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_12:00pm~07:00pm
미광화랑 MIKWANG GALLERY 부산시 수영구 광남로 172번길 2(민락동 701-3번지) Tel. +82.51.758.2247 www.mkart.co.kr
무구한 심성과 이지적인 감성 ● 마지막 1세대 미술가, 오영재의 면모 오영재(1923-1999)는 근현대기를 살다간 부산의 마지막 1세대 미술가에 속한다. 1956년 울산에서 부산 영도로 이주하여 해동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부산미술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뒤로 평화중학교, 청구중고등학교, 동주여중·여상 강사를 거쳐, 70년대 초 서면학원과 경남학원에서 강의를 한 것 외에 오로지 외길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을 뿐이다. ● 그가 생애에 걸쳐 지향한 바는, "애기로 태어날 때 지닌 순수성의 원질에 근거를 둔 지정의(知情意)의 평균적 작용에 따른 순수성과 모든 기성관념을 털어버린 직관적 대화의 입장에서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형(形)을 그리고, 채색을 한 결과에서 자신의 총화적 가치성과 만나게 되는 것"에 있다(작가의 변,1992). ●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여 늘 보다 나은 작품을 추구하던 나머지 62세 때인 1984년에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검소하고 질박한 성품은 도록에 그대로 드러난다. 짙은 쑥색의 단색으로 인쇄된 4장짜리 팸플릿에는 도판은 고작 2점이고, 나머지는 작품이 이행되어온 과정을 '작업 전개 메모'라는 제목 아래 사실화시기, 구상화시기, 추상화시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리고 작품과 관련하여 '구조주의', '문화로서의 자연', '사회적 분위기'란 항목으로 한편의 논문처럼 세세하게 견해를 기술해 두었다. 앞면에는 '1984 오영재 구조주의 회화전'이라 표기했다. 그 당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스스로 변화해가는 자신의 작품을 쫓아다니다 보니 개인전을 할 겨를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도 60이 넘어버렸고…, 솔직히 말하면 난생 첫 개인전이라는 데에 대한 감회도 없지 않지만, 지금도 조금 이르지 않나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1980년, 필자는 종합예술전문지인 '공간'으로부터 8월호에 게재할 부산미술에 관한 특집 원고청탁을 받게 되었으며, 표제를 '남부의 감성과 삶과 혼'이라 정하고 소개할 작가 14명 가운데 그가 포함되었다. 그에게 관련 자료를 부탁했더니, 예상 외로 작품사진과 함께 16절 갱지 4장에 볼펜으로 작성한 자신의 작품에 관한 글을 주었다. 마치 필자의 입장에서 쓴 글처럼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는 관점에서 서술한 점도 놀라웠거니와 그 논리 전개와 함께 끝부분의 자평(自評)에 감탄하였다. ● 표제를 "자연의 본질적 진리에 순응한 체질화에의 탐색으로 새로운 주체의식의 확립을 찾아 고행한 역정"이라 한 뒤, 글 첫머리에 "이 화가를 대하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느낌보다 그림을 직접 대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향년 59세이면서 10년쯤 아래로 젊게 보이며, 40여년 그림을 그려왔다면서 한 번의 개인전도 안하고 있는 것도 화가치고는 드문 일로 생각된다.…(중략)…" 그리고, 끝부분에 가서 "아무튼 필자로서는 직위도 명예도 재력도 없는 일개 야인화가의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이 살아가는 근엄하고 진지한 자세에 공감과 감동을 금할 수 없는 것에서 이 글을 쓰기에 이르렀으며, 덧붙여 이 화가에 바라고 싶은 것은 현재까지의 역정보다도 앞으로 전개될 제작의 결과를 중시하고 그 성과를 믿고 싶다는 심정이 한층 크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는 것이다."(1980. 5. 13)
그의 특별한 면모를 보여준 일화는 1988년의 '계간미술'과 관련된 일이다. 봄호 특집으로 '희귀근대양화 15점을 찾아내다'라는 기획기사로, 서울의 이모 미술평론가가 대구에서 발굴한 작품 가운데 그의 '독서하는 여인'(1952년경)을 김용조(1916-1944)의 작품인양 표기하고, 표지화로 소개한 것이다. 잘못된 것임을 안 신옥진(공간화랑)이 그를 찾아가 작품 확인과 함께 바로잡을 것을 사정했다. 그는 얘기를 듣고 요지부동 묵묵부답일 뿐, 일체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아 답답하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 뒤 자기를 모델로 그린 작품임을 알고 있는 사모님이 다시 간청하니, "평론가 이 선생은 뭐가 되느냐"는 단 한마디였다. 결국 이 일은 세월이 흘러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근대를 보는 눈' 전에 다시 김용조의 이름으로 전시된 것을 보고 신옥진이 지적하여 철시되기에 이르렀고, 오영재의 작품으로 바로 잡았다. 일화는 입으로 전해져 그가 마지막 병석에 있을 즈음, 김창수(송하갤러리)가 그 때의 일이 궁금해 다시 물었더니,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 초창기 부산화단을 지켜보고 한때 화랑경영을 했던 김창섭도 생전에 그를 두고 언급하길, "그는 미움이나 편견 따위를 모르는 사람이다. 대인관계에서나 남의 작품을 대할 때 그처럼 성실한 사람은 달리 보기가 드물다. 그는 남의 허물 같은 것은 아예 상관하지 않는 어질디 어진 사람이다."라고 했다(미의 사제들, 1972).
그는 1956년부터 영도에서 내리 30년을 셋방살이로 살았는데, 남항동→영선동→신선동→청학동으로 옮겨가며, 영도가 지닌 천혜의 자연 풍광과 해양성을 일체로 호흡하며 '구상화시기'의 걸작들과 '추상화시기'를 전개해갔다. 그는 가시적인 대상을 작은 면을 지닌 입체로 보는 관점에서 형상을 해석하여 그린 까닭에, 마치 화폭은 맑고 투명한 수정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영롱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인 영감의 원천은 그가 즐겨 찾았던 절영로 해안산책길의 투명한 공기와 빛, 바위와 파도의 움직임에서 마주친 것들이다. 작은 면들로 다듬어진 바닷가의 크고 작은 바위들은 그의 작품으로 변용되어 있기에, 필자는 '오영재 바위'라고 부른다. ● 1985년 4월 양산 법기리 농가에 주거하면서부터 법기수원지의 숲과 나무들의 표정이 그의 화폭과 일체화되어 곡선형 색면들로 연접하는 순수 추상의 '파라다이스' 연작으로 작품화 되어갔다. 그런지, 1990년 2회 개인전의 표제도 '식물-꽃과 잎새의 표징 시리즈'라고 붙였다. 작품은 한결 다르게 변모하였으나 궁핍한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없자, 그를 아낀 허천(수필가)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모여 1989년 5월 '오영재 화백 후원회'를 만들어 회비를 모아 생활을 지원하고, 또 '2회 개인전'까지 열게 해주었다. ● 그는 간혹 부산시내로 나들이 할 때는 중앙동 좁은 골목 안쪽에 있는 단골 주점인 '골목집'에 들러서 쉬다가곤 했다. 어느 날 주모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딱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얼마 뒤 그는 그림 1점을 들고 와 주모에게 '이 그림 팔아서 집 옮기는데 보태라'면서 '풍중목련'(1974년)을 주고 갔다. 평소 술값을 못 내고 외상으로 장부에 달아두었던 그로서는 마음의 빚을 그렇게 갚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꽃그림 2점 가운데 색다른 이 작품은 이사 간 '부산포'에 걸려서 애장되다가 결국 주모가 몸이 아파 병원비를 마련하기 힘들 때, 주위의 권유로 2009년 경남도립미술관 소장품으로 구입되어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 1999년 광안리 민락동에 있던 송하갤러리는 '화업 50년 오영재 초대전'을 기획하고 화려하게 꾸민 도록까지 준비하였지만 생애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전시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두고 3월 8일 지병으로 타계하여 결과적으로 '유작전'이 된 것이다.
생전에 그는 "그림의 가치성은 세월이 흘러도 싫증을 주지 않는 영구적 새로움의 감동성에 있다고 믿으며, 이것이 곧 참된 사회적 참여요 보편적 미적 제시이자 인간의 의식이 그 본능적 기본 소망인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되는 것으로 진행하는 습관화에의 통로이자 자극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 옥영식
Vol.20141110g | 오영재展 / OHYOUNGJAE / 吳榮在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