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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숙 블로그_www.jeongisuk.tistory.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화요일_10:00am~12:00pm
더 케이 갤러리 THE K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B1 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육각형으로 분해된 풍경들은 시공간적인 거리감을 가지는 체험들의 전후 관계를 복구해 보려는 불가능한 기획들이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정확하지만, 늘 상 전체적 맥락이 불확실하다. 육각형 사이의 간극들은 잃어버린 시공간에 내재된 균열들이다. 이 균열 속에서 작가나 관객은 길을 잃는다. 그것은 벤야민이 유년의 도시를 회상할 때처럼, '기억의 미로에 서있는 거리의 산책자'(그램 질로크)의 시점을 가진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유년시절의 도시를 더듬는 벤야민에게, 과거는 끝이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고 현재 속에서 변형되는 대상이었다고 지적한다. 전기숙의 작품에서 분열적 비전 속에 내재된 불확정성은 과거나 현재를 넘어서 미지의 시공간으로 연장된다.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기억이란 결코 안전한 기원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완전한 회복도 불가능하다. 작품을 통해 불러낸 것들은 완전한 회귀나 회복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 익숙한 듯 하지만 낯설어진 풍경들은 스스로에조차도 이방인이 되는 시점을 표현한다.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아이의 시점이 보존됨으로서 거리를 둔다. 도시를 비롯한 여러 장소들과 기억은 서로 침투한다. 장소는 기억에 의해, 기억은 장소에 의해 조금씩 변형된다. 기억과 장소는 변형을 위한 여지를 내포한다. 부분으로 분할되었다가 차이를 가지는 반복으로 다시금 집합되는 구성형식은 이러한 상호작용성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에 대한 글에서, 기억 그 자체는 도시와 유사하게 재현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거리와 골목길의 복잡한 망은 얽히고설킨 기억의 실과 유사하며, 도시 환경의 열린 공간은 망각된 것들의 공허한 빈자리와 유사하다. 기억과 도시는 시각도 끝도 없는, 끊임없이 보강해야 할 미로의 형상을 이룬다. 과거로의 여행은 멀리 떨어진 곳으로의 항해이며, 기억속의 움직임은 미로 속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미로 속의 움직임은 늘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는 것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이다. 회상은 미래를 지향하기에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우리가 움직일 때 시간은 뒤에 머무르지 않고, 미로의 공간처럼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도 끊임없이 되돌아오기에, 우리는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시간 속의 기억은 공간 속의 미로에 상응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써진 벤야민의 글처럼, 전기숙의 작품은 진보나 발전의 재현과 관계되지 않은 특성상 그자체가 미로가 된다. 여기에서 기억은 끝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회상이다. 벤야민은 '누군가 여행길에 오르면 그는 무언가 얘기할 거리가 있다'는 독일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이야기꾼은 의식적 회상, 즉 의지적 기억의 능력에 의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작가는 의식에서는 지워졌지만, 무의식이 보존하고 있는 무의지적 기억의 파편적이고 이질적인 자료들 역시 활용한다. 기억하려는 작가에게 경험만큼이나 기억의 직조는 중요하다. 육각형에 자리한 부분적 영상이 단편적 기억을 상징한다면, 그 사이로 난 간극들은 망각의 영역이다. 전기숙에게 기억은 이 불연속의 지대까지 포함된 잇기와 엮기의 작업이다. 분열된 시공간 속에 지각과 행동이 흩어져 있다. 들뢰즈는 '간격의 한쪽 끝에는 지각-이미지가, 다른 쪽 끝에는 행동-이미지가 있으며, 감정-이미지는 간격 자체다'고 말한다. ● 들뢰즈가 베르그송에서 차용한 공식에 따르면, '행동이 시간의 주인인 바로 그만큼, 지각은 공간의 주인'이다. 영화를 통해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지각이 대상을 공간 내에서 움직이지 않는 무수한 단면들로 규정하는 반면, 의식은 대상을 시간 내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지속으로 재통합한다고 말한다. 화면상에서 또는 캔버스 상에서 이루어지는 기하학적 공간 분할은 들뢰즈의 '결정체적 기호(Hyalosigne)'와 연관된다. '냉동된 기억'은 비유적으로만 결정체적 입자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전기숙의 시간-이미지가 결정체인 것은 그 다면성 때문이다. 결정체적 기호는 유기체적 기호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유기적 체제에서 사유함은 자기 동일적인 존재를 지향하는 동일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반면 결정체적 체제에서 사유함은, 지속적으로 열리는 생성 내에서 차이와 비동일성을 통해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유기적 묘사는 대상의 독립성을 상정한다. 그러나 결정체적 묘사는 대상을 대신해 지속적으로 그것을 지워나가는 한편, 대상을 새로이 창조하고 마찬가지로 적절한 또 다른 묘사로 대체되며, 이는 앞서 묘사를 변경하거나 심지어는 그와 모순될 수 있다. 결정체적 묘사에서 이미지는 대상을 통해 유기적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탈구성 되고 다양화된 대상을 구성하는 묘사가 된다.
묘사된 대상은 형태를 잃고 새롭게 창조됨으로서 대상이 고무하는 정신적 그림을 확장하고 심화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전기숙의 총체화 할 수 없는 풍경은 중심이 해체되어 있지만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사진으로 붙박힌 듯이 고정한 시공간의 단면들은 전체를 이루며, 이미 존재했던 것의 확인이 아니라, 새로운 것의 지속적인 창조가 된다. 육각형들로 프레임 화 된 작품에서 전기숙의 작품에서 시간의 기호들은 단순히 집합되어 있는 전체일 뿐, 전체와 부분 사의 관계가 꽉 짜여져 있는 총체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의 시간기계」에 의하면 들뢰즈는 전체가 열림, 즉 아무리 큰 집합이라도 각각의 집합이 자족적으로 닫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간격의 양면은 운동을 변형함으로서 새로운 운동을 산출한다. 전기숙의 작품에 선명한 시간 기호(chronosigne)는 쏘아진 화살이나 흐르는 물로서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치적 단위, 어떤 식으로든 파편화할 수 있는 간격들로 측정되는 미적분학으로'(로도윅) 제시된다. 분리된 시공간은 제자리에서 진동하며 자리를 바꾸는 잠재적 운동감을 가지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기숙은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의 가변성을 표현한다. ■ 이선영
Vol.20140515g | 전기숙展 / JEONGISUK / 全基淑 / painting