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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블로그_blog.naver.com/ldyeon70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10:00pm
갤러리 푸에스토 GALLERY PUESTO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92 Tel. +82.2.765.4331 puestogallery.co.kr
빈자(貧者)의 섬 - 작업일기 1: 미적 은유 속에 소멸된 주체의 자화상 ● 내 작품을 굳이 보편화된 미술 양식으로 규정하자면,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물이 주소재인 내 작업 양식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 작업의 형태는 어떤 형식으로든 나 자신을 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게 어떤 미적 의미를 내포하는지를 객관화시키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유는 화가의 감성(사유)이 정형화의, 규정화의 길로 접어드는 것, 그것이 개념화(관념화)로 치달으려 할 때 더욱 불필요한 고민이 깊어진다는 분명치 않은 믿음 때문이다. 더욱이 객관화를 향한 불필요한 사색과 예술 주체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고민조차도 중요치 않다. 그래서 늘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것이 요즘 내가 작업을 대하는 태도이다. 물론 돌이켜 보면 지금껏 항상 그래왔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내 작업의 화두는 '소통'이다. 진정한 소통은 주체의 소멸,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성의 소멸, 더 나아가 타자의 존재성까지 무화(無化)될 때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나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술이 주체 스스로의 의미 찾기, 아니면 스스로의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 활동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소멸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요즘 소통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변화된 작업의 형식이나 관심은 타자에 대한 인식의 확대에 있다. 주체는 타자의 그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되는 동인이 타자성을, 사회를, 작게는 가까운 주변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내 작업에서의 미인은 객관에 호소하는 '아름다움'이라는 허상의 탈(아니면, 틀)을 벗어던졌다. 더 이상 타자를 향해 '나는 아름답다'는 갈망을 호소하지 않는다. 치유될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기를 거부한다. 내 그림 속의 미인은 그냥 어느 도시의 한 가운데, 호화로운 상점의 진열대 주변에, 아니면 주변의 골목 여기저기에 오롯이 서있다. 그동안 소원했던 세상과 조우하듯이 말이다.
작업일기 2: '소통'의 미적 변주 ● 이제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자연계를 구성하는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본능적으로 주변과 닮아지려는 욕구를 가진다고 한다. 주변과 같은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카멜레온이나 사람들조차도 어느 날 여행 중에 낮선 환경을 만나게 되면, 자신과의 닮은꼴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의 형상은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생태학적으로 생명 유지의 본능을 포함한 주체의 확인이라는 본능적인 욕구가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주체의 확인은 생명 유지의 본능과 별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또 다른 화두를 꺼내보자.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양태를 확인하려는 끝없는 열망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이 참모습일거라는 믿음과 허상일 뿐이라는 착각의 경계를 소요한다. 이것이 내 작업 과정과 태도의 현재다.
거울... 나 또한 누구나 그렇듯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필요하다면 나는 뒷모습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위를 확인할 수 있다. 겨우 거울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만이 나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거울로 나를 확인한다. 그 반복되는 과정은 주체인 나를 위해 벌어지는 일일까? 그렇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코 실제로 마주대할 수 없는 나의 존재를 알면서도 말이다. 타자에게 보여 지는, 타자를 인식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타자일 뿐이다. 주체의 실체는 타자 속에 투영된 나일뿐이다. 그래서 주체는 타자의 그늘이다. 타자는 주체의 거울이다. 그 거울을 통해 나를 본다. 이것이 주체가 벗어날 수 없는 결핍이 아닐까? ● 결핍... 나의 결핍을 자각하는 순간 완벽한 존재를 추구하는 욕망이 이 결핍의 구멍을 채우려한다. 하지만 욕망일 뿐이다. 이제 메울 수 없는 결핍의 구멍을 인정하자.
마지막으로 작업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그림 속의 자화상은 나와 내안의 타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낮 설은 나를 타자를 통해 바라본다. 늘 결여되어 있고 결핍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욕망의 주변을 맴도는 나의 자화상이다. 내 작업의 주제인 미인도는 '소외', '고독', '결핍'과 같은 상실의 정서로부터 비롯되었다. ● '젊고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부러움, 시샘을 빌미로 꾸며진 가상의 공간이다.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한 대화가 소통이라 믿는 불편한 믿음, 초현실도 아닌 비현실의 허상 공간을 비행하는 의미 없는 단어들, 허구의 의미들이 결국 채워지지 않는 소외감과 상실감으로 남겨져 있다. 혹 '실체의 나'를 감추고 최첨단 사진 기술의 미화된 이미지로 포장, 위선으로 무장한 SNS에서의 '가짜인 나'는 가상의 환타지의 세계를 떠돌며 결핍된 욕구를 채우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작업에는 이런 나의 모습이 주제 형식으로 등장한다. 가느다란 모필(毛筆)의 먹선으로 구획된 인물 형상의 내부를 한국의 전통 채색으로 채우는 표현 방식이 조선시대의 미인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미인은 지금의 공간에서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의 이기를 아낌없이 즐기고 있다. 그 공간에서 나는 시간의 경계로 허락되지 않았던 인식의 간격을 해체하는 통시적(通時的)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나의 상상은 이질적으로 다가왔던 주변의 일상들을, 그리고 타자의 일상들을 채집하고 재조립해서 하나로 끌어다 놓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넌지시 웃음을 지으며 그 공간을 배회한다. 때로는 깨어있는 눈으로, 아니면 그 옛날 장자(莊子)가 꾸었던 나비의 꿈[胡蝶之夢]과 같이 깨어있는 현실의 공간과 깊은 수면의 늪 사이를 소요한다.
어느 날의 소요에서는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날의 나는 꿈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그물코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두 발은 드리워진 그물코에 빠져 저항하지 못하고 지구의 중력을 원망한다. 원망의 몸짓은 두 팔로 가느다란 그물코를 부여잡고 빠지지 않으려 허둥거린다. 그래서 그 날의 소요는 100m 달리기를 하는 육상선수처럼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힘을 빼고 두 발을 위로 뻗어 올리면 될 것을 말이다. 그 날의 소요는 방황이다. 그 방황은 고스란히 치마의 아랫단을 비집고 살짝 드러난 버선에 비춰진다. 주변인 L씨의 말이다. 하얀 버선이 그물코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이란다. 때로는 치맛단 속에 감추어진 발이 봉긋하게 솟아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온전히 드러내지도 못한 채 살짝 드러난 하얀 버선코만으로 마치 세상을 보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인은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생산해낸 매체를 아낌없이 즐기고 있지만, 버선코를 살짝 드러낸 그의 발은 여전히 그물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고깝게 들리는 L씨의 말에서 나의 결핍을 발견한다. 나의 방황을 발견한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를 발견한다. 내가 그린 미인의 버선코는 나의 결핍이고, 구멍이고 틈이 아닐까? ■ 이동연
Vol.20140916b | 이동연展 / LEEDONGYEON / 李東娟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