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1105_수요일_05:00pm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_부산시설공단 주관 /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_부산시민회관
관람시간 / 10:00am~07:30pm
부산시민회관 한슬갤러리 BUSAN CITIZEN HALL HANSEUL GRALLY 부산시 동구 자성로 133번길 16 1,2층 Tel. +82.51.630.5200 citizenhall.bisco.or.kr
부산시민회관은 부산지역의 참신하고 역량있는 청년작가를 발굴하여 창작지원하기한 「부산시민회관 청년작가 공모전」을 2009년부터 개최해오고 있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한 이번 공모전에서는 김유경(한국화), 정안용(설치) 작가가 선정되어 개인전을 개최한다.
김유경 작가는 인적이 드문 들판. 그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 강가나 못. 그 주변의 수풀. 버려진 집들. 오래된 건물. 형무소. 심지어 악몽의 심상까지 김유경 작가가 건드리는 장소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나 잘 보이지 않는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것들은 경계가 안정적일 때는 일상의 영역에 얌전히 있지만 경계가 동요할 경우 일탈의 영역으로 넘어가 충돌과 분열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장소들은 내가 안전한 삶의 공간에 있을 때 낭만적 풍경으로 보이다가도 내 삶이 흔들리는 순간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 ● 그녀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후자의 영역에 놓여 있기에 장소의 흔적에서 느껴지는 불안정함과 모호함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먹의 농담을 사용해 오래된 흑백사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1899~1980)의 영화『새』(1963)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공포의 발현은 초현실적인 어떤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일상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죽음과의 대면이 바로 히치콕 영화의 핵심이다. 물론 김유경 작가의 작품에서는 죽음과의 대면과 같은 극단적인 공포가 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상에 숨겨져 있거나 가장자리로 밀려난 어떤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히치콕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김제 어느 창고」(2013)를 보고 있으면 가장자리로 밀리고 심지어 버려진 것의 한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버려져 홀로 존재하던 것이 다른 무언가와 다시 대면할 때, 버림에 대한 원망과 관계형성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난다. 물론 그 너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렴풋한 희망도 있지만 그것은 쉽사리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흐릿한 이미지. 짙은 얼룩. 그림자 속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 공간. 그리고 여백에서 드러나는 대기의 일렁거림은 이러한 복합적인 심리상태와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가 가지고 있는 아픔은 그 아픔을 경험하거나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김유경 작가가 일관되게 포착하는 이 아픔과 불안은 결국 그녀 개인의 삶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nightmare」(2013)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심리 상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깜깜한 밤 불타는 숲의 모습을 드러낸 이미지에서 이것이 실제로 불타는 산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타오름의 이미지가 드러내는 역동성과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킬 듯 휘몰아치는 증발효과가 오히려 눈에 들어온다. 사물은 얼룩으로 전이되었기에 그 사물의 정체성도 모호하다. 파악도 되지 않은 대상이 순식간에 증발하고 있다. 정확히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확히 개념화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곧 세상 속에 얌전히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달리 말해 그녀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고독 · 불안정 · 불안 · 두려움은 세상의 질서에 얌전히 포섭되지 못한 그녀 자신의 실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불안이라는 것 자체가 나를 둘러싼 주변이 온전하지 못하고 어떤 결핍이 발생했기에 생겨나는 것 아닌가. 흥미로운 건 바로 이런 불안 기제가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현의 무너짐 또는 경계의 무너짐으로 형상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계의 무너짐은 인식의 무너짐이다. 즉 개념이 무너지고 감각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감각이 살아난다는 것은 나와 너가 사회의 기존 관념을 벗어나는 걸 말하는데,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식으로 표현하자면 상징계의 법칙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대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원형으로 돌아갈 때 잊어버렸던 진리 또는 실재와 마주한다는 것. ● 그런데 이 진리 또는 실재는 언제나 정확히 표상되거나 기표화 되지 않는다.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그 불편한 상태이기에 또한 불안하다. 그녀가 고스트(ghost)를 떠올리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엄밀히 생각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고스트의 존재는 영적인 존재 자체를 말하지는 않는다. 고스트의 존재가 영적인 존재가 되면 이는 범심론(汎心論)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이를 경우 모든 세계는 신이라는 존재로 통합되기에 경계도 분열도 파열도 없다. 해서 고스트의 존재는 자연이 가지고 있는 어떤 기억 · 에너지 · 힘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자 개별적인 존재 또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인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서양철학에서는 물활론(hylozoism, 物活論)이라 칭한다. 이는 그 생명의 영험성에 머리를 조아리는 애니미즘(animism)과도 다르다. 생명이 있어 여기에 신비함과 영험함을 부여하여 종교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애니미즘이라면 물활론은 바로 거기에 에너지와 생명이 있다고 믿는 자연주의적 태도 딱 거기까지다. ●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김유경 작가가 펼친 이미지 속에서 생명 이면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물질 또는 장소에 숨겨져 있는 흔적들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그녀가 포착한 흔적들은 불안의 언저리를 돌아다니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사실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질서와 개념의 성으로 둘러싸인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모호함과 경계 허물기 그리고 기괴한 것의 출현으로 숨겨진 아픔과 억압된 욕망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귀신을 불러내어 이승과 저승의 한풀이를 동시에 펼치는 일종의 굿판과도 닮아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 무엇도 볼 수 없지만 무엇이든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숨겨졌던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하고 이를 증발시킨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영역에 있다하여 멸시와 외면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무당이 사람은 물론 대지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불안 기제가 작동하는 그녀의 작품에서 나의 아픔과 우리의 아픔 그리고 사회의 아픔을 상상하고로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이는 치유의 영역과는 다르다. 치유는 문제가 해결될 때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우리는 그것을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를 해결하기한 출구를 찾는 것.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과제다.
정안용 작가는 자연의 흐름을 포착하는 데 관심이 많다. 날씨와 시간, 온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습을 보며 자연의 유기적 움직임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자연에서 특정 이미지를 찾아내 그것을 새로운 시각 형태로 구현하는 것을 현재 작업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선택된 대상이 연기(煙氣)이다. 연기는 그 움직임이 구름과 닮아 대기에서 자유로이 움직이는 운동 형태를 보여준다. 연기의 유기적 움직임은 자연계 원형질의 그것과 닮아있다. 세포단위를 원형질로 볼 때 대부분의 원형질은 그 형태와 움직임이 곡선의 형태를 띤다.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자연스러운 저항이 만날 경우 그 움직임의 패턴은 곡선의 형태로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저항을 거스르고 강력한 힘이 인위적으로 일어날 때 그곳에서 직선이 생겨난다. 바로 인간 문명에 의해 생산된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로운 곡선 운동을 보여주는 연기의 움직임은 자연계의 유기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일상적 소재이기에 그에게 매력적인 대상이 된다. ● 연기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항상 움직이는 것이기에,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물성을 가진 조형물로 만들어 낼 때 그 운동성은 즉각 삭제되기에 애초의 의도가 상실되기 일쑤다. 그도 그런 고민을 하였을 터. 해서 그가 선택한 매체는 사진이다. 사진은 빛을 활용한 매체이기에 연기의 속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 매체라 할 수 있다. 특히 디지털로 촬영한 수 천 개의 이미지를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연기의 속성을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토록 한다. ● 연기를 작업의 모티브로 삼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아픔도 있다. 2010년에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던 그는 애써 외면하고 무시했던 죽음을 직면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상상은 이중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하나는 삶의 무상함이며 다른 하나는 삶의 소중함이다. 이 둘은 양립불가능해 보이나 실상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삶의 무상함이나 소중함이나 모두 현재의 일상에서 벗어날 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지만 정작 삶 자체를 고민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어쨌든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적으로 체득했고 여기서 나오는 삶의 무상함이 연기라는 이미지와 자연스레 중첩된다.
해골 이미지를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연기를 형상화한「바니타스(Vanitas)」(2013)는 그의 이런 경험이 즉각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뜻을 가진 바니타스는 삶의 일시성과 덧없음을 상징하고 있다. 해골로 형상화된 죽음은 바로 개별적 존재의 삶이 얼마나 유한한지, 죽음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 즉각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중앙에치한 해골이 너무 뚜렷해 해골의 실존이 강력하게 부각된다. ● 바로 여기서 뭔가 어색한 지점이 생겨난다. 해골의 뚜렷함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강력하게 인지하게 되고 삶의 무상함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연기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주변의 연기는 사라지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해골을 꾸며주는 장식으로 보인다. 수많은 중첩을 통해 드러난 해골 이미지는 연기의 속성보다는 해골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서 가볍고 일시적인 연기의 속성이 해골을 단단하게 재현하는 순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구현한 작품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믿는다는 것」시리즈의 형상 중 예술의 이미지, 불상의 이미지가 그러하다.「Rising form」시리즈의 달러 화폐 이미지와「풍죽」의 대나무 이미지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보인다. 특히 디아섹으로 출력되어 반짝반짝한 작품으로 탈바꿈될 때 이 작품들은 재현된 대상의 물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물신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애초 그가 의도한 연기를 통한 삶의 무상이나 소중함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미술시장에서의 성공을 목적으로 한다면 충분히 실천해볼 전략이나 자신의 작업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원래의 목적을 충실히 풀어내는 작업들도 있다.「Concentrated form 14」(2013),「Rising form 3-2」(2013),「신선이 사는 집」(2013) 등은 재현의 대상이 따로 없어 레이어의 겹침에 의해 드러나는 새로운 이미지 형태를 실험하고 있다. 여기서는 사라짐이라는 연기의 속성이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연기의 움직임과 중첩의 효과를 보게 되고 가벼운 것이 무거워지는 과정을 파악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미지 실험은 특이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 그런데 정안용 작가가 정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연기의 레이어를 통해 재현하거나 드러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가지지 못한 것은 연기라는 실체일까 이미지일까 아니면 연기의 속성일까. 실제로 연기라는 실체는 큰 유리병에 담으면 일정 정도 포획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를 카메라로 촬영하면 이미지 역시 포착 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연기의 속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질 수 없는 것, 포섭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연기인 셈이다. ● 요컨대 그에게 연기는 개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개념적으로 중요한 것은 쉬이 잡을 수 없는 어떤 것과 이를 욕망하는 주체이다. 이것이 꼭 연기일 필요는 없다. 연기가 중요한 이유는 연기의 시각적 효과다. 그렇다면 연기의 시각적 효과와 연기를 통한 개념 작업을 좀 더 면밀히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고민은 여기에 놓인다. 연기를 통해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가 아니라 연기로 상징되는 개념과 연기의 시각적 효과의 만남과 불화. 향후 그가 풀어야할 숙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업의 완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 김재환
Vol.20141105f | 제6회 부산시민회관 청년작가 공모전 선정작가-김유경_정안용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