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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부산광역시_한국문화예술위원회_부산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30am~06:30pm / 일요일 휴관
티엘갤러리 TL gallery 부산시 수영구 민락본동로 29-1 티엘아트센터 1층 Tel. +82.51.623.3999 blog.naver.com/publicarttl
허상으로 드러나는 질서 ● 티엘갤러리가 자리한 곳은 수영2호교와 맞닿은 민락동 끝자락으로, 이 부근은 부산의 도시풍경, 특히 부산의 밤풍경이 극명하게 달라지는 경계의 지점이다. 이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해운대, 더 정확히는 해운대의 특정한 지구인 마린시티의 밤풍경을 내가 '현재하는 미래도시'라 부르는 이유는 그 장관이 경이롭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현듯 이방인의 경험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소외의 경험인데, 박윤희 작가가 2012년 작업한 자신의 평면작품 제목을 '외부인'이라고 명명하게 된 배경과 유사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현대도시건축물의 상징적인 재료인 철근과 유리로 된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 풍경을 포착하고 그 풍경의 외피를 따라 마티에르없이 정연하게 한 가지 색으로만 채색한 회화작품이다.
박윤희의 최근 작품들은 현대도시의 글로벌한 스타일을 갖춘 유리 빌딩의 외형이자 외관을 보여준다. 수많은 도시풍경 중에서도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그리드이거나 초고층빌딩의 압도하는 장대한 높이에서 나아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장 소재인 유리라는 외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유리-창을 넘어 유리의 외피를 입은 유리-벽의 빌딩은 밤이 되면 켜지는 내부 등 때문에 칸칸이 불을 밝히고, 도심 주변부와는 달리,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 공간의 존재를 드러낸다. 유리의 투명성과 공간의 밝기에 따른 일방향의 가시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가시거리 때문에 환하게 밝힌 빌딩의 내부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작고 반짝이는 유리알의 집합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유리알 내부를 볼 수 없으므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박윤희는 자신의 위치가 그 곳의 외부이며 외부인의 시선으로 도심의 풍경을, 도심 풍경을 구성하는 유리-벽의 빌딩을 관찰한다. ● 이 외부인의 시선이 단지 유리-벽을 경계로 한 물리적인 공간의 내외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2011년 PVC투명포장상자를 쌓아 올린 설치 작업 「행복예감」을 통해 알 수 있다. 입구도 출구도 없이 그저 상자를 쌓아 올린 이 작업은 임대되지 않은(임대를 기다리는) 텅 빈 고층빌딩을 연상시키며 비어 있다는 것과 행복과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의 욕망 사이에서 등치되지 않는 소외의 경험을 드러낸다. ● 그녀가 도시를 가로지르며 분주히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 쇼핑센터의 분주함에 관심을 두기보다 오히려 시각을 자극하는 그러한 움직임의 요소들을 삭제하고 정적인 것들, 예를 들어 그녀가 부단히 철근 뼈대, 형광등, 유리 창문이 만들어내는 패턴들과 반짝이는 유리, 서로 간섭하며 생겨나는 빛과 그림자만 추출해 내는 자신의 시각적 특이성에 집중력을 동원하는 이유는 아마도 '외부인'과 '행복예감' 사이의 불화에 집중하려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근대건축에서 유리-벽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유리-벽은 유리를 경계로 투과되는 빛의 양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내외부의 밝기에 차이가 없고 그것이 양방향적인 가시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럼으로써 위계가 없는 균등하고 평등한 공간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현대도시의 현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 미스 반 데 로에의 유리마천루(glass tower)가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뉴욕 맨하탄의 정신이자 창조성이 되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분주하게도 현대성의 상징이자 현대도시의 스타일이 변형되어갔다. 현대건축은 현대도시공간을 글로벌 도시 구축을 위해 부단히 글로벌한 양식을 채택했고, 마치 표면의 동일성으로도 현대도시를 건설한 것 같은 착각을 안겨주기 바빴다. ● 현대도시에서 유리빌딩은 어디에나 있다. 수많은 유리빌딩은 다른 유리빌딩의 빛의 양을 가로막거나 간섭한다. 그렇게 때문에 내부는 언제나 외부보다 어두우며 외부로부터의 가시성같은 것은 확보되지 않는다. 유리의 투명성에도 불구하고 빛의 양과 방향 때문에 양방향의 가시성에는 일정한 통제가 생기고, 오히려 그러한 문제가 밝음과 어둠의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조건이 된다.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섬광같이 하얀 빛은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암시 할 뿐이다. (p.13 작품은 이 사실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녀의 근래 작품들이 유난히 문을 강조하고 문고리를 강조한다는 사실은 빌딩의 내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를 발견하려는 노력들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소통이나 연결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 그것이 속임수이며 환상인 동시에 오히려 더 강력한 차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게 한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에서 열려 있는 문은 없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생겨난 빛이고 그림자이며 환상이자 허상이다. 계급사회로 회귀하려는 욕망을 표출하듯 자신이 사는 곳이 '캐슬(castle)'이 되길 상상하며 유리 빌딩은 하나의 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문이 허상이라는 것, 그녀가 「일시적 풍경」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그녀는 이 '유리의 성'을 재현하기 위해, 자를 대고 검은색 유성매직으로 삐뚤임 없는 직선을 찬찬히 그어나가는데, 선이 면으로 채워지기 위해 마치 프린터가 무수한 라인으로 한 장의 그림을 복사하는 것 같은 기계적인 반복을 수행한다. 빌딩의 창문이나 입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타 넓은 면들을 채워 나가거나 또 여백으로 남겨놓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은 부단히 손작업으로 선을 그어 내는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마치 프린터 잉크가 바닥이 나서 색배합이 균일하지 않을 때처럼 흐릿한 라인 자국을 남기며 어렵사리 출력되고 있는 느낌마저 준다. 재현 방식의 이중성은 일시적 풍경의 허상을 드러내기 위한 작가의 고도의 집중력과 작업의 어려움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 박윤희의 작업에는 시종일관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사람들이 밥 먹고 가버린 식탁, 아직 설거지하지 않은 접시들"과 같은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 이유는 그녀가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도시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도시의 외부인으로 도시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유일한 장치이자 이유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부단히 손으로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 도시 안에는 내외부를 가르는 또 다른 도시가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재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미래의 것으로 있다. 도시는 그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람의 자리를 구분한다. 하지만 그러한 도시가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외부인과 행복예감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이며 갈등이고 우리 시대의 불행이다. 질서정연한 그리드 외벽이 그 속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하고 나풀거리게 했던 2009년 『질서의 풍경』(박윤희 개인전, 오픈스페이스배)이 의문스럽게 여겼던 바로 그 사실이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밝은 그 모습이 사실은 질서 속으로 우리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숨기려 하는 안타까운 노력들인 것이다. ■ 강선주
Vol.20141107a | 박윤희展 / PARKYOONHEE / 朴奫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