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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10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부암동 362-21번지) Tel. +82.(0)2.395.3222 www.zahamuseum.org
장숙의 이미지들은 재현하기 보다는 촉발시킨다. 사유의 예증을 넘어 사유의 내적 한계에 이르렀을 때 생겨나는 틈. 이미지는 바로 이 틈을 촉발하고 명명하며 증거한다. 집 역시 자신의 틈, 자신과도 다른 것으로 존재한다. 친밀한 집은 낯선 공간이 되어버린다. 사진이라는 집 속에서 현전과 부재,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사유불가능한 것으로 출몰한다. 이제 부재는 현전 '앞'에서 현전을 통해 재현되는 대립항이 아니라 현전의 등 '뒤'에 들러붙어 현전이 볼 수 없는 가능성으로 돌아온다. 삶과 죽음은 '산-죽음'(living dead)이 되어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는 유령적 이미지로 복귀한다. 집은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나를 촉발시키는 유령들의 장소이다. 틈(구멍)에서 출발하여 '뒤'를 경유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장숙의 여정은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페르세포네를 닮아있다.
집은 무엇보다도 틈, 구멍이다. 틈을 없애 하나의 닫힌 전체를 구성하려는 철학의 집과 달리 사진 이미지들은 틈이 집을 구성하는 기원임을 드러낸다. 틈은 의미를 여는 기원인 동시에 철학적 개념이 봉합할 수 없는 간극으로 남아 의미에 저항한다. 그것은 의미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의미 자체를 절개하는 내부적 한계이다. 틈이 무엇보다도 몸에 난 구멍인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사진 이미지들이 촉발시키는 '지금'은 내부의 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항상' 상실되어 버린 '지금'과 '도래할' '지금'으로 분열되어 있다. 데리다의 말대로 '지금'은 더 이상 지금이 아니거나 '예측할 수 없는 지금'을 품을 때 '지금'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고유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이미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틈이다. 틈은 재현적 의미가 살해할 수 없는 유령으로 남아 사진 이미지 속에서 복귀한다. 이미지는 이미 상실된 것을 애도하는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것을 환대하는 구멍난 집이다. 몸에 난 구멍들은 몸을 단순한 물질이나 의미의 집적으로 간주할 수 없도록 한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자연도 문화도 아닌 몸, 그 둘 모두를 (불)가능하게 하는 구멍을 본다. 늙은 여인의 가려진 한쪽 눈이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구멍, 맹목이듯이.
늙은 여인의 뒷모습은 무엇보다도 '뒤'의 사유가 기원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온전함을 두려워한 제우스의 분할은 인간에게 '뒤'를 남겨준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뒤'는 타자에의 절대적 노출이요, 메울 수 없는 틈이다. 윌스(David Wills)의 말대로 노출된 '뒤'는 예측불가능한 것이 급습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지만, 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서는 어떤 새로움도 기대할 수 없는 기회의 공간이기도 하다. '뒤'는 도래할 것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출몰하는 '틈'이다. 비가시적 타자와의 접촉, '앞'의 사유가 가늠할 수 없는 '뒤'와의 만남 속에서만 나는 나일 수 있다. 손으로 가려진 여인의 얼굴은 보는 눈 이전에 이미 노출된 얼굴이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사진 이미지들은 철학의 '뒤'에서 철학을 껴안고 철학이 사유할 수 없는 질문들을 생산해낸다. 이미지는 어떻게 '자신 이상'인 동시에 자신과도 다른가? 이미지는 왜 '뒤'의 사유일 수밖에 없는가?
사진이 무엇보다도 '애도'(mourning)라면 그것은 애도의 불가능을 위한 애도, 애도의 애도일 것이다. '언어란 사물의 살해'라는 헤겔의 말처럼 애도란 의미를 통해 상실을 회복하는 과정을 포함하지만 사진 이미지들이 애도하는 것은 애도 과정 속에서 충분히 살해되지 않아 다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애도, 애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애도. 이것이 사진 이미지들이 '자신 이상' 또는 '자신과도 다른' 것이 되는 이유이다. 『늙은 여자의 집』에서 '산-죽음'의 이미지들, 이미지들의 불가능한 겹침이 발생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진이라는 유령의 집에서 이미지들은 이미 자신이 아닌 것과 분리불가능하게 얽혀있고 대립으로 사유할 수 없는 '뒤'와 연루되어 있다. 늙은 여자의 집은 '스스로를 죽음에 빚지고 있는'(데리다) 이미지들이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사진의 '현재'가 이미 항상 죽음의 잉여물임을 지시하는 불가능한 공간이다. ■ 민승기
Vol.20141107d | 장숙展 / CHANGSOOK / 張琡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