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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52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삼청로 87 도올빌딩 2층 Tel. +83.2.739.1405~6 www.gallerydoll.com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 한슬의 작업은 매혹을 탐구한다. 이 탐구는 소위 명품으로 알려진 유명한 패션 상품들을 직접 묘사하는 것에서 패션잡지의 표지를 확대 복사하듯 작업하는 방식을 거쳐 이제 대도시의 거대한 광고판에서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여성 모델들을 그리는 행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그녀가 탐구하는 매혹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소비를 격발시키는 힘 또는 계기(moment)이다. ● 이러한 작품의 전개과정에서 대상을 보는 작가의 태도에 어떤 간극 혹은 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명품을 직접 오브제로 선택할 때, 그것이 직접적인 대상을 스케치한 것이든 사진으로 포착된 대상을 그리든 작가는 자신을 물신에 매혹된 물신주의자로 드러냈다. 작가의 권위는 물신에게 양도된다. 화면의 중심은 신비에 휩싸인 매력을 발하는 명품이 차지한다. 정태춘의 노래 「LA 스케치」는 그 느낌을 정확히 잡아낸다. "은밀한 비버리힐스 오르는 길목/ 티끌, 먼지 하나 없는 로데오 거리/ 투명한 쇼윈도 안엔/ 자본보다도 권위적인/ 아, 첨단의 패션." 그림은 바로 이 "첨단의 패션" 앞에서 탄성을 지르는 물신 숭배자의 자화상이다.
오브제가 명품 자체에서 이 명품을 다루는 패션잡지의 표지가 되었을 때, 작가는 마치 스콜라 철학자처럼 이미 주어진 대답을 정당화하는 이미지의 논리를 찾는다. 잡지의 표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파사드(Façade)처럼 현란한 소비세계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그 입구에는 문을 들어서면 펼쳐질 세계를 선전하는 카피들이 마치 짤막한 성경구절처럼 적혀있고 그 세계를 수호하는 성인들의 형상이 부조되어 있다. "루이비통, 구찌, 프라다..." 물론 가장 중요한 패션잡지의 표지 이미지는 바로 이 성인들을 받들어 신의 경지에 이른 구원의 표상, 즉 표지 모델이다. 한슬의 '보그(VOGUE) 연작'은 작가가 명품의 세계의 한계지점, 문지방이라고 할 만한 공간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켰음을 보여준다. 물론 작가는 여전히 자신을 명품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주체로 제시한다. 그녀는 한계선상에 서있으면서도 신화의 세계 외부에 등 돌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림의 오브제는 명품 그 자체에서 명품들이 구성하는 신화의 세계로 확대된다. ●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 명품들의 신화적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둔 장소에 세운다. 신화적인 소비세계를 선전하는 구호들은 거의 지워졌다. 반면 신화적 세계 외부의 공간이 드러난다. 신화의 세계는 그만큼 상대화된다. 이 공간은 정태춘의 노랫말, "티끌, 먼지 하나 없는 로데오 거리"처럼 거리 전체가 외부 세계를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성소화된 장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장소도 있다. 특히 자본주의 하위국가들의 도시를 대낮에 포착한 그림들이 그렇다. 도시의 창공을 어지럽히는 전선들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심지어 광고 속 여신의 이미지를 더럽히기도 한다. 한슬의 그림은 풍경화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 풍경화의 중심에는 마네킹 모델의 클로즈업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한 광고판이 있다. 소비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시선을 통제하는 이 광고탑들은 마치 먼 옛날 로마제국의 도시 곳곳에 세워진 신상들을 연상시킨다. 이 풍경화들 속에 작가는 어떻게 위치하고 있을까?
어떤 예술의 경우이든, 또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작가는 작품 속에 자신을 반성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 자신을 대상화하여 드러냄으로써 관람자와 소통한다. 이 때 대상화 된 작가는 작품의 오브제일 수도 메시지일 수도 작품의 내용이 표현되는 형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한슬의 그림을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자신을 자본주의 지구제국 혹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소비주체, 곧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근거하는 주체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소비주체란 관객이론이 말하는, 소비과정을 통해 소비체제와 협상하는 그런 주체가 아니다. 즉 귀에 발린 "프로슈머"라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말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철저히 대상화된 주체, 소비산업체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에 불과한 주체, 사실상 주체라고 말할 수 없는 주체이다. 그/녀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도록 구성된 존재로서 실질적으로 대상으로 전락한 주체이다. 작가가 이처럼 자신을 대상으로 제시할 때 그녀는 더 이상 관람자에게 작가의 권위를 가지고 말 건네는 대타자가 아니다. 그녀는 어떤 깊이도 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의 그림이 관람자를 당황하게 만든다면 난해해서가 아니라 이 깊이 없음 때문이다. 한슬은 소비사회에 넘쳐나는 너무나 익숙한 이미지를 그린다. 우리가 당황스러운 것은 작가가 이 빤한 이미지들을 그림을 통해, 그것도 거의 사진복제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시 제시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한슬의 그림을 바로 이 두 개의 계기의 상호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계기란 앞에서 말한 작가의 위치이동과 흔한 모델 이미지의 복제라는 작업의 의미이다. 성급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의 위치이동은 자신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물신적 이미지를 집요하게 회화적으로 복제하는 모순적 작업의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작업은 표면을 표면으로 혹은 외양을 외양으로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우리시대를 이미지의 시대로 만든 것은 기계복제술이라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 패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민중들의 삶에서 의복에서 각종 생활 도구들은 절대적으로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화려한 복식과 세련된 가공을 거친 기물들은 이러한 물건을 생산하는 장인을 고용할 수 있는 귀족들의 것이었다. 귀족들은 장식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그들의 신분적 우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장식적인 요소가 귀족의 독점에서 해방되기 시작한 것은 상업 부르주아의 등장에 의해 가능해졌다. 장인을 고용할 수 있는 경제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귀족들의 삶을 좀 더 고매한 것으로 인정하고 이를 모방하려 하였다. 봉건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 주역들의 내면에 옛 시대의 주역들인 귀족들에 대한 선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근대의 치명적인 비밀이기도 하다. 대량생산체제는 이 선망의 실현을 중간계층에게, 나아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는 이를 광범위한 민중들에게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 오늘날 대개의 명품들은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가혹한 노동착취 속에서 생산된다. 이 명품들의 짝퉁 역시 마찬가지이며 진품과 짝퉁과의 차이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속아서 짝퉁을 산 경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진품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명품이 주는 광휘를 두르기 위해 싼 값에 짝퉁을 산 것이라면 진품과 짝퉁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차이는 실제 상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내면에서 진정한 명품의 권위를 보증하는 것은 그 권위에 합당하게 지불되어야 하는 가격이다. 귀족 혹은 부르주아는 부담 없이 지불할 수 있는 액수를 마련하기 위해 "88만원 세대"들은 소위 '명품계'를 들거나 카드빚을 지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범죄를 저지른다. 이 명품의 매혹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그림을 보자. 그림들이 중심에 두는 오브제는 한결같다. 대도시의 성상들, 대형광고판의 모델들이다. 우리의 시선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마네킹 모델들의 눈에 꽂힌다. 그 눈빛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며 사로잡힌 자의 시선의 애무를 요구한다. 모델들의 얼굴 표정에 나타나는 당당함 혹은 자족성은 그들이 시선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과시한다. 그들의 표정에는 부족함도 죄의식도 없으며 당연히 상대적 빈곤도 갈등도 없다. 그들이 자신을 정숙한 요조숙녀로 연출하든 아니면 거리의 창녀로 연출하든, 지적이든 백치이든, 성숙하든 앳되든 그들은 실현된 꿈, 유토피아의 삶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이미 그것을 가진 자들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들이 암시하는 유토피아에는 어떤 일관된 질서도 없다. 그들을 텅 빈 기표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선망의 시선들이 소망하는 온갖 잡다한 꿈들을 그것이 실현되는 상상과 매개할 뿐이기 때문이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들, 핸드백이나 보석류의 액세서리, 구두, 블라우스나 원피스 그리고 이너웨어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불리는 브래지어 혹은 난닝구나 빤쓰를 갖게 된다면 실현될 꿈들. 가로에 줄지어 늘어선 네 개의 광고판을 그린 그림은 바로 이런 세계를 보여준다. 늘어선 광고판의 모델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눈빛도 표정도 그들의 걸치고 있는 패션도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분위기까지도 말이다. 이 네 개의 광고판들을 연결하는 것은 조명이다. 조명은 어두운 밤거리에서 광고판 속의 세계를 빛의 세계로 격상시킨다. 조명은 광고판 속의 세계를 유일한 세계로 규정하며, 거리는 이 광고판에서 반사된 빛에 의존하여 겨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그림 대부분이 밤풍경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가 어둠에 휩싸여 있을 때 스타일의 세계는 가장 확실한 현실성을 얻는다. 스타일의 세계는 내적인 존재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 세계의 찬란한 권위는 기실 오로지 외부 세계, 일상적 현실의 어둠, 삶과 세계에 대한 전망을 확보할 수 없는 암울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바라보는 모델들의 그 고혹적인 눈빛은 우리의 욕망을 잡다한 대상들로 분산시키며 바로 이 쓰레기 같은 대상들을 소유하는 순간까지만 유지시킨다. 욕망의 주체는 소비의 주체로 전락하여 어떤 일관성도 없는 잡다한 대상들을 소유하려는 열정 속에서 삶을 소진한다. 우리는 즐긴다. 그러나 사로잡혀 즐긴다. 우리가 죽도록 즐기는 동안 진정으로 즐기는 자는 자본주의 소비체제이다. 이미지 산업의 대상으로 전락한 존재는 즐겨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늘 실직의 두려움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든, 아니면 이미 실직자로서 그런 상황에서도 배제되어 불모의 자유를 누리고 있든 말이다. ● 우리가 광고판의 눈빛에 눈을 맞추는 순간, 그들이 유혹하여 자비롭게 허락하는 상상적 동일시에 포섭되는 순간은 동시에 무의식적인 상징적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광고탑의 모델들을 가장 이상적인 척도로 제시하는 세계를 우리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선택한다. 모든 존재는 거세되어 있으나 오로지 단 한 사람은 거세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모든 사람은 노예지만 단 한사람만이 그들 모두를 부리는 주인인 세계, 20 대 80의 세계를 넘어 1 대 99에 도달하는 세계, 모든 사람이 그 단 하나를 꿈꾸지만, 바로 그 꿈 때문에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되는 세계, 근대 부르주아를 넘어 봉건 귀족으로, 다시 고대의 제왕을 넘어 신화 속의 신성한 존재가 되는 꿈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환상의 제단에 헌납하는 광신자들의 세계를 말이다. 모든 인간이 이 단 하나를 꿈꾸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존재, 어떤 개별성도 없이 대체 가능한 대량생산된 부품들로 전락하는 세계를 말이다. 한슬의 그림은 거리풍경을 그리고 있음에도 광고판의 모델들의 선명한 이미지와는 달리 거리의 실제 인간들은 거의 삭제되어 있거나 어둠 속에서 겨우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를 통해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지워지거나 뭉개지거나 그들이 소유한 물건에 의해 암시되는 인간들은 이미지가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구성된 인간 실존의 실상이다.
화가는 바로 이러한 실존양식 속에서 세계를 보며 자신을 세계가 드러나는 하나의 매개로 설정한다. 이 세계는 표면의 세계이다. 광고판에 포착된 세계의 표면, 그 표면의 파편들은 자신들이 감싸고 있던 실체로부터 분리되어 자유롭게 부유한다. 그렇다면 광고 이미지들은 파편화된 세계, 실재가 사라진 허무주의 세계를 노래하는가?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모델들의 매끄러운 표면 이미지는 항상 그 배후 세계를 암시한다. 이미지는 세속적이지 않다. 이미지는 가장 종교적인 것이다. 텔레비전의 패션 관련 프로그램들은 광고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 배후 세계에 관한 상상력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 기획이다. 그들도 인간이며 일상이 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일상은 그들의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의 일상과 다르다. 하지만 성공을 향한 열망, 철저한 자기관리, 꿈을 위한 투자와 자유로운 선택, 나아가 사회봉사나 자선활동까지 모든 것이 광고 이미지의 표면 너머에 어떤 실체가 존재하며 그들의 삶은 바로 이 실체를 향한 가장 이상적인 경로로 포장된다. 그들의 신적인 이미지는 그들의 삶을 인정한 신의 은총으로 제시된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지만 우리와 달리 선택된 자들이다. 선망은 죄의식을 요구하며 죄의식은 그것에서 놓여나기 위한 증거를 요구한다. 우리가 럭셔리 명품을 소유했을 때 얻는 만족감과 성취감, 자존감과 거의 종교적인 위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한슬의 마스킹 테이프 작업은 바로 이 이미지의 배후를 들춰보는 과정일 것이다. 오늘 "자본보다도 권위적인" 패션은 맥락에서 분리된 온간 잡다한 파편들을 뒤섞어 하나의 스크린을 구성한다. 일단 스크린이 구성되면 자동적으로 배후가 구성된다. 저 너머, 표면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삶, 종교적인 차원의 이상. 그림은 텅 빈 캔버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텅 빈 캔버스에는 배후도 저 너머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영도이며, 인간이 왜 평등한 존재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작가는 수많은 색의 파편들을 사용하며 광고이미지를 복제한다. 그렇게 구성된 이미지의 세계는 세련되어 보이지만 적요하다. 시간이 정지되어 박제된 세계, 주체도 없으며 따라서 사건도 없고, 어떤 얼룩도 제거된 전체주의의 세계가 드러난다. 작가는 자신을 사로잡은 세계에서 공포의 형상을 보며 흠칫 물러선다. ■ 정혁현
Vol.20140528d | 한슬展 / HANSL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