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2014_0911_목요일_06:30pm
기획 / La Vie 협찬 / 디자인 201_Hummingspider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미부아트센터 MIBOO ART CENTER 부산시 서구 암남공원로 82(암남동 616-4번지) Tel. +82.51.243.3100 blog.naver.com/artmiboo
'갊'은 '갈다'를 의미한다.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로 어떤 것의 표면을 매끄럽게 하거나 으깨다. 둘째로 기존의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모두의 의미가 공통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은 '노동을 통한 변화'이다. 인간의 어떤 노력-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을 통해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의 전환 또는 치환 혹은 변화가 이루어짐을 뜻한다. 그것이 우리의 '갊'이 뜻하는 바이다. ●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갊', 우리는 이러한 '갊'이 때로는 신경증적이라고 보여 지는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용어이리라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함 갊에 '갈망하다'라는 의미를 덧붙여 넣고자 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써, 가장 취약계층의 노동자로써의 예술가, 혹자는 바로 이러한 가장 취약계층의 노동자로써의 삶을 위해 또 다른 노동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예술가의 삶을 연명-여기서는 연명이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 하겠다-해 나간다. 최근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노동자인 예술가의 삶"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직업 내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경제적 약자로서의 예술가의 삶은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즉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사회와 교류하며 어떻게 경제적으로 자립해 나가야 하는 가에 대한 문제는 각 개인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함께 고민되어야 하는 그 문제로 그 심각성이 대두되었다. 그 어떤 것보다 불투명하다 단호하게 말 할 수도 있을 만큼 그 삶의 윤택함이 보장되지 않는 이 길에 서 있기를, 삶의 거센 풍파에도 비틀거리면서도 이 길을 나아가기를 갈망한다는 의미의 갊. 거창하게 '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갊'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이기에 이렇게 우리를 갈망하게 만드는 것인가.『갊을 품은 삶』展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그토록 갈망하는 작가들을 드러내고 그와 동시에 그들이 속한 세계와의 교차에 의해 발생하는 산물들, 그것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로서의 갊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갊을 품은 삶』 展은 'La Vie'라는 협동조합의 성격을 띠는 문화예술창작 프로젝트 팀이 발원(發源)함을 드러내는 전시이다. La Vie, 우리는 갊을 우리의 삶 내에서 철저하게 탐구하며 예술가의 삶과 예술의 문화적 교환의 장(場)이 되고자 한다. ● La Vie의 첫 기획전『갊을 품은 삶』은 의도된 감상자의 동선이 있으며 전시장 가운데 머무르는 시간, 관람체류 밀도를 높이고자 구성되었다. 그것은 각자의 갊 그리고 그러한 갊이 하나의 전체로 읽혀지기를, 또한 우리의 목소리에, 우리의 삶에, 우리의 갊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소망함에 있다.『갊을 품은 삶』이라는 우리들의 첫 이야기가 그대들의 갊을 품은 삶에 작은 울림이 되기를 갈망한다. ■ La Vie
기록된 정보를 얼마만큼 신뢰하는가요? 신뢰하던「기록된 정보」가 정확함과 진실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가요? 여러분은 소통이라는 정보 교환의 과정에서 상대가 언어로 드러내는 부분 외에 속마음, 그러니까 내포된 뜻이 더 궁금해지는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록된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나치의 선전장관 이었던 괴벨스의 말을 통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 '내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 괴벨스는 위의 말과 같이 '나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한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가?' 라는 선동적 공격으로 반역자로써 궤멸시킨 적이 있어요. 다른 목적이 있는 정보의 일방적인 제시와 또 그것의 비판 없는 수용은 위험하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 역시 일상생활의 정보 교환 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을 겪고 있지 않나요? ● 저의 작업「'Not in your dictionary(네 사전에는 없다)', 'Bongcabulary(봉호단어장)'」시리즈는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됩니다. 드러난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본래의 숨은 의미들을 찾고자 합니다. 그것은 낱말을 지워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낱말이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낱말을 그려 넣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낱말을 지워 그 안에 숨은 뜻 숨은 의미들을 본래 있어야 하는 자리인 표면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 또한 저는 제 스스로가 그리고 우리가 선동되어버린 진실을 볼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사람이 아닌 본래의 의미를 보고 있는 사람의미 없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한자 한자를 지워가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2014. 08. 24.) ■ 임봉호
갊을 품은 삶을 위한 직접적 서술 ● 정사각형 흑백의 격자무늬 'QR코드'. 이것은 조정현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체(要諦)다. QR 코드는 1994개발된 이후 스마트폰의 확산, 무선 인터넷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의해 상용화 되었다. 신속한 대응(Quick Response)이라는 소기의 목적 그대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실시간 매체 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정보의 습득이 용이하게 하며 이 같은 이점으로 광고마케팅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조정현의 작업들에서 QR코드는, QR코드가 내속된 조정현의 작업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 QR코드를 통해「이우환에 관한 서술」은「조정현에 관한 서술」로 연계된다. QR 코드로 연결된 온라인상에서 작가 이우환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기대했던 감상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러할 것이 이우환과는 연령대, 생김새도 너무나도 다른, 더군다나 그 어느 곳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한 청년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청년은 앞서 언급했듯이 바로 작가 조정현 자신이다. 그는 찡그린 표정으로 QR코드가 삽입된 명함을 입에 물고 있다. 명함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으며 명함에 QR코드 역시 조금 더 상세한 정보창과 연계된다. 다시 명함 속 QR코드를 따라 가면 작가 조정현의 블로그가 열리며 그곳엔 조정현의 작업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우환에 관한 서술로부터 출발하여 도착하게 된 조정현의 작업들, 이러한 연계가 주는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하기 위해서 다음 작품들로 넘어가보자. ● 조정현은 이우환의 모노하(物派)를 차용한다. '수 억 원을 호가하는 이우환의 점'에 자신을 표현하는 QR 코드를 위치시키면서「Correspondence(조응)」을「Qrrespondence(QR코드로 응답)」으로,「Dialogue(대화)」를「Qrlorue(빠른대화 혹은 QR 코드를 이용한 대화)」로 바꾸어 놓았다. 그곳에는 작가 소개, 제작연도, 출처만 다를 뿐 이우환의 그것을 검색했을 때와 동일한 포맷의 화면이 열린다. 조정현이 이우환과 그의 작업들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QR코드를 찍는 행위가 '관심'을 필요로 하는데 있다. QR코드는 온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물었지만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상자가 코드를 '찍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며 이는 또 다시 감상자의 찍고자 하는 관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우환의 작품들은 그 미학적 예술적 가치 외에도 그의 작업 특징인 점 하나가 수 억 원을 호가하는 생존하는 작가 가운데서도 고가의 작품으로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감상자의 관심을 끌어오는데 충분한 요건이 된다. 다음으로 이우환의 작업들은 그것에 매겨진 억대의 가격을 차치하고서 그 미학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미학적 예술적 가치의 인정과 작가로서 공인된 사회적 지위는 갊을 품은 삶을 살아가는 작가들이 그토록 원하는 삶의 모습이지 않은가. 조정현의 작업들은 조정현 자신의 갊의 품을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발언인 것이다. ● 얼핏 보기에 QR 연작들에 담겨있는 조정현의 갊을 품은 삶은 '작가의 명성=고가의 작품'의 등식 안에 성립하는 것 같다. 여기서 끝을 맺는다면 조정현은 이우환을 힘입어 자신을 그와 같은 선상에 놓고자 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요체가 QR 코드임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QR코드는 스마트 폰에 최적화 되어 있으며 스마트폰은 기술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사용가능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유비쿼터스 매체이다. 조정현은 QR코드와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작품을 우리에게로 끌어오며 지금-여기, 나의 손 위에 현재화 시킨다. 자발적 검색활동을 요구하는 QR코드와 스마트 폰을 통해 내 손위에 위치하는 작업들, 그는 이우환을 끌어들여 그것을 '자기화' 시킴으로 해서 작업 노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10억 100억 명의 감상자"와 만나고자 한다. 결국 조정현이 QR 코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갊을 품은 삶은 '소통'에 있으며 작가가 요구하는 이러한 소통은 관람자의 참여를 통해 의미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코드화된 전쟁과 마취된 쾌-전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하여 ● 김현엽의「폭력만화-워터파크」는 1941년 진주만 공습에 대한 이야기로 제2차 세계대전을 재현하고 있다. 재현은 작가가 만화라 칭하고 있는 것처럼 크기의 축소를 통한 희화화로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전체를 전쟁터로 활용하면서 세계를 인간 살육의 장으로 만들었지만 이 전쟁의 참상은 1945년 이미 종결된 사건으로써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단지 매스컴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될 뿐이다. 오히려 지금 우리시대에서 전쟁은 코드화되어 문화적 재화로서 상품화되었고 그러한 코드화의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그 공포의 의미는 퇴색되어졌다.「폭력만화-워터파크」는 실제 36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진주만 공습의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학살의 공모자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군인들의 모습을 귀엽고 친근한 캐릭터로 변모시킴으로서 전쟁이 코드화 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전쟁의 코드화는 전쟁을 우리에게 조금 더 친근한 모습으로 조금 더 밀접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이것은 꽤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진데 군대를 뜻하는 밀리터리(military)와 오타쿠(ぉたく)의 한국적 변용, 오덕후의 합성어인 '밀리터리 덕후'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군대와 관련된 총기나 전쟁 등에 몰입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층을 형성시켰다. ● 코드화된 전쟁의 모습은 온라인 전쟁게임과 FPS(First-person-shooter)게임에서 또한 발견된다. 전쟁과 살인의 장면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는 화려한 그래픽과 끊임없이 재생되는 게임 속 캐릭터는 전쟁과 살육의 의미를 더욱 더 무감각하게 만들며 사용자들이 직접적으로 게임을 수행하는 가운데 쾌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전쟁이 코드화되는 가운데 인간 살육이라는 전쟁의 부당함은 승리를 위한 정당함으로 인간의 부적절한 죽음은 쾌를 유발하는 요소로 전환된 것이다. 코드화를 통해 조금 더 친근한 것으로 조금 더 밀접하게 다가온 전쟁은 실제의 그것에 무감각한 즉, 마치 마취 된 듯 한 쾌를 경험하게 한다. ● 전쟁은 분명히 동시대적인 것이다. 2002년의 아프간 전쟁과 2003년 이라크전쟁을 비롯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은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코드화된 전쟁은 마취된 쾌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실제 전쟁 역시 코드화 된 것으로써 동시대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이지 않은, 실제이지만 실제적이지 않은 것으로 경험하게 한다. 우리가「폭력만화-워터파크」를 마주대할 때 진주만 공습의 참상-그것이 간접적이라 할지라도-을 실제적 공포로 경험하지 않고 오히려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을 축소 모형으로 배치시켜 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폭력만화-워터파크」는 진주만 공습을 코드화를 통해 의미를 달리하는 전쟁과 그 친숙함으로 인해 실제 전쟁 역시 마취된 쾌로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 대한 경계이다. ■ 박은지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 그리고 갊을 품은 삶 Sortie des Usines Lumière à Lyon et le Travail Devient Vie ●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는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최초의 영화다. 1895년 12월 28일 상영된 이 영화는 리옹 소재의 공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나오는 노동자들을 촬영했다. 특정 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그리고 어떠한 연출이나 카메라의 이동 없이 촬영했기 때문에 현실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는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를 끌어들이고자 한다. ● 촬영된 사람들은 공장의 노동자이며 대부분이 당시의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이기도 했고 이들의 상황과 우리의 모습이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를 우리를 삽입함으로써 재편집하고자 한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삶이 반영된 새로운 삶을 그려내기 위해서 말이다. ■ La Vie
새김된, 새김되어질 삶의 우화(寓話) ● 뒤집어진 고래의 배위에서 분주하게 자신들의 성을 만들어 가는 새우들이 주를 이루는 신원준의 작업들은 한편의 우화(寓話)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우화는 인간의 행위와 삶의 이야기를 동식물의 의인화를 통해 드러낸다. 신원준의 작업들을 우화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들이 담지하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지구상에서 현존하는 포유류 가운데 가장 큰 몸집을 소유한 흰수염 고래와 그 주 먹이가 되는 크릴새우, 작가는 그것 각각에서 자신에게 열등감을 유발시키는 사회기득권층의 권력과 그에 종속되고 따라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비기득권층인 자신과의 유사성을 발견해 냈다. ● 작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인 '열등감'에서 드러나듯이 신원준 작업의 출발점은 작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있으며 이 감정은 몸집이 큰 고래와 먹이인 작은 새우의 관계에서처럼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의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즉, 작업의 출발점이 되는 감정은 '현실'이라 불리우는, 작가 자신이 점유하고 있으며 또한 위치 지어진 삶의 장(場)에 대한 성찰로부터 온다. 열등한 위치에 놓여 진 존재,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이름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승인한 이름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반추(反芻)의 과정, 전복시킨 고래 위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형성해 나가는 작은 새우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열등한 존재라는 부정성의 의미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것은 스스로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주체적 삶의 실천이며 신원준의 우화가 제약된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기 때문에 공격성을 품고 있는 조소와 냉소로 읽혀지는 것인 아닌 미소(微笑)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 작가는 또한 그러한 형상 위에 자신이 살아낸 삶을 새겨 넣는다. 그것은 작업의 필수적 요소의 반추의 과정이 과거라 불리우는 것을 지금-여기에 끌어오는 현재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살아낸 삶을 무채색 바탕위에 새기며 그 가운데 여전히 현재의 삶을 추동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삶을 생동하는 유채색 위에 새겨 넣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서열화 된 사회계층(social stratification)에 따라 사회적 삶의 기회가 차별화되어 있다.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비추어지는 작가 개인이 살아낸 삶, 거기에서 비롯한 감정이 우리에게 우리의 이야기로 읽혀진다면 우리가 동일 혹은 유사한 계층으로서 삶을 함께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 꼭 이기고 싶다는 열등감, 처음으로 독립이란 것을 하게 되었던 날의 쓸쓸함, 어렸을 적 무서운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날의 공포, 우리들이 한심하게 느껴지던 날의 반성, 어태껏 받았던 편지들을 읽어보며 희망으로 가득 찼던 날의 행복...이러한 감정과 생각들은 누군가는 했을 것 같은, 또는 앞으로 하게 될지도 모르는...우리들의 이야기(신원준 작업 노트 中 ) ● 지금까지 작업에서 제약을 넘어서고자 하는 실천이 군집화를 통해 나타났다면「열등감 끌어안기」,「열등감 인정하기」에서는 조금 더 작아진 고래와 조금 더 커진 새우들의 대응관계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월한 대상을 마주함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인정함으로부터 그것을 넘어설 수 있기를, 작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함께 삶을 살아내는 우리 스스로가 제약된 자신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냄을 촉망한다. 갊을 품을 삶을 그리고 갈망하는 삶을 살아내기를 말이다. 그렇게 신원준의 작업은 우리가 살아낸 삶 그리고 살아가는 삶을 새겨낸다. ■ 박은지
Vol.20140911c | 갊을 품은 삶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