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모 PROJECT SPACE MO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6-25번지 www.facebook.com/projectspace.mo projectspacemo.blogspot.com
예술은 "작품"으로 남겨지는가, "행위"로 보존되는가? ● 우리는 대개 시각예술작품에 대하여 말 할 때, '그 작품'으로 지칭되는 '물질적 조건에서 무엇이 있음'을 서로 알리고 있다. 최소한 이 '무엇으로 있음'으로써 작품은 한 번도 의심받지 않은 채 시각예술로 통칭되는 전반에 그 지위를 굳건히 해 왔다. 시각예술은 당연하게도 시각에 잡혀야만 한다. 시각에 들어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제 조건에 따라 '그렇게 있어야만 하는 상태'에 작품은 있다. 그런데 이 때 우리는 작품(作品)이라고 부르면서, 그 무엇의 있음의 마땅하게 있어야 할 방식에 대해서도 의미적으로 한정짓고 있다. 작품이란 분별되고 구별되는 어떤 상태로서 만들어 가는 전 과정과 그 결과를 作品이라는 용어 안에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시각예술작품은 그러니 "예술"만이 제한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너무나 구체적이고 규정적으로 어떻게 무엇이 있어야만 하는지를 그 용어로서 이미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물음은, 사실, 저마다 해석과 이해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다. 당연히 해석과 이해의 지평이 그 각각의 다름을 지도하거나 거기에로 이르는 길을 내어 준다. "예술은 무엇의 있음이 잘 보존되는 자리"로 이해하고자할 때 우리는 "예술"을 인간이 주도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기술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예술론과 미학의 사유 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런 예술을 예술로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술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우리가 예술가로 부른다면, 무엇이 있음을 잘 보존하게 하는 사람인 셈이다. 그는(예술가)는 그래서 낯섦과 익숙함의 이면, 사라짐과 없음, 안 보임과 절대 볼 수 없음을 모두 자신 안으로 가져 와 보존한다. 그 때, 보존하는 기술은 전혀 중요한 문제점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무엇의 있음을 전제하여 그 있음을 기억-기록의 방식으로 가져가는지, 아니면 무엇의 있음이 마치 없음과 같아서 상상이라는 지성 방식 안에서 보존된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방식인지 정도가 기술(技術)적 요청을 해 올 뿐이다. 이제 이 사람(예술가)은 기술(記述)하기 위한 자신의 기술(技術)을 선택하지 그 것을 연마하지 않는다. 예술은 그래서 기술(技術-Technology)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예술은 그런 자유로움이 보존되고 있는 예술가(그 사람)의 행위에서만 드러난다.
정두이는 자신의 개인전을 '말'과 '언어'로서만 알려주었다. '그 말'과 '그 언어(들)' 안에는 당연히 이미지가 담겨 있었고, 개인전이라는 형식 때문에, 새로운 소설집이나 영화 한 편으로 제작될 것이라는 방향에서 우리는 이야길 하지 않았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그려지는 이미지를 벗어나 대화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신을 가지게 된 점은 정두이의 '그 말'과 '그 언어(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만듦, 즉 제작의 방식으로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한 두 사람을 초대하여, 여느 카페의 좁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채 '그 말과 언어'를 들려주는 것으로 개인전을 치루면 좋지 않겠나 싶었다. 그리고 그걸 제안이라고 작가에게 한 번 생각해 보시라 권하기조차 했었다. ● 정두이가 준비한, 이번 전시에서 가져와 풀어 놓는 짐은 예술을 심층적이고 반성적으로 되물어보게 만든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시각예술작품으로 작가가 관람객에게 보여 줄 "그 작품"이 바로 '그 말'과 '그 언어(들)'를 문학적 형식(掌篇小說)으로 드러낸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개인전 장소에서 관람객이 만나게 될 전경을 설명해 주면서, 가능한 오감이 동원되어야 작가가 펼쳐 드러내 주는 장(場)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두 번째 이유는 작가에게도 반성적 경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도 아직 체험하지 못한 사태를 상상 안에서만 보존한 채 그러하기 때문이다. ● 장편(掌篇)의 글쓰기는 완결된 형식이다. 그것은 글의 양이 적어서 구별되는 장르가 아니다. 아니, 掌篇의 완결성은 오히려 말 건넴을 다른 형식 보다 잘 보존한다. 장편(掌篇) 형식에서 이야기 구조는 인과성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사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그 말 안에 인과관계가 중요하지 않다. 인과관계란 설명을 앞뒤 맞추어 상대방의 합리(合理)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이다. 우리는 삶 안에서 그 합리를 쫒아 다니지 않는다. 삶은 이치로 이해되기에 너무 넓고 깊다. 그리고 보다 풍요롭다. 더구나 '말'은 상대방에게 건네짐으로 온전해 진다. 이미 상대를 두고서 보존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은 삶의 가장 '맑은 형식'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지경이다. 모든 '말'은 제 역할을 하기 위하여 건네지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로부터 보존될 수 있는 최소한의 상상의 힘을 빌려 가상(假想)을 불러낸다. 이 가상은 구체성을 지닌다. 가상이면서도 정확하다.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짜'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그 말'이 '그 언어'로 정리되어 안착된다면, 이제 '그 언어' 안에서 생성되고 있는 이미지들은 상대 안으로 들어가 정착하게 된다. 우리는 '그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시 말한다. 정두이의 작품은 이 큰 흐름을, 말이 이치를 다루지 않으며, 삶이 풍요로운 장광을 드러내고, 때로 깊이를 더하는 방식으로 보존된 채 우리에게 건네주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특징은 장점을 하나 더 갖추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말하는 사람(그 사람으로서 예술가)의 상상이라는 지성의 힘을 말 건넴을 받고 있는 모두에게 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오선' 에서 우리는 색으로 덮여진 언어들을 만난다. 이 작품-예술행위의 결과에서 하얀색, 녹색, 초록색, 시멘트 색, 수영장과 수영장의 물색, 초록색이 사라지는 그 찰나의 색 등등이 무수하게 나오면서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놀라운 이 색의 덮쳐 옴이, 이 색이 덮어버린 언어(들)를 통해 우리는 감각계를 열고 받아들이게 되는 '온갖 것'들을 지성의 능력으로 종합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이미지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색은 빛과 함께 정두이 작품을 형성하게 만드는, 산출의 근원으로 읽힌다. '드리프트 라인', '고래', '서른 마리의 개'에서는 확연히 이 특징들이 드러난다. '노란 드라이버' 에서는 상대적으로 색과 빛이 절제되어 있지만, 새벽-사라짐과 없음-찰나에 잡힘으로 의식이 연장되는 가운데 노란 드라이버가 등장하는 시퀀스로 이 상황을 정리한다. 정두이에게 '그 언어(들)'로 잡아 채버린 공간에서 빛과 색으로 만물의 그렇게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말하는 사람(예술가)이 규정해 버린 공간에 '그렇게 있음'으로 채워지는 모든 것은, 사물 뿐 아니라 공기와 분위기, 의식의 흐름과 분별이 없어짐 등이 작품 속에서 "그렇게 있게" 해주는 빛과 색에 의지한 채 분명하게 있게 된다. 그 '말'은 '어떻게 있음'의 현재와 시간을 넘어서는 사태를 온전하게 잡아 버리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말'이 '그 언어'로 넘겨지면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예술가는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표현"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던져버리는 행위로서 "표현"을 선택할 것인지 신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문학이 아니라 결국 시각예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선택지에서 예술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를 개인전의 장과 함께, 그 만큼 깊이 고민을 했어야만 했다. 다섯 편의 '말-글'은 후자의 "표현"을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언어'들은 체험적 표현들을 보여준다. 우선 문장에 담긴 시간들, 즉 말함 안에 담긴 시간의 흐름이 연속성을 지닌다. 시간이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앞과 뒤를 연결하며 흐른다. 왜 이 방식을 선택했을까? 왜 표현의 이중성을 가져 오려 했을까? 전자의 "표현"은 딜타이가 주장했던 체험을 전제하고 이를 통해 이해된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후자의 "표현"은 내면에 각인되어 버린 것을 밖으로 뱉어내듯 던져버리는 독일 표현주의자들의 드러냄 방식이다. 전자는 연속의 방식으로 시간을 수용하지만, 후자는 의미만이 내재된 카이로스적 시간만을 이해할 뿐이다. 정두이의 말함 그 안에서, 예술가의 의식을 통해 드러난 "의미로 채워진 세계"를 우리는 만난다. 그런데 시간은 연속되고 있다.
정두이는 개인전의 장(場)을 의식한다. 계획을 들어보면, 이 글을 쓸 때 까지 개인전은 온전히 계획안에서 잘-보존되어 있는데, 관람객은 자신의 모든 감각계를 이용해야 전시를 봤다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예술 자체를 반성적으로 그리고 심층적으로 재고해야 할 두 번째 문제제기는 성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場을 만드는 행위'로 논점을 좁혀 볼 필요가 생긴다. 최종적 판단을 통해 규정됨을 우리는 심급(審級)이라 한다. 대개 예술과 예술작품은 이 심급의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미술은 물리적 조건과 그에 마땅한 물적 조건에서 사물처럼 다루어졌다. 작가의 사유와 눈, 의식은 예술이라는 이 심급 수준에서 도외시 되었다. 더구나 사물로서 이해된 예술과 예술작품은 당연히 정도의 차이를 구분하게 하는 기술적 우위를 요구한다. 그래서 매우 뛰어난, 높은 수준이라는 경험과 인식의 가수요가 생겨난다. 사실 뛰어나고 높은 수준을 우리가 어떻게 정량화하고 정성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정두이 개인전은 엉뚱하게 이 오랜 심급의 수준을 반성적으로 물어보게 만들고 있다. 정두이의 '말-글'과 '그 말'의 '그 언어'가 어떤 대단하고 유명한 문학가의 그것들과 어떻게 수준으로 차별되고 등급으로 구별될 수 있는가? 예술은 정두이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새로운 심급으로 정리 제시될 수 있는지 물어본다. 말하는 사람의 '말함'의 그 행위가 바로 말 속에 간직하게 된 '무엇의 있음'을 보존한다면, 말하는바 그것이 이미 예술이다. 정두이는 이 말함의 연속되는 유형들을 "보는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들을 수 있는 것"과 "관여할 수 있는 것"으로 확장 가능성까지 그의 작업은 은근한 전개를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 이 전개는 작가에 의해 완전하게 펼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場"으로 이해하고 있는 정두이의 공간 해석은 개인전의 장소를 개방시키는 가능성으로 철저하게 가져갈 수 없을지라도(보지 않은 것을 염두에만 두고 말하는 한계가 있지만), 이미 그 계획안에 담겨진 개방성은 작업의 전개를 상상하게 만들고 있다. ■ 이섭
Vol.20140617e | 정두이展 / JEONGDOOEE / 鄭頭二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