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저편 Now and Beyond

김윤수_노충현 2인展   2014_0522 ▶ 2014_062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522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0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누크갤러리 NOO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 5나길 86(삼청동 35-192번지) Tel. +82.2.732.7241 www.facebook.com/nookgallery

김윤수와 노충현의 전시를 기획하고 전시방향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두 작가는 서로 상대의 작업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기로 하였다. 무척이나 생각이 많은 그들은 서로의 작업에 대해 깊은 고민과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노충현과 김윤수는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해 왔고, ‘저편'을 생각한다.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작가가 한 공간에서 만나 풍경이 된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 여기에서 바라보는 저 편은 어디인가? 관람자에게 조용히 사유하는 시간을 준다. ■ 조정란

김윤수_바람의 표면 Surface of Winds_캔버스에 울트라마린 블루 파스텔_24.2×33.5cm_2014

김윤수의 작품을 본 것은 ● 나는 그 동안 ‘지금 여기’의 문제들에 대하여 고민해왔다. 「살풍경」「자리」「실밀실」연작들은 그러한 고민들을 담은 그림이라 생각한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사진을 사용하게 되었고 사진은 사실의 세계를 어떻게 반영할 것 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와 반면에 김윤수의 작업들은 ‘저편’을 다루고 있다. 사실 한국현대미술에서 미술은 ‘지금 여기’라는 현장을 주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그만큼 이곳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긴급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저편’을 다루는 작업들은 주변화 되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 여기’를 말하는 상대적 방법으로서의 ‘저편’은 아직 충분히 탐구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윤수_바람의 표면 Surface of Winds_Accumulating PVC_설치전경_2014

김윤수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바람의 사원』(2005) 개인전이었다. 우연히 전시작품을 이미지로 본 것이었다. 흰 공간의 여백이 돋보인 미니멀한 설치작품이었다. 바닥에 놓인 작품들은 비닐을 쌓은 것이며 무엇보다 ‘발’ 로부터 시작된 것에 관심이 갔다. 그녀의 말처럼 "수직구조인 사람에게 발은 가장 하위에 있으며 죽음의 상태일 때 비로소 머리와 평등하게 놓여지게 된다." 잠들거나 죽게 될 때 발과 머리는 수평으로 놓이는 것이다. 발은 그제서야 평온을 얻는다. 발이 아니라면 어디를 수월히 갈 수 있겠는가? 사람의 일생 동안 발은 우리를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들에는 ‘발‘이 가고자 했던 풍경들이 담담히 펼쳐져 있다. 그래서 발이 섬이 되고 뱀이 되고 사구의 형태를 띠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발의 흥미로운 전이인 것이다. ● 그렇다면 김윤수의 작업에서 ‘저편’ 은 어디인가? 왜 그녀는 오랫동안 ‘저편’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까? 김윤수의 작업에는 바람, 하늘, 바다등과 같은 자연의 풍경들이 있다. 이 말들은 깊이 넓이 높이를 드러내며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듯이 김윤수의 ‘저편’은 삶과의 대칭지점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저편’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자연이란 의식의 세계가 반영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현실 속의 좌표를 지니지 않은 시공간이라 여겨진다. 깊은 관념의 세계다.

김윤수_바람의 표면 Surface of Winds_Accumulating PVC, 나무, 유리_109.5×24×26cm_2014

그녀는 회화 드로잉 설치 등의 작업방식으로 생각의 윤곽을 드러낸다. 작품들마다 조금은 다른 성격을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그녀의 작업은 미니멀한 편이다. 회화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예를 들면 「가장 푸른 곳」(2010)이란 그림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연상시키는 낭만주의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표류」와 함께 의외의 표정을 짓는다. 미니멀한 형식의 『바람의 사원』(2005) 「나는 구름 짙은 산을 걸어간다」(2010~2011)은 회화에 비하여 금욕적으로 보인다. 정중동(靜中動)의 모양새다. 그 풍경들이 너무 맑고 고요해서 오히려 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위태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비닐을 쌓고 골판지를 두르는 상당한 노동의 반복행위를 수반하면서 말을 지우고 감정을 덜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 남아있는 풍경은 무심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그녀의 예술적 행위는 삶에 대한 수행자로의 태도로 비춰지면서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자기완성을 해나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 사실 그녀의 작업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저편’을 향한 시선만 있을 뿐 그 구체적 이유는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짐작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허허한 현실의 삶으로부터 저편으로의 갈망과 동경을 꿈꾸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저편’이란 관념의 세계는 결국 사실의 세계를 긍정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으로서 제시되는 시공간이 아니었을까? 사루비아 다방에서 열린 그녀의 개인전 『Ultramarine-바다저편』(2008)전시에서 지하의 거친 벽은 저편을 향한 작가의 마음을 짓누르는 현실의 세계로서 기능한 것처럼 보였고 그녀의 작업들은 그 무게와 질감을 견디고 있는 작가의 분신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 노충현

노충현_폭설 heavy snow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4

노충현과의 조우 ● 세상이 풍경이 되는 시간이 있다. 장마에 물이 들어설 때, 흰 눈이 공기를 메울 때, 구름이 땅으로 가라앉을 때, 하늘이 사막의 모래로 뒤덮일 때, 새벽_세상이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 때... 세상은 한없이 고요하고 적막해진다. 세상의 소리들은 물과 눈과 사막의 모래와 푸른 적막으로 메워진 틈을 뚫고 지나지 못하며, 통로를 잃고 시 같은 풍경이 된다. 그렇게 풍경은 나에게 무심함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세상이 무심함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있다. 지난 계절 장마가 찾아들 즈음, ‘살풍경’이라 이름 붙인 노충현의 전시에서 나는, 피부로 스며드는, 소리를 닫고 풍경이 된 세상을 만났다.

노충현_여름의 파라솔 parasols in summer_캔버스에 유채_53×53cm_2013

그의 그림들은 저지대에서 펼쳐지는 풍경과 닮아있다. 물과 밤과 흰 눈은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며 ‘지금 여기’의 모습을 새롭게 하기도 한다. 그곳에서는 홍수가 덮쳐 차오른 물의 수면위로 물풀처럼 흐르는 나무들과 처마 끝에 닿을 듯 찰랑이는 물결의 바람을 만질 수 있고, 짙게 내린 밤의 장막 너머로 수 십 광년의 거리를 가로질러 눈에 닿는 별을 그려 볼 수도 있다. 소리를 삼키며 하얗게 내려앉은 눈들은 깊이를 지우고 살아간다는 것의 흔적을 덮으며 세상에게 여백의 자리를 내어준다. 그의 ‘살풍경’들은 묵묵히 계절과 시간을 겪어내는 ‘지금 여기’를 직면하게 하면서 그 반대편 극점에 있는 고요함을 돌아보게 한다. 그의 선선한 감각의 온도가 느껴졌다.

노충현_강가에서 at the river_캔버스에 유채_65×53cm_2014

서울에 살며 때때로 찾게 되는 한강에서, 혹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 땅(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나는 세상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다시 소멸하는 것들 위로 흐르는, 떠있는 섬의 풍경이 된다. 이번 전시를 앞두고 두 번째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그는 섬 주변의 사람들에 눈길이 간다고 했다. 얼마 전 섬에 다녀온 듯 찍어온 사진 몇 장을 내어놓았다. 섬을 찾아 온 사람들은 길이 끝나는 곳 그리고 마르지 않는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가늠할 수 없는 거리의 저편을 응시하거나 서성거린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그곳에 와있는지,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다. 그들 또한 저 너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저편의 풍경들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희미한 먼 곳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돌이키게 한다. 어쩌면 그들은(우리는) 세상의 끝에서, 잊혀지고 사라져버린 것들(잃어버린 것들)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그곳(경계)을 떠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까만 밤, 문득 잠에서 깨니 왠지 모르게 그의 레몬옐로우 빛 ‘유수지의 밤’이 잔상처럼 아른거린다. 마치 누군가가 기억의 저편에서 딸깍하고 가로등의 스위치를 켜는 듯, 빛 바랜 색채의 막이 안개처럼 내린 그의 소리를 닫은 세상은 나를 어느 희미한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 김윤수

Vol.20140522e | 지금 그리고 저편-김윤수_노충현 2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