러운 전쟁시기의 행렬과는 무관하게 수확이나 다산과 풍요를 구가하는 듯하다. 그리고 68년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제목으로 등장하면서 따라서 주제도 형식도 더욱 관념화 된다.
그의 추상화 단계는 5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60년대에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9년 개인전을 앞둔 시점에서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62년부터 사실에서 추상세계로 전환했다고 말하지만 그 후에도 그렇게 일관된 추구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추상세계가 앵포르멜적인 순수한 형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서사적이고 관념적인 요소의 개입을 배제시키지 못한 점이 지적된다. 좀 더 이른 시기에 나온 비평이지만 정점식의 다음과 같은 시각은 이를 예견했다. ● "서석규의 앵포르멜 방법에 의한 화면 구성은 너무 치밀한 프로포오션 때문에 또는 소품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앵포르멜의 원리에 위배된 감이 있다. 앵포르멜은 자동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본능적인 부르짖음이 화면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한결 원숙해진 단계에서 그가 '귀로' 다음으로 즐겨 취급한 다른 주제는 '산' 시리즈이다. 이미 50년대부터 시작한 제목이지만 1954년 작 '설경-산'과 1960년 작 '산'에서 보듯 이 새로운 주제의 대상은 자연이다. 당대의 삶이나 현실을 반영하던 시선은 1957년 작 '판자촌' 정도에서 끝이 나고 60년대에는 본격적인 추상으로 전환했지만 그는 순수한 모더니스트로 만족하지 못했다. 이전의 서사적 관념으로 회귀하기도 하고 현실적 시각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중간 중간 자연의 관조를 반영한 그림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그때 찾는 대표적인 주제가 '산'의 풍경이었다. "내적사고에서 출발하는 사물관찰로 들어선 단계"에서도 허용된 주제가 바로 '산' 시리즈였던 셈이다. 작가는 "산을 주제로 다각적인 표현과 그 내적 장엄함을 표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그의 마지막 단계의 작풍은 다시 정점식의 다음과 같은 요지의 통찰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 작가가 쌓아 올린 업적이 높을수록 그 틀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들을 과거의 것으로 정리하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그것은 동양적인 너그러운 공간조형이며 이따금 이들 공간에서 서법적인 기호가 등장하고 있다." 일찍이 근대작가로서 괄목할만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서석규 화백은 시대가 요청하는 변화에 부응하며 삶을 관조하는 자세로 모더니즘을 추구했다. 실험적인 창조정신을 견지해오며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왔고 적지 않는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문화예술행정이라는 작품 외적인 일에 많은 정열을 쏟는 동안 오로지 작품에만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경우 거두었을 성과에 아쉬운 미련이 가는 것은 그의 '존재감'에 기대가 큰 까닭일 것이다. ■ 김영동
Vol.20141119c | 서석규展 / SEOSUKKYU / 徐錫珪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